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미송 2015. 12. 4. 22:42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운이 좋게도 파리에 살아본 적 있다. 파리에 살면서 습관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건 벽에 붙여놓은 손바닥만 한 손글씨 광고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관이다. 아마도 알 것이다. 벽에 붙여놓은 광고지 밑부분에 필요한 사람이 떼어갈 수 있게 전화번호를 적고 종이를 잘라놓은 그것을, 바람이 불면 너풀거리는 그것 말이다. 나는 지금도 혼자서 길을 갈 때 그걸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떼어오는 습관이 있다.

 

파리에서, 카메라를 팔 일이 생겨 광고지를 붙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전화번호를 떼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길을 지나며 몇 사람이 그걸 떼어갔는지, 몇 사람이 내가 붙여놓은 종이에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했지만 그저 전화번호만 찬바람에 팔랑거릴 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런 유의 광고지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몽마르트르 근처에 작은 카페를 차렸어요. 내가 장애가 있어 말을 못하고, 내 여자친구인 요리사도 말을 못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안 와요.

 

-단편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간절히 공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식구가 많을 뿐더러 이해해주지도 않아요. 넓지 않아도 좋아요. 한 이틀 정도, 허락해주시는 공간에서 꿈을 촬영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리 집 현관에 화분 놓고 가셨죠? 버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선물도 아닌 것 같으네요.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난 곧 여행을 가야 하거든요.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그냥 그렇게 전화번호를 한두 개쯤 떼어오는 버릇이 생긴 건 파리에서의 그런 일로부터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거나 상상하거나 한번쯤 만나보고 싶거나.....그리 되었다.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

 

파리에 백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소박한 빵집이 있다. 이 집은 바게트가 아주 유명한 집인데 빵맛의 비결은 특별한 게 없다고 하지만 빵반죽을 할 때, 그걸 조금 떼어서 남겨둔 다음, 다음번 반죽을 할 때 합치는 것이다(한번 빚은 반죽 덩어리를 모두 다 오븐에 굽지를 않고 반죽의 일부를 남겨 다음번 바게트를 반죽할 때 섞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백 년 된 기억이 조금씩 끊임없이 섞이면서 빵맛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거란 이야기가 된다.

 

그에 비하면 나는 뭔가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 소비해버리고 먹어치운다. 물질도 마찬가지이고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비축해두지도 않을 뿐더러 이자처럼, 도시락의 한귀퉁이처럼 남겨진 그걸 어쩌겠다고 뒤돌아보는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다음을 위해 조금씩 떼어두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기억할 수 없을 거라는 무섭고도 무서운 사실만 이제 조금 인정할 뿐.

그 빵집은 반죽을 남기는 게 아니라 기록을 남긴다. 그 기록을 반죽해 기적을 굽는다. 

 

이병률 여행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4#

 

 

 

최근 안경사에게 다촛점 안경을 쓰셔야겠어요, 라는 말을 들었다. 정확히 말해 노안이 왔다는 뜻. 그나마 쓰던 안경을 가게에 벗어 두고 온 날은 눈의 피로를 절감하는데, 지금이 순간이다. 어쨌든, 눈앞이 뿌예지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나의 기억들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상상해 본다. 한숨이 나오고 답답해진다. 연말이라 스트레스가 과중했던 탓일까? 조금 더 있다가 안경을 맞출까? 생각도 했지만, 다촛점 안경이 간절한 건 바로 이 순간의 . 눈에 자꾸만 손이 가 눈을 비비며 저 사람의 말소리를 듣는다. 귀로 들어야 할 말을 눈으로 들으려니 눈이 시리다. 시야가 아른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아름다운 말을 타이핑한다. 이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현실. 그러니까 이런 형편 속에서도 당신 이야기에 공감한다는, 그래서 마음이 기쁘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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