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문정희<화살 노래> 외 3편

미송 2009. 7. 13. 09:27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문정희 시집 나는 문이다 에서)

 



 

화살 노래 / 문정희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기실은 돈보다도 더 많이

말(言)을 사용하며 살게 되리라

그러므로 말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가야한다

 

하지만 말은 칼에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한단다

한 번 쓰고 나면 어딘가에 박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무성한 화살숲 속에

살아있는 생명, 심장 한 가운데 박혀

오소소 퍼져가는 독 혹은 불꽃

새 경전(經傳)의 첫 장처럼

새 말로 시작하는 사랑을 보면

목젖을 떨며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돈보다도 더 많이

말을 사용하다 가리라

말이 제일 큰 재산이니까

이 말을 할 때면 정말

조금 울게 된다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히 떠오르는 별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