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솔 시인이라고 불렀다. 한때 같은 동인지에 시나 수필이 실리기도 했고, 한때 같은 출판사에서 시집이 나오기도 했던 시인. 내겐 그녀의 글 보다 낭송이 진하게 남겨진 듯 싶다. 잘 지내시리라. 7년 전 내가 머물던 도시로 이사 왔었던 그녀, 식욕도 술욕심도 왕성했으니, 건강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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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낱말 Slowka
“La Pologne(폴란드)? La Pologne(폴란드)?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이렇게 물으며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지구촌 방방곡곡 분쟁이 끊이지 않는 요즘, 날씨 이야기만큼 적절한 화제도 없으므로. “아, 부인!”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 조국에서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쓴답니다. 물론 이십사 시간 내내 장갑을 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포근한 달빛이 방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면, 그때는 비로소 장갑을 벗지요. 그들이 쓴 시구에는 부엉이의 황량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담겨 있답니다. 이따금 사나운 광풍이 으르렁대며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기도 하죠. 시인들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답니다. 고전주의자들은 바람에 쌓인 눈 더미를 발로 꾹꾹 누른 뒤에, 그 위에다 잉크를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겨넣지요. 나머지, 우리 데카당파 작가들은 흩날리는 눈송이의 덧없는 운명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기곤 하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직접 도끼를 가지고 호수 위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친애하는 부인이여!”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고드름’과 ‘바람구멍’도 확실치 않았다.
“La Pologne(폴란드)? La Pologne(폴란드)? 거기는 지독하게 춥다면서요? 정말인가요?”
“Pas du tout(뭐, 대체로 그렇죠).”
나는 얼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만다.
역사와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숙명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실존 철학과 시를 접목시킨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 '쉼보르스카'.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표현과 정곡을 찌르는 명징한 언어. 풍부한 상징과 은유, 적절한 우화와 패러독스 등을 동원한 완성도 높은 시로 사랑을 받고 있는 '쉼보르스카'.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표지사진 아래에 외대 폴란드어 교수로 재직 중인 최성은님이 써 놓은 소개를 읽으며 동감을 한다. 더하자면 쉼보르스카는 완곡화법에 능통하다. 그녀는 입이 크고 웃는 얼굴이 미인이다.
2009년 겨울에 끄적였던, 짜깁기 수준의 나의 ‘졸시’ 도 떠오른다.
어느 날 플렌치장미를 본 당신이
장미가 '너무 아름다워' 라고 말하자
입때껏 본 장미는 그랜디플로러가 전부인
다른 사람이 '그래 아름다워' 했을 때처럼
각자의 그림 각자의 감탄으로 꽃을 감상하는 우리
꽃이라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또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꽃은
플렌치가 그랜디플로러가 아니다
단 하나의 꽃이고 싶었던 김춘수도
그랜디플로러도 플렌치도 엇갈리는 빛이다
무엇보다 이름도 모르고 태어난 꽃들
당신 밖의 향기다
꽃은 이름 불리는 데로 살지 않는다
모든 이의 꽃이 내 꽃이 될 수 없듯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일,
한 가지의 물을 네 가지로 보듯(一水四見)
김춘수의 꽃 중 하나도 분명
능동의 꽃이었을 것이란 상상을
오정자 <A와 A'> 전문
시가 아무리 독백의 한 부류라고 하지만 때론 자신도 못 알아듣게 지껄이기도 하고 그것을 그대로 떠돌게 만들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불친절은 수선공의 망치와 못을 필요로 한다.
언어의 마술사이거나 인생의 마법사라 부르고 싶은 쉼보르스카. 그녀는 자유롭고 신비로운 입을 가졌다. 시인이나 가수의 최고의 즐거움(樂)은 노래하는 것.
쓰는 즐거움Radosc pisania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PP121-122
‘고요라는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는 부분에선, 김기택의 ‘파리’와 백석의 ‘수라’가 연상된다. 말들끼리 부딪혀 충돌하기도 하고 또 낄낄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면서 독자의 눈을 저만치 데리고 달아난다. 입체파 시인들은 종이 위에서도 충분히 공놀이나 골프까지도 가능한 사람들 아닐까. (에이 돈 많으면 지가 왜 이러고 놀아요, 필드에 나가서 놀지, 그러니?) 어쨌든 그녀의 손가락 보복이 난, 한 개도 안 무섭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그것에 더 민감했을 것 같다.
사진첩Album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PP126-127
90년 대 후반에 양귀자 소설 모순을 읽었다. IMF조짐이 있을 무렵, 소설 속 안 진진이란 여자는 두 여자 -자기 엄마와 친이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식하지만 치열했던 어머니의 삶과 로라의 집 인형 같은 삶을 살다 돌연 죽음(자살)을 택한 이모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쯤, 나는 또 37세에 귀를 자르고 권총 자살을 했던 고흐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했었다. 모순과 아이러니를 끄적이던 그때의 에피소드를 뒤적이자니 문득, 인간의 고통의 이유는 심각한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어제 산 운동화 속 '모래 한 알'의 깐죽거림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경이로움Zdumienie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 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p198
2012년 2월 2일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시의 프리즘으로만 그녀를 봐야 한다. 꽤나 늦은 시절, 그것도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 밤에 우연히 그녀를 만나, 네 편의 시 속에서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데 쌉싸름하다, 시방 나는,
오토토미아(안) 우투투미워 Autotoma 자기절단이란 시에서 그녀는 할리나 포시비아토프스카(누구지?)를 추모하고 있네. 그 마지막 아포리즘에 퐁당 할 뻔 하면서....
심연(深淵)은 결코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단지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뿐.
<자기 절단>부분 p205
수많은 사람들과 어설픈 시인들은 이제까지 그녀의 저 경구를 표절했을까, 아니면 그녀 이전 부터 유명했던 말이었을까. 갸우뚱하나 역시 언제부터 생긴 말인지 누가 먼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던져진 돌멩이는 실존을 감싸는 힘이니까.
행복한 사랑 Milosc szczsliwa
행복한 사랑, 이것은 정상인가
심각한가, 유용한가?
사랑에 눈먼 두 사람에게서
세상은 무얼 얻을 수 있나?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서로를 숭배하고,
자신들이야말로 백만 명 중 가장 운이 좋은 첫번째 커플이라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섣부르게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 기막힌 행운은 과연 무엇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별것도 아닌 이곳에 서 있는 그들에게만 한줄기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렇다면 왜 하필 다른 이들이 아니라 그들이란 말인가?
이것은 정의를 모욕하는 것인가? 그렇다.
조심스레 쌓아올린 질서를 뒤흔들고,
절정에서 윤리를 내팽개친 것인가?
그렇다. 맞는 말이다.
행복에 겨워하는 이들을 보라.
가면을 쓰고서라도
우울한 척하면서 친구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어보라.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그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라. 이해심 많은 척 꾸며대는 가식의 언어를.
그들의 의식과 허례는
서로를 위해 고안된 의무 조항,
인류의 등 뒤에서 맺어진 밀약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사례를 모방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종교나 시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포기하게 될까?
과연 그들은 이 비좁은 제한 구역 내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 할까?
행복한 사랑.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상식과 판단력이 행복한 사랑에 대해 무조건 침묵을 강요한다.
마치 완벽한 인생에 느닷없이 끼어든 망측한 추문이라도 되는 양.
행복한 사랑의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훌륭한 아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다.
행복한 사랑이란 좀처럼 없기에
그것만으로 결코 지구를 채울 수 없다.
행복한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여,
행복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쳐라.
그런 확신만 있다면 살아가는 일도, 죽는 일도
한결 견디기 쉬울 테니까.
pp211-213
솔로몬의 전도서인지 미드라쉬인지 붓다의 팔만대장경인지에 보면, 내 이웃을 돌아다니며 죽은 이가 하나도 없는 족보를 가져오라 이르는 구절이 나온다. 쉼보르스카의 시에서도 행복의 역설이 나온다. 사랑이란 두 글자도 버거운데 그 앞에 행복이란 형용구까지 있으면 우리는 생리적으로 못 견딘다. 어디에도 없다 고 큰소리로 외치는 순간에 다시 만재하는 내 남자, 내 남편, 내 애인들 !
오, 이 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여, 이곳에서 내가 사랑한 사람이여,
그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는 막연히 상상해본다.
이곳에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공허를 감내해야 했을지.
이곳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미약한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오랜 적막이 이어졌을지.
이곳에서 괭이밥나무가 작은 잎사귀 하나를 피우기 위해
저곳에서 얼마나 황량한 황무지가 펼쳐졌을지.
한 줄기 햇살은 암흑에 대한 보상이고,
한 방울의 이슬은 기나긴 가뭄의 대가이거늘!
그녀의 '행복한 사랑' p214 부분이다. 여기서 나도 올림픽 정신을 발휘하여 한 줄 쓰자면 ; ‘저곳에서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이곳에서 우리 얼마나 많이 연습해야 할지.’....
작은 별 아래서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대도,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 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 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 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 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 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영혼이여, 내 너를 자주 잊었더라도 기분 나빠 말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 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 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 가며 열심히 짜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지난 밤 구운 감자를 먹으며 희희낙락 시를 읽었다. 앞으로 올 밤과 낮 동안에도 사과를 많이 해야지. 사랑이 이해 못하는 것을 감사로 메꿔야지! 사랑에게 탕감받으려면.....
감사Podziekowaie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 선한 양의 무리 속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면 평화롭고,
그들과 함께하면 자유롭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첫 만남부터 편지를 주고받을 때까지
영원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며칠이나 몇 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음악회에 가도 끝까지 집중할 수 있고,
대성당을 구경할 때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주위의 모든 풍경도 또렷하게 잘 보인다.
일곱 개의 산과 일곱 개의 강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지도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산과 강일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일 내가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서정적이지도 수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지평선, 실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의 덕택이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맨주먹 안에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지.
"난 그들에게 아무런 빚도 없어."
아마도 사랑은 이렇게 말할 게다,
이 공개된 질문에 대해서.
시편(詩篇) Psalam
오, 인간이 만들어낸 국경선은 얼마나 부실하고, 견고하지 못한지요!
얼마나 많은 구름이 그 위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한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흩날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산속의 조약돌들이 생기 있게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낯선 토양을 향해 굴러가고 있는지.
열을 지어 나르거나 혹은 국경선의 바리케이드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이름을
여기서 내가 굳이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요?
뭐, 그냥 평범한 참새라고 칩시다- 그 참새의 꼬리는 이미 이웃 나라에 속해 있겠죠.
부리는 아직 이쪽을 향하고 있지만.
게다가 가만있지 않고, 몸을 까딱까딱 흔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무수히 많은 벌레들 중에 개미 한 마리를 예로 듭니다.
국경 수비대의 오른쪽 신발과 왼쪽 신발 사이에 놓인 그 개미는
어디로 가는 중인지, 어디서 왔는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할 거예요.
각 대륙에 산재한 모든 혼린과 무질서를
한눈에 속속들이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물에 떠다니는 수천만 개의 잎사귀들 중에
반대편 해변에서 은밀히 떠내려온 쥐똥나무 잎이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뻔뻔스러우리만치 기다란 다리를 가진 문어가 그 발을 뻗어
바다 속 신성한 구역을 함부로 휘저어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별이 어떤 별을 비추는지 분명히 볼 수 있게끔
별들의 위치를 바꿀 능력도 없으면서
과연 우리가 자연의 질서에 관해 논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사방으로 넓고 깊고 깊게 차오른 저 괘씸한 안개!
위풍당당 푸른 초원을 가득 메운 저 먼지 덩어리들!
공기의 파장을 타고 공명하는,
짹짹거리는 가냘픈 비명과 으르렁대는 괴성!
오로지 인간의 소유물만이 완벽하게 낯선 것이 될 수 있는 법.
나머지는 그저 여러 가지 잡풀이 뒤섞인 숲이고, 두더지가 파놓은 구멍이고, 바람일 뿐입니다.
2014. 8.18. 쉼보르스카의 시편들,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