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지금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위기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라는 허울 속에 살아왔다. 그것의 핵심적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최근에 개헌 논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개그처럼 가볍게 흘러갔다. 국가의 미래를 송두리째 고민하는 개헌 논의는 없었고, 그저 하나마나한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가 잠시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건드렸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터진 사건이 정윤회씨의 문건 스캔들이다. 이런 껍데기 개헌 논의가 사그라진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사회는 박근혜 정권 출범 2년 동안 끝없는 인사 스캔들에 휘말려 왔다. 권력의 인사 문제는 사실상 권력 그 자체의 문제이고, 최근 들어 더욱 중요해진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이다.
정윤회 스캔들은 단지 사적인 ‘썸씽’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매우 역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1년 예산 370조를 운영하는 국가권력의 핵심 요직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누가 어떤 이유로 합리적으로 집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핵심 이슈가 바로 인사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윤회 스캔들이 마치 아침 드라마처럼 희화화되는 순간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여당은 침묵하고 야당은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있다. 여당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또 하나의 권력 의혹을 향해 근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권력의 사유화 가능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문화다. 야당은 이명박 정부의 사자방으로 잠시 잡았던 정국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검찰발 정윤회 사건을 그저 ‘게이트’라고 명명하는 것에 스스로를 안주시키고 있다.
사자방을 덮기 위해 정윤회 문건 파동이 나왔고 정윤회 문건 파동을 덮기 위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나왔다는 항간의 음모론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하는 매우 희극화된 자화상이다. 최근 한 달간 트위터와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뉴스 소비의 한 패턴은 마치 누군가에 의해 절묘하게 연출된 이슈 컨트롤이라는 음모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트렌드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이 한창이던 최근 조현아 전 부사장 파동이 권력형 인사 이슈를 어떻게 잠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항간의 의혹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한 검찰 대응은 느슨하고 미미하며 변죽에 그친 반면 조현아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검찰 대응은 빠르고 민감하며 전면화하고 있다는 비교를 설득력 있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야를 떠나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의 유효함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은 크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재벌 중심의 기업이나 서열화된 사회구조는 아직 봉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청와대발 비선 특권 의혹이나 대한항공 조현아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어떤 정파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수준을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사자방을 덮기 위해 정윤회 문건 파동이 나왔고 정윤회 문건 파동을 덮기 위해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나왔다는 항간의 음모론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설명하는 매우 희극화된 자화상이다.
< 유승찬 소셜미디어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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