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송년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갈수록 나쁜 일만 기억나는 건 나이 탓일까요, 세상이 절망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일까요?”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런 답이 돌아온다. “잘 생각해보면 좋은 일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일상의 행복은 살금살금 내딛는 고양이 발걸음 같아서 잘 기억나지 않는 법이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이 탓이건, 세상 탓이건 기억은 선택되기 마련이고,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이 문제일 수 있겠구나 싶다.
그래도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우리가 강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레테의 강’을 숙명적으로 건너야 하는 존재다. 니체의 말처럼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삶 속에서 짊어진 고통과 슬픔을 평생 기억하는 건 아마도 지옥 같은 형벌일 것이다. 망각의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기억은 모래 위의 흔적처럼 세월에 따라 소멸되는 속성이 있다는 설과, 과거의 기억은 새로운 기억의 저장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방을 비워준다는 설이 그것이다.
하지만 망각을 해석하는 사회학의 관점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열광적으로 조각상을 만들고 도기 그릇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신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망각은 때로 치명적이다.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기억 재생에 실패하게 되면 비판 기능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통치체제에 위협이 되는 사회적 기억을 지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책과 그림부터 불태워버렸던 진시황과 로마 군대가 대표적인 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갈파하지 않았던가.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 상실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조장된다. 망각은 수집되지 않은 기억이다. 스포츠의 역사에서 성소수자들은 좋은 기록을 내더라도 공식 인정을 받을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동성애 혐오주의가 스포츠계에도 스며들어 뿌리를 내린 탓이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약자라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였다면, 기획된 고립과 모진 망각에 맞서 싸우는 일이 그토록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저장되는 순간 망각되기 시작한다. 빠른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기억의 유통기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단축된다. 쏟아지는 상품과 사건은 하루 전의 것조차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기억의 저장소에 머무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가능하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는 초 단위로 바뀐다. 정윤회, 십상시, 문고리 3인방의 기억은 어느 순간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기호로 대체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풍자 문학가 프랑수아 라블레는 이런 현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인물이다. 1532년에 출간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그는 뇌가 잡다한 지식으로 꽉 채워져 있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한 거인 왕을 그리고 있다.
망각은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 관련 문서를 폐기한 일본의 731부대, 대선 여론조작 댓글 지우기에 나섰던 한국의 국가정보원 등이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의 삭제’였다.
반면 ‘기억의 복원’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기록필름을 1피트씩 사들여 오키나와전쟁의 잔혹상을 증언한 오키나와 시민들, 70m 높이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접착식 메모지에 적은 시민들의 추모글들을 A4 용지에 하나하나 옮겨 붙이는 세월호 기록저장소의 자원봉사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의 경계, 그 언저리에서 건너지 말아야 할 ‘망각의 강’의 의미를 생각한다.
2014-12-24 경향신문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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