괴물도 아닌, 광대도 아닌
우리가 저지른 잘못보다 잘못한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여준다는 사실을 사무치게도 보여주는 요즈음이다. 군대에서 연일 들려오는 참담한 소식이 그렇다.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놀라고 분노한 가슴은 사건의 은폐와 무마 시도에 더해 ‘마녀사냥’이라는 왜곡마저 등장한 군 당국과 국방부의 대응 앞에서, 저렇게 하니까 그런 일도 일어났겠지,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세월호가 온 나라의 명백한 ‘현재형’일 때도 이런저런 추문을 만들던 사람들은 이제 ‘교통사고를 가지고……’, ‘단식을 어떻게 했길래……’를 거쳐 ‘대다수 유가족은 협상 매듭과 보상을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음으로써 추문이 곧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임을 증명하고 있다. 말할 때마다 뱀과 두꺼비 따위가 튀어나온다던 동화 속 이야기가 어떤 현상의 우화인지 새삼 깨달으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하고 소급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환기하는 장면
어떻게 저러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진정한 됨됨이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행위는 물론 피학 취향과는 무관한 노골적인 기득권 지키기라는 목표를 갖지만, 더불어 전(全)사회를 향한 파급효과도 겨냥하고 있다. 이 효과에 대해서는 대통령 자신이 정식화한 ‘비정상의 정상화’보다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인데,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단식 중인 세월호 유족 앞에서 ‘이제 국민들 생각해서 그만하라’고 말한 이른바 ‘엄마부대봉사단’ 같은 예가 그런 파급의 매개체라 할 만하다.
이들이 그냥 돈 받고 저러는 거면 좋겠다고 토로한 어느 네티즌의 심정은 어떤 점에서 윤일병을 가학한 동료병사들이 원래가 그런 ‘괴물’이었기를 바라는 마음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는 건 자살을 택한 군인들이 그저 ‘관심병사’여서 그랬다는 얘기만큼이나 초점을 벗어난 공허한 설명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나치 군인 아이히만(K. A. Eichmann)을 분석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통찰이 거듭 소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호참사와 윤일병 사건을 아우슈비츠와 연결시킨다면 단독성을 본질로 하는 비극의 존재양식을 무시하는 일이며 또 각각의 사건이 갖는 무게를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극에 ‘기여’한 사람들이 일정하게 노정하는 공통적인 경향이 있다면 두고두고 되새길 이유가 충분하다. 아렌트가 전하듯이 아이히만은 재판과정에서 정신과 검진을 통해 ‘정상’으로 판정받았으며 그를 검진한 의사들 중 한 사람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후의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라 말하기도 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79면). 그러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나치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만 정상”(80면)이었다고, 다시 말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조건에서만 정상이었다고 설명한다.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평범성’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기제, 다시 말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매개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렌트는 ‘관청용어만이 나의 언어’라 한 아이히만의 말에 주목하고, ‘독일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라는 히틀러의 구호를 위시한 나치 제3제국의 온갖 선전문구와 상투어들로 아이히만의 정신이 “넘치도록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 나아가 그런 문장들이 그에게 “의기양양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11면).
판사들이 아이히만의 인간적 양심에 호소하려 할 때마다 그는 이런 선전문구의 의기양양함으로 벽을 둘러쳤으며, 심지어 사형집행의 순간에도 그런 상투어를 읊으며 죽음에 맞섰다. 그를 분석하면서 아렌트가 뜻밖에도 뻔하고 지겹고 진부하다는 의미의 ‘평범성’(banality)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렇듯 관제 선전문구와 상투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현실에 대한 사유를 중지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괴물이기보다 광대처럼 보였다고 아렌트는 전한다.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저 문장을 유가족 앞에서 말하며 보여주는, 혹은 상상조차 힘든 구타와 고문을 윤일병에게 가하며 느꼈을지 모를 의기양양함은 비정상의 ‘평범함’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 패배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권력자들이 던져놓는 상투어를 통해 조금이라도 의기양양해지는 순간을, 오직 나 자신의 사유를 통해 구한 진실에서만 받아야 할 고양감을 느끼는 순간을 섬뜩한 경고로 기록해야 한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349면)을 이겨내는 일은 비슷한 의기양양함을 주는 ‘진보적’ 상투어를 고안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 힘으로 사유하고 내 언어로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 그렇기에 변화의 길이 언제나 더 험난한지도 모르겠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14.8.13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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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본문에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결말부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해본 적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과거 페미니즘에 눈뜬 여성들의 모토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나 자신을 비롯하여 이런 괘씸한 결심을 품어보았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의 실제 내용은 시대와 정황과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도 굳이 어떤 전형을 추출한다면, 엄마처럼 충분히 자기 삶을 살아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억압받으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그랬기에 딸들의 그와 같은 배은망덕한 선언에 엄마들은 전통적으로 '나처럼이라도 살기 쉬울 줄 아느냐'보다는 '그래, 나처럼은 살지 마라'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
아버지를 대상으로 이런 결심을 한 경우, 역사적으로 그 전형적 의미를 추출하려면 더 과감한 일반화가 필요하다. 한층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기회가 아버지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편리하게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타자'나 '상징질서'와 이어진 아버지 개념이다. 현실의 아버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이 어떠하든,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란 역시 질서나 권력, 세상 돌아가는 이치,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왔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 역시 이런 상징적 의미라는 각도에서 설명될 여지가 많다.
지금 상영 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감독 코레에다 히로까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영화의 제목을 보며 짧은 한숨이 나온 건 이런 사정에서였다. 또 아버지라니, 게다가 아버지가 된다니. 코레에다 감독은 묵직하든 사소하든 주제를 정서적으로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여기서 '정서적'이라는 수식어는 모든 것을 정서의 분위기로 편안하게 감싼다기보다 의식을 거쳐 정서까지 주제를 전달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본 사람이라면, 난데없이 방치되어 가장 노릇을 하고 급기야 죽은 동생을 가방에 넣어 묻어야 했던 열두살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도대체 이것이 사회인가' 하는 질문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경험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현실로 닥친다면 참으로 곤혹스럽겠고 가공의 이야기라 치면 다분히 막장드라마적인,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문제를 그린다. 코레에다 감독은 대개 어머니들의 고통이 전면에 나서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 촛점을 아버지로 옮겨놓는 방식으로 '낳은 정 기른 정' 식 구도의 진부함을 에두른다.
영화의 두 아버지 가운데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한 쪽인 '료타'는 성공한 인물답게 세상의 잣대를 내면화하고, 여섯살 난 아들 '케이타'가 오기와 야심이 없는 데 실망해온 인물이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통보에 '역시'라는 반응을 보인 데서 그의 됨됨이가 요약되거니와, 상대편 '유다이'의 집보다 형편이 낫다는 데 자만하여 바뀐 핏줄 '류세이'까지 아예 둘 다 갖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두 아이를 다시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그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케이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 점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료타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성찰이 필요한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을 들여다보면 이 '아버지다운'이라는 것이 꽤 흥미로운 이면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는, 료타가 자기 아버지를 방문하는 장면이다. 어머니와 헤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한번 제대로 놀아준 적도 없는 아버지와 료타는 아파 누웠다는 거짓말을 동원하지 않고는 얼굴 대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주제에 이 두 아버지(료타와 유다이)는 케이타와 류세이를 두고 '피'가 중요하다느니, 케이타가 자라면서 저쪽 아버지를 닮아갈 것이니 지금 바꾸는 게 낫다느니 하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 두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실제' 관계와 대화 속에 '가정된' 부자관계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더욱 통렬하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결말 부분이다. 무심코 살펴본 카메라에 케이타가 자신의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들을 발견하면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울컥 눈물을 쏟는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어, 료타는 케이타를 찾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찾아왔노라고, 절대 전화도 하면 안된다는 미션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말자며, 서투른 듯 수줍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료타는 혈연이라는 통념과 더불어 '약속'과 '미션'으로 둘러친 굳어진 역할로서의 아버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근본적인 반성의 차원을 포함하며, 이 반성이 자연스럽게 환기되는 정서로서 이루어지기에 호소력이 있다. 그렇듯 '상징질서'가 거기 속한 사람들에게 질서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하는 질문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지 못하는 어떤 '대박'의 약속과 창조의 미션도 공허할 뿐이다. 누군가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려진 철 지난 약속과 미션에 시달리는 오늘이라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더욱 와닿는지 모를 일이다.
2014.1.22 ⓒ 창비주간논평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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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딜’로서의 민영화
현실도 괴로운데 영화까지 골치 아픈 걸 봐야 하나,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고 나 스스로도 그런 심정이 될 때가 많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 되기에 우리의 현실은 도대체 어지간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현실도피성 이야기보다 현실을 직면하는 이야기야말로 그런 현실을 감당할 수 있게도 해준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 오면 이 또한 일종의 ‘리얼리즘의 승리’라 여겨도 좋지 않나 싶어진다.
제목부터 컴컴하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 「블랙딜」(이훈규 연출, 2014)도 그런 의미의 ‘힐링’ 영화로 볼 수 있을 듯하다. ‘7개국 민영화 리얼 탐방기’라는 소개답게 민영화가 세계 곳곳에서 야기한 끔찍한 사고와 심각한 사회문제, 그리고 민영화에 개입된 ‘블랙 딜’(black deal), 곧 검은 뒷거래를 다룬 이 영화의 어디에 힐링의 요소가 숨어 있으랴, 의심이 앞서는 이들에게 크게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는 민영화의 폐해
먼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곳에 나서 이런 부패와 파렴치를 보아야 하나 한탄하는 중이었다면, 눈 하나 까딱 않고 거짓말하는 부류들이 이 땅에만 있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이 영화를 통해 전생의 죄가 특별히 깊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을 구성하는 교차편집 장면들에서 우리는 민영화를 통해 철도요금이 ‘다양’해졌고 열차들이 ‘제시간’에 다니게 되었다는 영국 전(前) 전략철도청 홍보팀장의 말이 끝나는 즉시, 철도승객들의 목소리에서 그때의 다양함은 ‘대폭 인상’을 의미하고 제시간이란 ‘제멋대로’의 시간임을 알게 된다. 프랑스의 거대 물기업 쑤에즈(SUEZ)의 아르헨띠나 지사장이라는 자가 계약이 파기된 이유를 아르헨띠나 경제의 혼란에 뒤집어씌운 다음 순간,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공사 관계자가 등장하여 이 기업이 수도공급을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는지 곧바로 일러준다.
거짓말뿐 아니라 ‘막말’ 또한 보편적 현상이라는 증거도 역시 초국적 기업답게 이 쑤에즈사(社)가 제공해준다.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이 기업의 전 CEO는 물은 공공재이고 아껴 써야 한다는 상식을 조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부패가 없었던 때가 있었는가를 물으며 부패가 있다고 발전이 없는 건 아니라는 신념을 당당히 피력한다. 이 분이 감옥을 들락거리면서도 여전히 이 신념을 고수하는 데는 실로 부패를 통해 발전을 거듭한 본인의 자산상태가 큰 뒷받침이 되었으리라 영화는 꼬집고 있다.
민영화가 낳을 결과와 의미에 대해 더는 고민하지 않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점은 영화 「블랙딜」이 주는 두번째 (위안 아닌) 위안이라 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여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거치게 된다. 국민연금이 한마디 상의 없이 민간연금으로 바뀌는 바람에 하루하루가 빠듯한 노인들과 공교육 포기로 인한 등록금 인상으로 고생하는 학생들. 그래서 연금투쟁과 교육투쟁이 끊이지 않는 칠레의 상황은 차라리 나아 보인다. 아르헨띠나에서 민영화는, 예고 없이 며칠 동안이나 전기가 끊기는가 하면 노후하고 더러운 열차가 문도 닫지 않은 채 달리는 조마조마한 광경마저 만들어냈다. 이어진 대형사고의 장면, 그리고 아르헨띠나 정부가 그 며칠 동안 실종자를 ‘찾지도 않고 있었다’고 전하는 사망자 어머니의 증언에 이르면 그 참혹과 무책임의 기시성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참으로 익숙한 저 무책임과 기만
기시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필두로 의료영리화와 인천공항 매각 등을 끝내 단념하지 않을 태세면서도 절대 민영화는 아니라는 정부의 답변은 대운하는 아니라 했던 지난 정권의 얄팍한 해명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블랙딜」에서 다룬 태백시 상수도사업의 사례는 ‘뒷문으로’ 들여온 민영화가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일러준다. 환경공단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준정부기관에 수도사업을 위탁함으로써 민영화의 외양을 취하지 않은 채 향후 이 공단이 아무런 제약 없이 민간기업에 사업을 재위탁할 길을 마련하는 식이다.
「블랙딜」에 실제로 등장하는 ‘블랙 딜’은 아르헨띠나의 마리아 훌리아 전 환경부장관과 기업들, 그리고 프랑스의 쑤에즈사와 그르노블 전 시장 사이에 오고 간 뒷거래 등 일부 사례에 국한되기에 처음에는 영화의 제목과 내용이 약간 어긋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일러주는 바는 민영화에 으레 검은 거래가 따른다는 사실뿐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며 민영화를 기어이 뒷문으로라도 들여오려는 시도 자체가 검은 거래라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정상화란 말 그대로 그것을 공공기관답게, 실질적으로 공영화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블랙딜」이 보여주듯이 물과 전력과 의료와 교육과 철도의 민영화는 그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공공(公共)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통해 거꾸로 이런 것들이 언제나 공공재임을 증명해준다. 아직도 누군가 공공기관의 부채를 빌미로 민영화를 말한다면? 고개 들어 4대강을 보게 해야 한다.
2014.7.9 ⓒ 창비주간논평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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