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춤의 미학
3년 전 김유정역을 지난 적이 있다. 기차역의 본래 이름이 신남역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김유정의 예술혼이 깃든 곳곳의 흔적에 관해 해설사의 해설을 들었지만, 사전지식 없이 따라나선 문학기행은 수학여행으로 끝났다. 가끔은 퍼포먼스에 시간을 처박기도 한다.
우연한 아침,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었다. 두 발로 둘러봤을 때보다 명확하게 한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길, 역시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다. 명작으로 불리는 작품 안에는 불후의 인과 작용이 숨겨져 있다. 시간을 초월하고, 보편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편협한 결론으로 독자를 구속하지 않고 어느 때 그리고 누가 다시 읽어도 희망을 꿈꾸게 만드는 비결을 가졌기에, 사랑받는 것들은 사랑받을 짓을 한다는 말이 생겼을까.
마름의 딸 점순이는 열일곱 살. 춘열을 앓는 계집애의 몸짓으로 시작되어 노란 동백꽃 만개하는 돌산 틈에서 마무리가 되는 김유정의 연애 소설은 해학적이다. 토속적인 풍경들도 가득하다.
"느 집엔 이거 없지?" 깐죽대는 느낌의 대화 시도. “너 위해 몰래 챙겨온것이니 배고플 때 꼭 먹어 둬” 라든가 “감자를 보는 순간 문득 니 생각이 났어 그렇다고 꼭 내 생각하며 먹으라는 건 아냐” 이렇게 말했다면 애시당초 닭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야 봄감자 맛있단다." 라고 말하면 “그걸 누가 모르냐고요”할 게 뻔한데, 점순이는 뻔한 대화법을 고수한다.
허구헌 날 주린 배를 움츠리며 지게나 지고 풀이나 뜯는 처지에 연애는 무슨 얼어 죽을 연애, 했을 머슴의 아들.
돈 없으면 총각이나 홀아비는 본능까지 죽이고 살아야 한다니 가난은 단순 불편의 문제만이 아니다. 머슴의 아들은 아마 세상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이 떠져 해를 보는 일이 두렵기만 한 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보지 않은 자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일 것이다.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 내일의 해는 허상의 별인가.
중노동에 시달리는 머슴의 아들에게 점순이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일 뿐이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나의 예측대로 뿔따구니가 솟은 남자는 퉁명스러움의 극치를 보인다. 그 때부터 점순이의 심술주머니는 넝쿨박처럼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한다.
순정을 받아주지 않은 댓가로 점순이는 끊임없이 남자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사랑이 증오로 돌변하는 순간 좋았던 감정들이 일제히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끝내 스스로의 무덤을 쌓는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말을 하들들 말지 하는 경우랄까,
때문에, 나는 뜨겁게 원색적으로 몰아닥치는 언어들은 가급적 피한다.
두 집 수탉들끼리 싸움을 붙이고선 한 쪽에 숨어 낄낄대거나 모른 체 등을 돌리거나 약을 올리는 점순이는 허무맹랑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하다. 마음을 받아주고 알아줄 때까지 투정 아닌 투쟁을 벌이겠다는 의지가 참 단단하다. 몽니 부리는 점순이의 얼굴 어디쯤에 시커먼 점이 박혔을까.
감자. 그것은 단순히 유물론에 의거한 알갱이가 아니라 심오한 고백이었을 것을. 말 수 뚝뚝 끊어지는 강원도 남자 같은 머슴아이가 대뜸 거절을 했으니, 얼마나 미웠으면 싸움을 거는 자기 수탉더러 죽여라 죽여라 외쳤을까.
사랑의 의지보다 앞서는 것은 소통. 사설이 끝없이 멀리가려 하여,
아스트로멜리아
감춤의 미학 하니, 최근에 만났던 마르께스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떠오른다. 아흔 살의 마지막 작품을 다소 과격하다 싶은 제목으로 펼쳐낸 그의 소설에는 창녀들이 등장한다. 족히 오백 명은 넘을 여성들과의 불공평한 경험. 아무리 소설이지만 무슨 그런 가정이 다 있을까.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어서 마르께스의 짓궂은 재주가 여기에 있다. 끝까지 그의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 직접 쓴 칼럼들을 읽다 보면 마르께스가 노벨 문학상을 거머쥘만한 위인이구나 알 수 있다.
착각하지 마시오, 유순한 광인이 미래를 앞서 나가는 법이오.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오, 라 말하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천진하고 낭만스러운지.
노래하지 않는 사람은 노래하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곤 했다. 이제 나는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아흔 해를 살아온 내 인생의 첫사랑이 보여준 또 다른 기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하다. 아흔 살에 첫사랑 기적을 운운하다니. 아흔 살에 선택한 첫사랑 때문에 자신의 재산을 다 팔고, 사랑을 고백하였다니. 꽃집 문이 다 닫겨 어쩔 수 없이 남의 정원에 몰래 들어가 갓 피어난 아스트로멜리아 한 송이를 훔쳐야 했다니. 그 나이에 말야. 마술 같은 사랑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커다란 이름표를 얻었으니 당신이 범했던 창녀들이 거리에 즐비하던 말던 뭔 상관.
성과 속을 분리하지 않고 다만 모든 본질에 앞선 순수* 정신에 마음을 기울여보자는 뜻인데, 여전히 사랑은 소유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춘기 시절 나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고전들을 다시 읽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책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억지로 읽게 시켰을 때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낭만주의 문학에 빠져 들었다. 그 작품들을 통해서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별자리 기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르께스는 여전히 환상적인 언어로 말한다. 열여섯 소녀에게 내어줄 유산들과 자신이 죽은 후 80년동안 그녀의 사랑자리에 놓여질 추억들까지 들뜬 목소리로 떠든다.
마르께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 속에는 슬픈 창녀들이 없었다.
20080629-20230902 오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