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조지오웰 <시와 마이크>

미송 2023. 1. 14. 12:19

 

 

 

나는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방송을 하는 게 그저 청취자들에게만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하고서 매료되었다. 시를 방송하는 방법에 관한 한 영국에선 별달리 시도된 바가 거의 없으며,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 앞에 앉음으로써(특히 그럴 일이 정기적으로 있을 때) 시인은 우리의 시대와 나라에서는 달리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자기 작품과 맺게 된다. 

 

근대에 와서(지난 200년 동안이라고 하자) 시가 음악이나 구어口語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하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서정적이거나 수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나라라면 어디서나 일반인들이 시에 거부감을 갖는 게 당연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간극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틈이 계속해서 벌어져가고만 있으니, 시는 주로 인쇄된 형태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관념이 모호함과 '교묘함'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단번에 뜻이 통하는 시에 대해 어딘가 분명히 잘못 된 거라고 반半본능적으로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시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게 되지 않는 한 그런 경향은 저지되지 않을 것 같은데, 라디오를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가 하면 라디오의 특별한 장점, 즉 적절한 청취자를 고를 수 있고 무대공포증과 당혹감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 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공감을 할지언정 방송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방송이 연설이나 강연과 다른 게 바로 이 점이다.

 

대중 연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 알듯이, 연단 위에서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청중이 무엇에 반응하고 안 할지는 항상 몇 분 안에 분명해지며, 실제로 연사는 청중 가운데 제일 모자란다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발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도 '개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란을 떨어가며 환심을 사야 한다. 안 그러면 결과는 언제나 냉랭하고 당혹스런 분위기로 나타난다.

 

청중 앞에서 하는 '시 낭송'이 끔찍한 건, 청중 가운데 따분해하거나 거의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단순히 채널을 돌림으로써 다른 데로 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제대로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어려움 때문이다. 극장의 관객은 선별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선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방송에 익숙해진 시인들이 마이크에 대고 시를 읽으며 청중이 보이는 데서라면 발휘할 수 없는 기량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하는 요소가 개입된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통해,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는 게 당혹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사람 대 사람의 정상적인 교류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시인에게 만들어줄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작품을 종이 위의 패턴보다는 '소리'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시와 일반인 간의 화해가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 화해는 전파를 수신하는 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발신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상대편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나는 마치 시라는 것 자체가 외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무엇이며, 마치 시를 대중화하는 게 본질적으로 어린아이한테 약을 삼키게 하거나 박해받는 종파에 대한 관용을 세간으로부터 얻어내는 일과 같은 전략적 술책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문명에서 시는 단연코 가장 불신받는 예술, 다시 말해 일반일들이 '어떤' 가치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유일한 예술임이 분명하다.

 

아놀드 베넷(1)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일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 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고도로 문명화된 나라들의 평균적인 인간이 가장 미개한 야만인보다 미적으로 열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의식적인' 행동으로는 대체로 치유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로 사회가 좀더 반듯해지면 금방 저절로 나아질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마르크스주의자도, 무정부주의자도, 종교를 믿는 사람도 모두 같은 얘기를 할 텐데, 크게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틀 속에서 개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미적인 개선이 사회 전반을 구원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장 미움받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처지로부터 시를 구제하여 사람들이 음악에 베푸는 만큼의 관용만이라도 받도록 하는 게 가능하지는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단, 그러자면, 시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인기가 없는지를 질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선 표면적으로 볼 때 시가 인기 없다는 건 더없이 완벽한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좀 특수하게 한정해서 해야 한다. 먼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고 인용되며 모든 이의 마음속에 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 민속 시가 (동요 등)가 아직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의 호감을 잃어본 적이 없는 옛날 노래도 제법 남아 있다. 게다가 대체로 애국적이고 감상적인 유의 '좋으면서 나쁜' 시가 인기를 누리거나 최소한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좋으면서 나쁜' 시가, 일반인으로 하여금 진정한 시를 싫어하게 만드는 듯한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는 게 아니라면, 엉뚱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시 역시 운문으로서 운韻을 사용하고 고상한 정서와 특이한 언어를 구사하며, 더구나 현저할 정도로 그러는 게 사실이다. 나쁜 시가 좋은 시보다 더 '시적'이란 건 거의 자명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시는 특별한 사랑을 받는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직전, BBC 9시 뉴스 바로 전에 늘 하는 두 코미디언의 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지막 3분을 남겨두고 한 코미디언이 갑자기 "잠시 좀 심각해지고 싶다"더니 국왕 폐하를 찬양하는 <멋쟁이 영국 신사>란 말도 안 되는 애국시를 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최악의 영웅시를 듣게 된 청취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면 BBC에 그런 짓을 즉각 중단하라는 분노의 편지들이 꽤 날아들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다수 대중이 '시'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을지언정 '운문'에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운율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면 어떤 노래나 익살5행시k도 유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것은 시가 불가해성, 지적 허세, 그리고 남들 바쁜데 혼자만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단어 자체가 '하느님'이나 목사의 개목걸이(빳빳이 세운 칼라)같은 말처럼 나쁜 인상부터 심어주는 것이다

 

시를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후천적인 억제를 완화시켜주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야유를 내뱉는 대신에 듣도록 해주는 문제다. 내가 방금 들었다는 애국시 나부랭이가 아마 그랬을 것처럼, 진정한 시를 다수 대중에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시를 다시 대중화하는 일이 대중의 취향을 육성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없이 가능하다고 믿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자면 전략이 필요할 것이고, 속임수까지 써야 할지도 모른다. T. S. 엘리엇은 시가, 특히 극시가 뮤직홀(2)이라는 수단을 통해 일반일들의 의식 속에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아직까지 그 엄청남 가능성을 한 번도 철저히 시험해본 적이 없는 판토마임이라는 수단도 추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투사 스위니'(3)는 아마 그런 의도에서 씌었을 것이고, 실제로 뮤직홀의 한 꼭지나 풍자 음악극의 한 장場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뜨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화 역시 독점 자본 형성기에 처음 나왔고, 제작부터 소비 단계까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점점 더 관료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있는데관료의 목표란 결국 예술가를 망가뜨리는 것, 혹은 최소한 거세라도 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기만 하다면 전망을 암울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진행될 게 분명한 전체주의화는,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예견하기 어렵던 새로운 변화 덕분에 완화되고 있다.

 

아무튼,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거대한 관료 체제라는 기계장치는 너무 비대하면서도 계속 몸집을 불려야만 하기 때문에 삐걱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현대 국가는 지식인의 자유를 말살하려는 경향을 보이지만, 동시에 모든 국가가(전쟁의 압박을 받을 때는 특히 더) 갈수록 국가의 홍보를 맡아줄 지식인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현대 국가는 이를테면 팜플렛 작가, 포스터 화가, 삽화가, 방송인, 강연자, 영화제작자, 배우, 작곡가, 심지어 화가와 조각가까지 필요로 한다. 심리학자, 사회학자, 생화학자, 수학자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중략>

 

지금 현재 확성기는 창의적인 작가의 적이지만, 방송의 양과 범위가 늘어날수록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BBC가 동시대 문학에 미미하나마 관심을 계속 보이고 있긴 하지만, 시 한편을 방송할 전파 5분을 확보하는 게 거짓 선전이나 녹음된 음악, 상투적인 농담, 가짜 '토론' 같은 것들을 퍼뜨리기 위해 12시간을 확보하는 것보다 어렵다. 하지만 양상은 지금까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 때가 오면 지금은 이런저런 적대적 외압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운문을 방송하는 것과 관련한 진지한 실험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실험들이 아주 대한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라디오는 발전 초기부터 관료화되는 바람에 방송과 문학의 관계가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 마이크가 시를 일반인들에게 다시 돌려줄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으며, 시가 글보다 말에 가까워짐으로써 유익할 것인지조차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들이 존재한다고, 문학을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 무시당하고 있는 매체에 더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조드 교수(4)와 괴벨스 박사(5)의 음성 때문에 선한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흐려져버렸는지 모를 이 매체에 말이다. 

 

 

(1) Arnold Bennett (1867~1931). 잉글랜드 북부 도자기 산지 출신의 소설가로 '북에서 온 사나이 A Man from the North' 등의 작품이 있다.

(2) music hall. 1960년경까지 유행한 영국의 극장식 연예장. 대중가요와 코미디와 묘기들로 이루어진 버라이어티쇼를 즐기는 곳이었다.

(3) Sweeney Agonistes. 엘리엇의 극시 중 하나. 스위니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물질주의적이고 천박한 현대인을 표상한다.  

(4) C. E. M. Joad(1891~1953)는 영국의 철학 교수이자 방송인으로, 1940년대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린 BBC 라디오 프로그램<The Brains Trust>의 고정 패널이었다. Joseph Goebbels는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나치 선전장관으로, 그의 방송 선전 대문에 많은 독일 국민들이 패전으로 기울어가는 상황에서도 승전을 확신했다.

 

 

익명의 대중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매체를 통해 자신을 흘려보내는 일에 주춤할 것이다. 너를 한 번 열어 봐 하는 압력이 느껴진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때는 부채의식을 갖고 마이크를 잡은 적도 있었다. <오>

 

조제오웰 나는 왜 쓰는가 中 <시와 마이크> 일부, 166~174쪽

타이핑 채란

 

 

20151206-2022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