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자료실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미송 2023. 3. 24. 16:20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작품을 쓸 때 영감을 얻는 방법을 소개했다.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가끔 저 밑의 어두컴컴한 무의식 세계에 다녀오곤 한다는 것이다. 안개로 가득 차 있는 그 무의식의 세계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얽혀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어느 누구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다녀와야 하지만, 그곳에 갈 때마다 길을 잃을까 봐 너무 두렵다고 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길을 잃으면 시간 밖의 세계에 갇혀버려 다시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위험한 곳에서 소설의 자양분을 조금 건져와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어렵게 들고 온 자양분을 독자들을 배려해 현실의 물에 충분히 희석한 뒤 소설로 만들어 내어 놓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그런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면 작가 한강은 그 위험한 곳을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유롭게 다녀오는 게 틀림없다. 그곳에 다녀올 때마다 소설의 자양분을 조금이 아닌 아예 한 아름 들고 나와 독자들에게 펼쳐 놓는 게 아닌가 싶다.

 

영혼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산물을 현실 세계 속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의 물에 충분히 희석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 유명한 『채식주의자』부터 『흰』까지 '있는 그대로'를 맛봐야 한다며 농도 짙은 원재료 그대로를 내놓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외면받지 않도록 너무 멀리 가버리지는 않는다는 점은 한강 소설의 탁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런 능력을 갖춘 작가는 극히 드물기도 하다. 그러니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한강의 작품에 열렬히 열광할 수밖에.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작가 한강의 작품들은 사실 하드코어에 가깝다. 때문에 취향이 다른 사람들은 다가가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일상생활 속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취향을 탓하며 무심해질 수가 없다. 호기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 가져온 농도 짙은 자양분을 펼쳐 놓으니, 독자들은 책을 내려놓을 수도 없고, 계속 이어나가기도 어려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잠시 떨어져나온 조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시간이 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되는 한시적인 조각이다. 우리는 꿈을 꾸면서 무의식 세계를 들여다보고, 무의식 세계는 우리의 현실 세계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다른 인물들 같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나,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던 엄마나, 언니가 죽어서 태어날 기회가 생겼던 주인공이나 사실은 다 같은 곳에서 흘러나온 조각일 뿐이다. 채식주의자의 인혜도, 영혜도, 형부도, 남편도 알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무의식의 조각인 것처럼.

 

「죽은 자의 도움으로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으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본래적 시간으로 뛰어드는 것,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일상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는 멈추고 눈 한 송이는 전혀 녹지 않는다.」 해설 권희철 문학평론가

책 뒷부분에 실은 해설에서도 '시간 바깥의 시간'을 얘기한다. 시계가 멈춰 눈 한 송이 전혀 녹지 않는 곳에서만이 우리는 본래의 우리, 무의식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이라고 했지만, 시집에 가깝다. 농도가 짙은 만큼 하루에 한 페이지만 읽겠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또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음미하고 음미하다 보면 독자들은 태초에 만들어진 영혼 깊은 밑바닥의 무의식 세계를 길을 잃어버릴 염려 없이 안전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여의도 책방] 한강 흰,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글. 홍희정 기자

 

 

20180815-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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