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전소영 <김행숙論, 이 낮은 어스름의 삶을 위하여>

미송 2014. 12. 25. 13:32

 

  

 

  이 낮은 어스름의 삶을 위하여 / 김행숙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울먹이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 점점 흘려 쓰는 필기체처럼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ㅡ「저녁의 감정」 전문

  

 

 

  문학의 윤리에 관한 물음이 새삼스레 돌올해지는 시절이다. 윤리라는 단어는 정치적 발화자의 그것과 시의 창작자의 그것 사이쯤에서 맴도는 듯하다. 삶이 기울어갈 수록 시인의 책무를 확정 짓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니, 이즈음의 세계 안에서라면 윤리적 행위자로 서기 위한 시인의 노고가 끝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시를 쓴다. 속절없이 저문 어제를 다독이려 쓰고, 불가피한 내일을 일으키기 위해 쓴다.

 

  그렇게 쓰인 시들을 갈무리 하면 적어도 하나의 진실이 육박해오는데, 그것은 결국 가장 시다운 시가 가장 윤리적인 시라는 점이다. 물론 시다운 시라는 말을 하나로 의미화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짚어내자면, 그런 시는 어떤 것도 섣불리 발설하지 않는다. 행들에 의미를 새기되 행간에 더 깊은 비의를 고여 내고 삼켜지는 말들의 파동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그런 시라면 오래 읊어 눅진해져도 좋을 것이다.

 

  김행숙의 시가 그런 시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긴다. 시인은 특유의 서정으로 시 시세계를 쌓아올리고 다지면서 어떤 것도 쉽게 말해버리지 않았다. 시인은 ‘나’보다는 ‘타자’를 통과하는 것으로, ‘타자’를 기억하는 의무에 충실한 것으로 직접적인 발화를 대신했다. 그것을 시가 아닌 자리에서는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어떤 망각, 어떤 무지는 인간적인 약점이나 허점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윤리적인 구멍, 윤리가 사라진 비인간적인 빈자리인 것입니다.”(김행숙, 「질문들」,『문학동네』, 2014.여름.) 「저녁의 감정」은 이 문장의 여운 안에서 읽는 것이 좋겠다.

 

  ‘저녁’과 ‘감정’의 조합은 먹먹한 여운을 더 길고 깊게 남긴다. 하루가 붉은 자락을 남기며 사그라질 때, 종일을 견뎌 낸 자가 느끼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형언할 수 없도록 시린, 그 마음의 실물이 이 시에 아로새겨져있다. 돌이켜보면 ‘저녁’이란 그런 시간이다. 황혼이 한낮의 것들을 밀어내며 별을 옮겨오고, 내일과의 길항 속에서 오늘은 속절없이 무너져간다. 때때로 잊히지만 저녁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가깝고 빈번한 이별의 시공간이다. 이것을 시에서는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점점 흘려 쓰는 필기체”와 같다고 되뇌었다. 하루의 저녁이 그러하고, 삶의 저녁이 또한 그러하다. 하릴없이 밀려가는 삶과 점점이 스며드는 죽음이 닿을 듯 놓인 곳, 그 소진과 소멸의 기로에 서면 누구라도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서늘한 운명을 감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삶의 진리란 언제나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서글픈 예감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던가. 저녁의 사람은 미련과 체념의 인력 척력에 붙들려 하루를, 또한 생애를 (무)의식적으로 돌아본다. 잠시나마 멈춰 삶을 조망할 수 있었던 그는 ‘~는 것이다’의 술어로 ‘저녁의 감정’을 정의 내리는데, ‘~는 것이다’라는 단언은 본래 주어 자리에 놓인 것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외부자의 전유물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울먹임과 현기증과 흐느낌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물기 없이, 담담하게 닿아온다.

 

  ‘감정’이라 썼으나 정작 시인은 감정의 단어들을 널브러뜨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을 어떤 숭고한 형상에 담아낸다. 시의 언어를 빌자면 그것은 “가장 낮은 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일어설 때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심신을 깊이 숙여 ‘낮은 계급’에 속하는 것. 으르렁 거리는 존재를 달래기 위해 똑같이 엎드리고 눈을 맞추며 울먹일 수 있는 것. 말하자면 최대한 몸을 낮춰 타자를 더듬고 그와 교감하는 것. 이것은 타자를, 특히 타자의 슬픔을 대하는 더없이 다감한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손쉽게 ‘괜찮다’고 말했던 이라면 화자의 태도를 지나치게 연약한 것으로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애써 ‘이해한다’고 말한 뒤에도 좀처럼 후련해지지 않는 가슴을 눌러 본 이라면 화자의 몸짓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일 것이다.

 

  타자의 아픔에 대해 섣불리 말하거나 위로하려 드는 것은 종종 가장 편리한 일이자 가장 경솔한 일이 되곤 한다. 그러는 대신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그는 깊이 엎드리고 현기증을 느끼다 그 끝에서야 비로소 흐느꼈던 것인데, 그럴 때 타자로부터 밀려온 감정은 나의 감정을 굽이쳐 어떤 위무나 안도로 다시 타자에게 돌아간다. 어렵고 아름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곳에 누운 화자는 이제 명멸해가는 존재들을 올려다보고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적어도 스스로 눈을 감기 전까지는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껏 낮춰진 마음의 풍경은 이토록 애틋하다. 그리고 애틋함의 순간은 “2절과 같이 매번 되돌아오는 것이다.” 삶은 계속 휘청거릴 도리밖에 없고 사력을 다해 휘청거린 누군가들이라면 예외 없이 저녁에 다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없이 낮아진 몸으로 말이다.

 

  다시 시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망각과 무지는 인간의 약점이나 허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엄연히 윤리의 구멍, 즉 비윤리의 다른 이름이다. 하여 그는 줄곧 타자를 망각하지 않고 타자에 무지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다만 시인다운 방식으로 자신만의 서정을 벼려왔다. 그리고 「저녁의 감정」에 이르러 ‘공명共鳴의 윤리’를 이정표로 세웠다. 그 아득한 것은, 고통으로 자욱한 시대를 버텨나가되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져야만 하는 우리를 가장 낮은 저녁의 삶으로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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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 문학평론가

1983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문학사상>

신인상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현재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