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가게 활동가로 지내다 보니 벼룩시장이란 글자만 봐도 눈이 번쩍 뜨인다. 적성에 맞는걸까, 물건의 사연을 듣는 일이 재밌다. 헷갈리기도 하지만 불가분의 관계란 가구와의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느낀다. 가구의 내부를 진맥하고 나오던 시인은 가구와 인간 사이 비가시적 무엇을 보았을까. 해와 달 그리고 별을 하늘의 오래된 가구라고 표현하다니.
가구의 비밀 / 고영
구청 앞 광장에 벼룩시장이 섰다
트럭에 실려 온 중고가구들이 침묵을 부리고 있다
안방이나 거실 혹은 서재에서
한 집안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던 각종 가구들,
이를테면
주인여자의 이상야릇한 체위를 거부하던 소파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비추다 쫓겨난 화장대 거울
(현명한 거울은 주인의 기분에 맞춰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부도난 수표를 받아먹고 헛배가 불렀던 대형금고
오래된 가구일수록 비밀도 많고 사연도 많다
저 가구들이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무거운 입 때문이다
가구에게 침묵은 곧 신용이다
가구들이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한
사람들은 안심하고 가구의 남은 생에 대해 흥정할 것이다
간혹 비밀이 탄로나 신세를 망친 자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지상의 가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은연중에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하늘의 오래된 가구인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지금껏 온 누리의 희망이 되고 있는 건
단 한 번도 천기를 누설하지 않은 침묵 때문이다.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천년의 시작, 2005) 중에서
가구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 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세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나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李箱 시인이 말했던가,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도 없다 고.
20140601-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