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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책

미송 2017. 11. 21. 13:06



100% 작가-번역가 공식 커플로 검증된 오르한 파묵(왼쪽)과 이난아. 한국일보 자료사진







빨강-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책





  무더위가 한풀 잦아들던 지난 9월초,  <내 이름은 빨강>의 마지막 쪽의 번역을 마친 나는 관 속같이 비좁은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사흘 밤낮을 시체처럼 누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사흘 반 만에 깨어난 날, 나는 비로소 벽에 접착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여 놓았던 오르한 파묵의 사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 그의 사진은 나를 괴물처럼 압박해 왔었지만 그때만큼은 그의 소설만큼이나 흠잡을 데 없이 매력적인 얼굴, 이지적이고 맑은 얼굴로 다가왔다.


 터키에서 출간 후 45일 만에 11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우고,  터키 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읽힐 작품으로 평가받는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한국어판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유럽 유수의 문학상을 연이어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그 새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외국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2002년 최우수 외국어 문학상'을  샐먼루시디, 귄터 그라스에 이어 수상했고,  이탈리아에서도 이탈리아어로 번역 출판된 외국 소설 가운데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며,  주제 사라마구,  도리스 레싱,  다니엘 에낙 등 역대 수상자를 냈던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밀란 쿤데라와 이사벨 아옌데,  존 업다이크 등에 이어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우리 독자들에게도 그만큼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는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시작된다.  우물 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 세밀화가 엘레강스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나흘 전에 살해되어 우물 바닥에 던져졌는지를 이야기 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화원 소속 금박 세공사 엘레강스의 말은 마치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진 것처럼 사방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문을 일으키며 작품의 발단을 이룬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자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인 세큐레는 4년째 페르시아와의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개구쟁이 두 아들과 친정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다.  새 남편으로 적당한 사람을 찾기 위해 그녀는 아버지를 방문하는 궁정화원 소속 세밀화가들을 몰래 숨어서 훔쳐본다.  '에니시테'라고 불리는 세큐레의 아버지는 수년 전,  베네치아의 궁전과 귀족의 저택에서 보았던 초상화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  유럽의 화풍을 도입한 삽화 그림이 들어간 책을 제작하게 해달라고 술탄을 설득했다.  술탄으로부터 헤지라 천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술탄과 술탄의 세계를 서양 화풍으로 그린 책을 비밀리에 그리라는 명을 받고 궁정화원에서 가장 기예가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해 이 밀서(密書) 제작에 참여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밀화가들은 에니시테를 통해 점차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이것은 그들 사이에 커다란 갈등과 불안을 가져온다. 전통적인 화풍을 고수하는 것과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는 것,  신성 모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사이의 격렬한 논쟁은 결국 세밀화가들의 희생을 불어오고, 서양 화풍의 적극적인 도입을 지지했던 에니시테조차 살해당함으로써,  이야기는 점점 더 피투성이로 변해간다.  술탄은 이러한 살인 사건이 자신을 향한 도전이라 여기고 궁정화원장인 오스만과 에니시테의 조카인 카라에게 사흘 안에 살인범을 찾아내도록 명한다.


  작품은 표면적으로 살인범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절세미인 세큐레를 어릴 적부터 사랑해 온 카라,  그녀를 향한 끈질기고 맹목적인 연정을 품고 있는 시동생 하산,  그리고 자신의 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아버지 에니시테 사이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된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시대적,  정치적 변화 속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장인정신을 구현하는 예술가들에 관한 소설이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서양의 화가들이 인간 중심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대상을 평면적이고 투시적으로 묘사하는 페르시아의 옛 대가들은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슬람 회화의 전통이 쇠퇴기로 접어들었다는 비애스러운 인식을 반영한다.  세밀화가들 사이의 질투와 긴장감,  낯선 그림에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과 그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슬픈 분위기와 패배감과 함께 세큐레와 카라의 불운한 사랑 이야기에 맞물려 전개되고 있다.


  이질적인 두 대륙인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자리한 터키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비를 통해 터키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사회의 관념을 반영하고 또한 그러한 관념들을 수립하는 역할을 한다면,  터키에서 동 서양 문제가 현재까지도 많은 작가들의 주요 담론이 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동 서양 문제는 터키에서 서구화가 시작된 이래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로서 양대 문화로부터 터키 현실에 맞는 화합의 지점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터키 현대 소설가들 중 오르한 파묵이 부단히 동 서양 문제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쓰는 이유도 터키의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비평가들이 유독 파묵의 문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여타의 작가들처럼 동 서양에 관한 전통적인 공식,  즉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양과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서양의 대립이라든가,  서구화는 곧 부도덕화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터키의 역사나 일상의 삶을 토대로 동 서양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룬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이 텍스트를 통해 지적 호기심을 만족 시킬 수 있도록,  형식과 구성 면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에 대해 '나의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색채감 있고 가장 긍정적인 소설'이라고 말한다.  <내 이름은 빨강>은 먼저,  페르시아를 위시하여,  모든 다른 이슬람 국가의 회화 전통과 비교하여 터키의 세밀화가 가장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폐르시아의 회화 전통과는 달리,  터키의 세밀화는 일상생활을 사실적이고 경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오르한 파묵이 <기예의 서>나 <축제의 서>를 제작한 실제 인물인 궁정 화원장 오스만과 술탄 무라트 3세(재위 1574~1595),  그러니까 터키 세밀화의 황금기를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례로 <축제의 서>에는 다른 이슬람 회화 전통에서 볼 수 없는 '근대성'이 발견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의 모든 길드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귀족,  축제 장면들과 함께 고유의 의상,  문화,  다소 과장되게 표현된 면도 있지만 오락 문화까지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죽은 자,  개,  나무,  금화,  죽음조차 제 목소리를 내는 <내 이름은 빨강>은 예술과 사랑,  결혼 그리고 행복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잊혀진 터키 전통 회화의 아름다움에 호소하는 곡(哭)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내 이름은 빨강>은 역사 소설이며 추리소설이자 생물과 무생물 등이 모두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동화적 요소로 쓰인 포스트모던 소설이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을 붉은 물결로 수놓던 무렵 나는 모 일간지에 월드컵 참가국이며 혈맹의 나라인 터키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면서,  <내 이름은 빨강>을 다시 한번 정독하는 기회를 가졌다.  대한민국과 터키 간의 3, 4위전 때 받은 감동만큼 이 소설을 손에서 놓으며 받은 커다란 감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민음사로부터 번역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6월의 붉은 물결'로 통칭되는 그 생생한 감동의 현장과 전모를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흔치 않듯이,  <내 이름은 빨강>을 한국어로 옮겨 원문의 감동,  재미,  그리고 사상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번민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작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전쟁의 참화 속에 있을 때 터키는 군대를 파견하여 피를 흘려가며 이 나라를 지켜준 끈끈한 유대를 가진 나라이다.  그 전쟁으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터키에 가면 상점이나 음식점 간판을 코레리(터키어로 '한국인'이라는 의미)라고 써 붙이고, 자신의 친척이 한국에서 전사한 사실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흙 한 봉지를 소중히 지니고 한국을 방문하여 부산의 유엔묘역에 안장된 친지의 무덤에 고국의 흙을 뿌려주었다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많은 터키 사람들은 한국과의 혈맹 관계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자신들의 선조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이러한 역사에 생소한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양국 국민들이 상호 우호적인 감정을 되살려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국 국민 정서상 두 나라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진 반면 문화 예술의 교류는 극히 미약해 왔던 점이 못내 아쉽고,  특히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터키 작가들이 많이 있음에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점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던 차에 민음사에서 이 작품의 출간 결정을 내린 것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역자로서는 최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편에서 옮기려고 노력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예술적 난해성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또한 소설의 호흡과 리듬을 살리는 과정이 힘들었다는 것도 고백한다.  얼마 전 자리를 함께 했던 번역가 한 분이 했던 "번역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본전씩(!)이나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미흡한 번역이나마 칠책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란다.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조언과 참고 자료를 아끼지 않았던 한국외대의 여러 교수님들과 민음사에 감사하며,  무엇보다도 전 세계를 오가며 바쁜 일정을 보내는 중에도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 수시로 귀찮게 했던 나의 질문에 반갑게 응해 주고 도움을 준 오르한 파묵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난아 



오래전에 썼을 소설을 2017년 가을에서야 읽는다. 글이나 영화를 대하고 감동이 짙다 했을 때 작가의 얼굴이나 영화의 원작자를 찾는 버릇이 있는데, 최근에 그랬다. 쓸 줄은 몰라도 읽을 줄은 알고 느낄 줄은 안다. 아무튼 참 멋진 소설이다. 두 권으로 된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단숨에 읽었다. 오르한 파묵. 번역에 대해 평소 시큰둥하던 내가 책장을 덮으며 번역가를 찾았다. 예감대로 인터넷에선 작가와 번역가 궁합이 찰떡이라고 한다. 나만 몰랐던 사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기 까지 데보라스미스 번역가가 동행했듯, 낯선 터키 문학이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건 이난아 번역가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 순간,친절한 번역가의 줄거리 요약과 자신의 소회를 적어 둔 것이 있어서 타이핑한다.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숨은 독자의 삼위일체란 놀라운 일이란 생각을 해 보며, 두 분께 동시에 감사드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