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피가 담긴 냄비를 눈 쌓인 마당에 쏟은 일은 그 낭패도 뇌의 해마에 각인된 인생의 쓰라린 실패의 기억이겠지만, 백색을 잠식하는 붉은 색깔의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충격적인 경험이겠지요. 붉은 피가 백색 눈으로 번져가는 그 광경을, 다리가 많은 돈벌레의 재빠른 움직임, “수백갈래로 퍼져서/흰 눈을 갉아 먹는 붉은 다리들, 붉은 이빨들”이라는 이미지로 드러낸 것이 놀랍네요. 시란 무엇인가요? 시는 현실을 꿰뚫고 그 본질을 파열하듯이 드러내며, 흰눈을 삼키는 붉은 피와 같이 마음의 결로 파고들며 속절없이 적셔버리는 것! 시는 언어와 이미지를 넘어선 경험과 세계의 함의(含意)를 마침내 세상을 향해 까발리는 것! 무자비한 것, 지옥 같은 것, 닷새면 상하는 피 같은 것! <문학집배원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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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고, 라고 불렀다’의 주요 시 가운데 하나인 ‘싱고’에서 싱고는 시인이 자신의 기분에 붙인 이름이다. 시인은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은 싱고와 함께 “아궁이 앞에 앉아/ 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고 말한다. “은단껌을 싸고 있던” 은박지 조각을 보며 시인은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맛도 냄새도 없”는 싱고는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던 때의 기분을 묘사한 이름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미묘한 존재이다.
저자는 등단(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7년만에 첫 시집을 낸 신미나 시인이다. 1978년생인 시인은 “오래 되고 익숙한 農耕을 담아”내는 대체 불가의 시인이다. ‘싱고, 라고 불렀다’에 실린 시들은 스무살에 고향 충남 청양을 떠나 서울과 강원 강릉에서 지낸 시인이 아궁이에 불 때며 살던 유년의 시골 기억으로부터 길어올린 시들이다. 대표적으로 농촌 풍경을 담은 시는 ‘백치’라는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미 소가 새끼를 낳고 이내 무릎을 꿇“은 이야기를 한다.
1978년생의 젊은 시인이 전통과 농경을 노래하는 것이 의외일 수 있지만 시집은 느린 농경의 삶과 사랑과 이별, 그리고 도시의 삶을 두루 담았다. 시인은 서울서 쓰리를 당했다며 속상해 하는 현주의 말투가 부러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서울은 미아삼거리 지하도 입구에서 만난 앞니 빠져 입이 옴팡한 할머니가 파는 두릅 다발이 노래되는 등 시골의 풍경과 그리 먼 풍경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추천글에서 김사인 시인은 “이제 저마다 새로워서 결국 누구도 새롭지 않은 시대, 열매에 팔린 나머지 아무도 뿌리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한 세계로 우리는 밀려오고 말았다.”고 썼다. 시인의 삶을 채색한 것은 가난,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정, 농촌의 전통적 풍경 등이다. 모성적 비유도 빼놓을 수 없다. 큰물 진 것을 내천에 젖이 분 것으로, 어린 조약돌 몇이 내는 소리를 이빨 가는 것으로 그려낸 것이 그것이다.
안타까움의 대상인 어머니와 달리 시인의 아버지는 고드름 칼 같은 존재, 소주병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존재, 엄마를 삽으로 때리던 존재이다. 시인은 신부 입장할 때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날계란 쥐듯 쥔 것을 드문 일이라 표현한다.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음 생에서는/ 엄마로 태어나지 말“라고 말한다. 시인은 생쌀을 먹으면 엄마가 일찍 죽는다는 소리를, ”손톱 깎아서 아무 데나 버리면/ 미물이 주워 먹고/ 요사스러운 일을 꾸민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 이별수가 있다“는 말도 시인 덕에 들은 아스라한 추억 거리이다.
공기돌을 굴리며 손안에서 피어나는 민물 냄새를 맡으며 자란 시인은, 할아버지의 무등을 탄 채 지붕 위로 어금니를 던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시인의 어린 의식 속에서는 서울에서 온 목사분이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 신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한 말이 아름답고 무서운 것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결국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기분에 싱고라는 이름을 붙인 시인은 ‘시’라는 시에서 상상력과 시의 관계에 생각하게 한다. ”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 한사발의 붉음인데/ 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 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 시인이 머릿속에 한사발의 붉음이 고였다고 말한 것은 선지피를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해주는 것은 시 창작의 어려움이다.
여러 시들 가운데 돋보이는 것은 ‘자귀나무 꽃살문’이다. ”...너는 오래도록 서러웠고/ 내 귀는 닫혀 있었네/ 꽃길 열리고/ 꽃문 닫히고/ 비단이불 위에 너의 속눈썹/ 꽃술 떨어지네/ 당신이 저무네“ 아름다운 연시(緣詩/戀詩)로 읽히는 이 시를 끝으로 나는 박혜경 평론가의 ‘세기말의 서정성’이란 책을 펴본다. 평론가는 미래의 시간을 기획하기보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오려는 서정시들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동의할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신미나 시인의 ‘부레옥잠’ 같은 시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
하여 물 위에 空房(공방)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
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거
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
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
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
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낯을 보
겠네
‘부레옥잠‘ 전문
상상력이 싱그러운 참 아름다운 시이다. 서정성 속에 나타나는 차이들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끄는 시이기도 하고.
-싱고, 라고 불렀다 <창비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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