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중파 뉴스는 보지 않는다.
7월 들어서자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이는데, 그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가자 지구는 천장 없는 감옥이요, 이스라엘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인명을 살해할 수 있는 놀이동산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산에 올라 폭격을 구경하고 있을 때 팔레스타인 할머니는 죽은 손녀의 몸을 얼싸안고 통곡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우크라이나 반군의 미사일에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화해 버렸다. 우크라이나 반군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고공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격추할 수 있는 미사일은 누가 제공했나? 필시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희생된 이들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4·16 이후 우리나라는 범인이 없는 일들을 겪고 있다. 살인은 있는데 범인은 없다. 숱한 인명이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일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조각조각 나뉘고 분쇄기에 넣어져 잘게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다. 범인의 꼬리가 지금 저 골목 쪽으로 사라지고 있다. 쫓아가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흉악한 살인자 뒤를 쫓는 일만큼 무서운 일도 없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6반 고 김동협 군은 자신이 배에 갇혀 죽음에 직면한 시간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거리에서 “범인은 있는데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지” 물었다. “저는 엄마로서 이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말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아이가,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 보지 못했다는 아이가 “나 살고 싶어요.” “나 살고 싶어.”라고 말할 때 선실의 전기는 ‘통제’되고, 끊기고, 방송은 학생들에게 해경이 오고 있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해경은 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국회 청문회에서 해경을 비롯한 구조 책임자들은 무능력해서 죄송하다는 표정들을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을 때 왜 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서울 곳곳에서 유가족들이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고, 단원고 학생들이 진실을 요구하며 서울로 걸어올 때쯤, 세월호 참사 유역으로 지원을 다니던 소방 헬기가 광주 도심으로 추락하는 또 하나의 참사가 일어났다.
어떤 기장이 라디오방송에서 추락 장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데 1년이 걸릴 것이라는 뉴스를 언뜻 보았다.
모든 조사는 1년도 걸리고 2년도 걸릴 것이다. 이 조사가 미국의 항공우주국 조사와 다른 것은 결과가 명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는 세상에 정녕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 누군가가 그렇게 이유 없이 죽어가야 했는지 알면 안 된다.
헬기 조종사 정성철 소방경은 수직 급하강, 추락하는 헬기가 아파트 단지나 학교 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시도를 펼쳤다. 그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또 희생되었을지? 그러면 또 가짜 언론들은 어떤 여론전쟁을 펼치려 했을지?
텔레비전을 틀어놓아도 소리를 다 죽인다. 공중파 뉴스는 절대 보지 않는다. 네이버는 되도록 들어가지 않는다. 혹시나 들어가도 ‘낚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친구와는 세상 얘길 입에 올리지 않는다. 마의태자, 경순왕, 학술대회 준비 논문 얘기나 한다.
2.
결국 인간이란 그렇게 진실 바깥을 빙빙 돌다, 덧없는 고해를 허적이며 떠돌다, 고단한 인생을 그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이 지상에서 행복하려면 루쉰의, 아Q의, 정신승리법이 필요하단 말일까?
두 눈 질끈 감고, 아무것도 없노라고, 무엇을 생각하고 따질 게 있느냐고, 그냥 나와 내 식구를 생각하며, 그 외에는 조국의 미래나 생각하며 살면 그만이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잔 말이다.
그런 세상 모양을 한 번 상징적인 축도로 그려보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록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한 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
하시고
J?
하시면,
O…… 하시고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그 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 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는 있었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있었습니까?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 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 이경림 〈지렁이들〉( 《신생》 봄호)
동문서답.
이경림 시인은 시선이 날카로운 사람이다. 시의 언어의 시각적 측면이 어떻게 심상을 구축해 내는지도 생리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일찍이 이상이 산촌에 들어가 요양할 때 자기가 개울가에 N자 모양으로 앉아 있다고 한 이래 시의 타이포그래피적 측면을 이렇게 능란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구현한 이가 없었다.
이 시의 놀라운 반전은 마지막 두 연이다. 여기에 이르러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 삶이 바로 보도블록 위의 두 마리 지렁이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단정해 준다. “아아, 그때, 우리 / 이목구비는 있었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있었습니까?” 이 대목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는 차라리 복수를 마치고 난 ‘친절한 금자씨’처럼 케이크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민얼굴을 비로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다. 햇살이 내리쪼이는 보도블록 위에서 각자 무관하게, 동문서답하며 몸뚱이를 뒤치는 두 마리 지렁이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외면하며 죽어갈 뿐이다.
아이들이 죽어간 진실을 알아야 하겠다고 해도 한편에서는, 마, 고마 하자, 하는 세상, 나도 당신 얘긴 못 들어 드리겠다.
3.
평소 같으면 무심코 넘길 시도 요즘 같으면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나 또한 악마같이 변질된 나의 영혼에 어떤 구원이 내리기를 어찌 간구하여 마지않으랴.
덜 먹고, 덜 마시고, 덜 보면서, 내게 다른 일이 생기기를, 영혼의 안식을 얻는 축복이 깃들기를 왜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랴.
그래서 이런 때는 단 몇 행뿐인 시일지라도, 우리 삶의 슬픈 타락을 떠올리며, 슬픈 공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왼쪽 귀가 잘린 고양이가 죽은 새끼를 물고 벚꽃 그늘과 목련 아래를 오갑니다, 비로소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 채상우 〈사순절〉(《시에》 여름호)
지금 같으면 아무리 자력구제가 좋다 해도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 타력이 아니고서는 나를 이 짐승 같은 슬픔과 의혹에서 건져 올릴 수가 없다.
〈사순절〉의 시인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나날에 한쪽 귀가 잘린 어미 고양이가 죽은 새끼를 물고, 꽃나무 아래를 오가는 풍경을 본다. 그리고 “비로소”, 한 연을 띄우고,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
이 시는 일종의 알레고리인가? 그렇다면 아주 단순히 말해서 우리는 모두 “죽은 새끼,” 죽어가는 새끼들인 것일까?
바로 어제, 나는 학교로 올라가는 고갯길에서 자동차에 밟힌 고양이 시신을 보았다. 몸이 두 동강이 났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내 차바퀴가 그 위를 역과하는 것을 느끼며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4.
《유심》 6월호에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특집을 냈다. 시대의 고통에 감응할 줄 아는 것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 가운데 진실이라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시를 한 편 꼽아본다.
한 어미가 팽목항에 있습니다
한 아비도 팽목항에 있습니다
노여움으로 비가 내리는
저 앞 섬들이 희끗희끗한 곳
거기에 우리의 딸 아들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노란 리본이 비에 젖어 펄럭이고 있습니다
선실에서 나오지 말하는 말을 착하게 따르던 아이들이
그렇게 돌아오라고 울부짖는
어미와 아비의 말은 왜 듣지 못하는지 이상합니다
밤새 춥지는 않더냐
밥은 먹었느냐
아가
우리 아가
한 아비가 제 가슴을 내려칩니다
한 어미가 복장을 찢어발깁니다
옆에 서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자식 가진 부모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말이라면 착하게 순종하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떠나보내지 않을 겁니다
누구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멈추어 더 이상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돌아올 때까지
돌아올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어떤 말에도 속지 않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그 한 마디만 새기며
노란 꽃잎으로 살아오는 그날까지
한 어미가 팽목항에 있습니다
한 아비도 팽목항에 있습니다
내 새끼들 살아오는 것 똑똑히 보려고
준엄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거짓말로 수장된 이 땅을 우리 손으로 건져야만 하는 오늘
어떤 거짓으로도 덮을 수 없는
팽목항에는 비가 내립니다.
― 박형권 〈팽목항〉(《유심》 6월호)
죽음을 노래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여러 곳에서 세월호 사건에 관해 노래하는 시를 접했다. 세월호에서의 죽음은 예사 죽음과 같지 않다. 이것은 아직 죽음의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고 진실을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며, 이 진실을 어디까지 밝혀내느냐에 따라 시국 전체가 불확실한 상황으로 접어들 수도 있는 파장을 가지고 있다.
이 죽음은 그래서 단순히 슬프다고만 할 수 없고, 미안하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더 깊이 음미되고 성찰해야만 할 성질의 것이다. 세월호에서의 죽음을 노래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에 그칠 수 없는 심각하고도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 시는 슬픔과 진실에의 갈증이 공존하는 시다. 팽목항이라는 비극의 ‘현장’을 지키는 “어미”와 “아비”의 모습을 전면화하면서 진실만이 목마른 그들의 슬픔을 달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어떤 거짓으로도 덮을 수 없는” 팽목항이다. 아이들이 말했던 것처럼 ‘진실은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고.’
5.
여기서 나는 한 젊은 시인의 시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시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펼친 작품에 대해서 말이다.
이 시는 죽음을 일상적 사건으로 덧없이 환원시키지 않고 그 속에서 아버지의 삶의 의미를 구하고,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의 의미까지 포착하려 한다. 이런 시도가 요즘 신진들의 시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노력해도 못 잊을 날개는
녹슨 물의 금고에 맡겨두고
지구상에 가장 높은 바닷속을 나는 물고기를
알아 그리고 대기의 파도 위에 그려진 그는
푸른 새벽처럼 일렁이는 물고기 그림자를
쫓는 육십 대 망명가 그를
알아 그가 평생을 쫓은 지구상에 가장 깊은
하늘 속을 헤엄치는 새를
알아 노동의 기억으로 채워진 부레는
녹슨 허공의 금고에 저당잡히고
그날은 그물처럼 질긴 저녁이 내리다
저녁은 전생에 물고기였던 그의 목숨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걷어가다
전국적으로 무국적의 저녁이
나지막이 울리는 비가
내 정수리에 일렁이는 물고기 그림자
한가운데로 깊숙이 드리우다
― 김중일 〈물고기 그림자―아버지에 대해〉(《작가들》 여름호)
이 시가 언뜻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아버지와, 그의 삶과, 자신과, 이 세계를 상징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상징적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 쉬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여기서 “물고기”라는 시어에 대해, 바닷속을 나는, 본래는 새였던 심연의 물고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를 어렵게 읽도록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행 배열의 독특함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기법이 없는 현대 시단이지만 이 시인의 시행 배열은 시를 읽어가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읽는 이들로 하여금 화자와 그의 아버지와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이 기법은 읽는 이들을 화자 스스로 참여하는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다시 참여하게 한다. 오랜만에 ‘고전적인’ 시를 접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6.
최서림 시인은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라는 시집이 처녀 시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이서국은 아주 옛날 신라가 태동하던 무렵에 청도 지방에 존재했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나는 그 시집이 나올 즈음 저자에게서 직접 들었었다.
최근에 최서림 시집이 시집을 다시 펴냈다. 나는 그 시집을 아직 통독하지 못했지만 자연물들을 다룬 시들로 시작하는 지극히 서정적인 시집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서정에는 지성적인 뒷받침이 분명해서 말랑말랑하게 읽히지도, 감상으로 흐르지도 않는 완강한 데가 있다. 여름이 한창일 때 여행을 가서 이 시집을 죽 읽어볼 생각이다.
그는 학창시절에 무척 가난했고 힘겹게 학교에 다녔고 대학이나 대학원에 와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 나가야 했다. 그러한 그가 1970년대와 지금의 2010년대를 마주 세워 보는 시를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서정시에 밑받침된 지성의 작용이 전면에 드러난, 그로서는 특이한 화법의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납금 밀리면 수업도 못하고 집으로 쫓겨 갔었다.
식목일 앞산에서 뽑은 소나무를 뒷산에다 옮겨 심었다.
죄다 말라 죽었다. 장학사만 떠도
난간에 간당간당 매달려 유리창을 닦곤 했다.
국민교육헌장 못 외운다고 집에도 안 보내주었다.
앞다퉈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떠들어댈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 한다고 따귀를 맞았다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할 땐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발 쓴 낯선 얼굴들이 강의실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했다.
선데이서울과 함께 엮어 문예지가 폐간되던 시대
자기 글을 자기가 알아서 검열했다.
삼청교육대가 잘하는 짓이라고 나발 불던 사람들.
데모하다 잡히면 콘크리트 바닥에
죽은 개 끌고 가듯 질질 끌고 갔다.용산 참사가 그저 뉴스 속의 사건일 뿐,
철도 파업이 내 밥그릇과는 상관없는 일일 뿐,
‘시민’은 죽고 ‘개인’만 살아남았다.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버린
오디세우스 부하같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유신 때가 더 좋았다고 꿀꿀거리는 축들도 있다.
분노한 99프로의 반격에 열광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홈쇼핑으로 일상의 구멍을 메워보는
망가진 안락의자 같은 삶.어제의 야만은 오늘의 야만을 낳고
보이는 야만은 보이지 않는 야만을 낳는다.
― 최서림 〈야만의 시대〉(《시에》 여름호)
이 시에서 화자는 이 시대에 편만한 회고열을 지극히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과거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노라고 화자는 주장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야만”의 얼굴들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드문 열거법으로 그 시대에 일어났던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손에 들어 보인다. “유신 때가 더 좋았다고 꿀꿀거리는 축들”을 향해 과연 그러했느냐고 반문한다.
마지막 연 두 행은 우리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에 대해 약간 첨언해 본다. 문명은 야만을 쫓아버린 것이 아니다. 문명은 그 안에 또 다른 방식의 야만을 내포하는 것이다. 문명은 훼손 없이 문명화되지 않으며 그 훼손 때문에 우리는 문명 속에 야만을 간직하게 된다. 어제의 야만은 오늘의 야만을 낳았다. 과거에는 보이는 야만이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야만이다. 어제보다 오늘은 문명화되었다고 하지만 이 문명 속에 어제가 낳은 야만이 문명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유토피아를 향해서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민호 문학평론가, 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창작과 비평》(평론), 2001년 《현대시》(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 《납함 아래의 침묵》 《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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