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슬픈 날에도 글을
써야 할까. 지금 아이들이 배 안에 갇혀 있다. 숨을 쉴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숨이 막힌다. 슬픔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알지 못할 초월과 기적을 바라고 싶은 밤. 새벽 세 시 삼십 분. 배 안은 지금 캄캄한 암흑이 된 지 서른 시간도 넘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까? 현재 실종자 271명. 이 가공할 숫자. 가공할 어리석음. 가공할 슬픔. 우리는 오늘도 공포의 성채 속에 들어 있다. 나 아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가 그 악의 일부인 때문이다. 우리 모두 1분간 묵념.
2.
박완서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 벌써 3년이 흘렀나? 마흔 살에 문단에 나와 실로 쉼 없이 써온 선생이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박완서가 자기 옛날을 팔아먹었다고 철없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작품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6·25전쟁 중의 ‘작은’ 인간들의 진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나목》도 바로 그 계열의 작품이었으니, 앞의 두 작품과 이 작품이 다른 것은 전쟁 중의 실제 모델들을 작품 속에 살려내되 더 극화시켜 예각적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듯이, 이 작품 속 화가 옥희도는 바로 박수근이 모델이었다.
김완성 시인의 〈절구질하는 여인―박수근의 독백〉을 읽게 되니 곧바로 그 《나목》 생각이 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여인 이경은 미군 PX의 한국물품부에서 일하면서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주는 한 화가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바로 옥희도다. 그는 이경에게 마음이 끌리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알뜰하게 살펴온 순박한 아내를 사랑한다. 이경은 이를 질투한다. 옥희도는 사랑과 이상에 목말라하는 이경을 다독인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갖는다. 실제 속에서 상대방을 더 먼저, 또는 더 깊이 사랑한 자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것이 젊은 박완서가 아니라 박수근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본래 트릭을 쓰니 말이다.
〈절구질하는 여인―박수근의 독백〉을 쓴 시인은 이 그림의 모델이 바로 그 아내라고 한다. 그리고 박수근을 시의 화자로 등장시켜 가난한 아내와의 나날을 회상하도록 한다.
그때는 목숨 부지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네 맨발에 아기 업고 절구질하는 저 여인이 — 김완성 〈절구질하는 여인―박수근의 독백〉(《서정시학》 봄호)
그래도 아침 햇살같이 웃으며
저녁 새소리처럼 재잘거리며
가난도 식구라고 함께 살았다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외인부대에서 흘러나온
천막쪼가리에 남루한 동네를
흰옷 입은 사람들을 널어놓았지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속으로 빌면서
그래서 그런지 펼쳐진 풍경들이 하나같이
나를 닮은 화강암 그 빛깔이더군
누구냐고 묻지는 말게
그림 〈절구질하는 여인〉에 그려진, “맨발에 아기 업고 절구질하는 저 여인”은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안개 같은, 아니 짙뿌연 황사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화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왜 그런 먼지구덩이 속에 형체가 흐릿하도록 새겨 놓은 것일까? 그것은 전쟁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은 1954년의 작품이라 했던가? 바야흐로 전쟁의 죽음과 폭력과 궁핍이 시대를 자욱하게 물들였을 때이리라.
그림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시를 보면 시화를 보는 잔잔한 기쁨이 인다. 실로 박수근은 가난했지만 마음이 윤택했던 작가였다. 그는 가난한 삶을 미학적으로 만들었다. 그림 속에서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어렸을 때는 도대체 저 소박한 그림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술책에 등장하는 박수근화는 생명이 약동하고 분출하는 십 대의 에너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이 겨우 존재할 뿐인 고통과 남루를 통과해 놓고 보면 비로소 그것들의 진가를 알게 된다.
3.
송재학 시인의 시집 《푸른 빛과 싸우다》를 읽을 때, 그 호사스러웠던 느낌을 기억한다. 시를 감각의 표현 이상으로 쓸 수 있는 시인이 송재학이다. 그는 사물의 내부를 투시해 볼 줄 알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상징적이 된다. 사물들이 어떤 정신적인 의미로 환원되고 이것은 미리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진되는 세계의 새로움이 있다. 절벽도 그런 특징을 제대로 보여준다.
절벽은 제 아랫도리를 본 적 없다 — 송재학 〈절벽〉(《시로 여는 세상》 봄호)
직벽이다
진달래 피어 몸이 가렵기는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본 적 없다
움켜쥘 수 없다
손 문드러진 천형 직벽이기 때문이다
솔기 흔적만 본다면
한때 절벽도 반듯한 이목구비가 있었겠다
옆구리 흉터에 똬리 튼 직립 폭포는
직벽을 프린트해서 빙폭을 세웠다
구름의 풍경을 달았던 휴식은 잠깐,
움직일 수도 없다
건너편 절벽 때문이다
더 가파른 직벽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절벽은 의인화된다. 어떤 가파르고 삼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다.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재해석된 이순신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이 소설을 읽을 때 어느 면에서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적과 대결하는 인생을 사는 사내에게는 사랑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소설 속 이순신에게는 왜군만 적이 아니었다. 조정도, 장수들도 대적해야 했다.
절벽에 등장하는 이 ‘사내’도 사랑이 없다.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본 적 없다”. “천형”처럼 대결을 타고났다. “움직일 수도 없다”. “건너편 절벽” “더 가파른 직벽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식조차 없이 상대를 대적해야 하는 인생, 나는 그런 인생이 바로 이 현대인들의 것임을 안다. 김훈의 이순신이 현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현대에 사내들은 모두 이렇게 살풍경을 제 가슴들에 지니고 산다. 나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안다. 내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직벽”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4.
송재학 시인을 가리켜 사물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진단하고 나니, 즉각 그 반론을 펴는 듯한 시 한 편이 있다.
이 시는 우리가 아는 본질이라는 것이 저 사물의 내부에 있지 않다고 한다. 절벽 식으로 말하면 그 절벽 안에는 아무 인간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농약 묻은 껍질을 벗겨내고 사과를 먹는 단계를 지나 껍질째 사과를 먹는 방식으로 돌아온 이 시대의 세태로부터 시인은 사물의 껍질에 임재하는 본질을 갈파한다. 다음의 시다.
쳐다도 안 보던 껍질에 더 좋은 게 많다고
온통 껍질 이야기다
껍질이 본질이라는 걸 뒤늦게사 안 사람들이
껍질이 붙은 밥을 먹고 껍질이 붙은 열매를 먹는다
이때껏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본질인 줄 알고 나도 시퍼런 칼을 마구 휘둘렀다
연하고 보드라운 것에 집착했다
거칠고 상처받고 벌레 먹은 것들은 다 껍데기라고 도려냈다
본질은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곳에나 있다고 믿었다
딴에는 죽어라고 후비고 팠는데
공부할 때도 연애할 때도 시를 쓸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급하게 칼부터 밀어 넣었다
꼭꼭 씹어 볼 겨를도 없이
혀에 살살 감기는 것만 찾아다녔다
둘러쓸 것도 하나 없이 맨살로 덩그러니
나앉은 것 같은 날
허약한 내부를 달래주듯
껍질째 아작아작 사과를 먹는다
잘 씹히지 않는 본질을 야금야금 씹어먹는다
— 변희수 〈껍질과 본질〉(《신생》 봄호)
나는 이 시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본질만이 내가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믿었던 광기 어린 시대를 통과해 왔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화두》 첫머리에 자아비판의 요구에 직면한 중학생 소년이 등장한다. 전학 간 학교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존재를 글에 올렸다가, 너는 왜 이 공화국의 신생 학교가 그토록 초라하게 보였느냐고, 그것은 너의 아비가 바로 유산계급이었던 탓이 아니겠느냐고, 그 소년은 지도원 선생으로부터 힐난을 받는다. 그것이 이 소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어쩌면 모든 본질은 사물의 본래 상태와 관계없이 보는 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사물 내부에, 외부로부터 인공적으로 주입해 넣은 주관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칸트는 그 옛날에 이미 Ding an Sich,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본질을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은 위험하다. 나 또한 위험했고, 지금도 위험하다.
인간은 자신이 이루어낼 수 없는 과제를 설정해 놓고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포즈를 취하기를 좋아하는 괴상한 종류의 동물인지도 모른다. 비록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고 했지만 말이다.
껍질과 본질의 시인이 말하듯이 우리는 사물의 저 내부를 향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이고 산다. 역사의 내부, 사랑의 내부, 공부의 내부. 그러나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가? 있다. 없다. 없다? 있다?
5.
이 시인은 다시 내 시선을 끈다. 뭔가 있을 것 같은 시인이다. 그 내부에 말이다. 나는 또 금방 내가 해 놓은 말을 잊고 어떤 시인의 내부를 상상한다. 이 시인의 내부는 “빈 병”처럼 텅 비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가
빈 병처럼 와 있었다평범한 날과 특별한 날이
같을 수 없을까오늘부터 빈 병에 봄을 채웠다
오늘도 봄, 내일도 봄, 당분간은 봄
뚜렷하지만 어렴풋하게 봄
봄들만 줄을 서는 것이 봄이래희미한 일은 초봄쯤으로 선명해지고
선명한 일은 초봄쯤으로 흐릿해지다가
기념일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모든 빈 병이 같은 봄일 때
봄은 하루가 아닌 시절이 되었다너와 나에게 모두 평범해지는 날들
4일이면 사계절이 될 것 같다
— 이제야 〈가장 짧은 사계절을 살았다〉(《시로 여는 세상》 봄호)
나는 이 시에서 본질이 텅 비어 있는 나날을 본다. 병은 유리로 만들어져야 제격이다. 유리병 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봄날의 삶의 그 소란스러움, 화려함을 뒤로 하고 돌아본 나날의 본질은 텅 비어 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가/ 빈 병처럼 와 있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이 한 구절을 떠올림으로써 이 시는 시작되자마자 완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4일이면 사계절이 될 것 같다” 이것은 또 얼마나 멋진 언어유희인가? 이 유희로써 이 시인은 자신의 ‘탈존’을 완성 지었다.
옛날에 시인 이상은 이 지독한 보들레르적 우울,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다. 이제야는 아직 이 빈 병 같은 나날을, 그 본질로부터의 소외를 향유하는 듯하다. 아직 젊어서일까? 시간이 의식되지 않아서일까? 그날이 그날이어도 좋은 젊은 나날이기 때문일까? 이 호사스러운 소외가 부럽다.
6.
역시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삶이 있다. 어느 시인이 하루로 한 계절을 압축할 때, 어느 시인은 그 단 하루 때문에 운다.
깊은 허기로 뒤척이는 새벽, — 박지영 〈소묘〉(《문학마당》 봄호)
물을 끓이고 다시 컴을 켠다
비가 그치면 추워지겠지
저절로 몸이 떨려와
어깨를 부비고 가슴을 두드리다
지나간 하루가 새삼스러워
그냥 숨결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나는 이 시의 주인공이 왜 우는지 모른다. 그러나 느낌은 알 것 같다. 다 합쳐야 아홉 행, 하지만 더 넣을 것도 뺄 것도 없다. 컴퓨터가 “컴”이 되는 압축력으로, 이 시인은 알집으로 사연을 압축하듯 축약해 놓았다. 이것을 풀어내라 요청하고 싶지 않다. “지나간 하루가 새삼스러워”라는, 이 간결한 한 행에 모든 사연이 다 들어 있다. 이때 그 하루에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자신의 삶의 본질을 꼭 그 하루만큼의 분량으로 떼어 담았다. 피와 살이 함께 엉클어진 그것을.
7.
이 무거운 삶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꼭 그렇게 무겁게 감당하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은 이 반어가 빛나는 시다.
달과 함께 아 집이 나가버렸다 달과 함께 너도 나가라 아주 멀리서 — 엄태경 〈즐거운 나의 집〉(《작가들》 봄호)
집에 왔다
나의 집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듣지도
말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우두커니 한 곳을 지켜보더니 심심하다
배고프다 참 재미없다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휑하니 집이
나만 남았다
달아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여운이 깊게, 길게도 남는다. “아주 멀리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멋지다. 혼자서 달과 함께 집으로 온 이 고독을 완벽하게, 그래서 멋지게 처리하고 나자 누군가 이 화자에게 박수를 쳐준다. 누구일까? 그것은 화자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사는 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 그가 기대하는 어떤 먼 그대일 수도 있다. 그의 이름도 얼굴도 지금 어둠에 감싸여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박수를 친다. 이 멋진 끝맺음에 대해.
방민호 문학평론가·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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