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미송 2021. 3. 1. 12:37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의 발단은 투정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갠,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 일요일이었다. 조그마한 구름덩이가 둘인가 셋, 잘 음미된 품위 있은 구두점인 양, 머나먼 하늘에 하얗게 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은 그 무엇에도 막힘이 없이 한껏 대지로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잔디밭 위에 똘똘 뭉쳐서 버려진 초코릿 은종이마저, 그런 7월의 왕국에서는 호수 속 전설의 수정처럼 자랑스럽게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상자 속에 상자가 있는 장치처럼, 광채 속에 또 하나 다른 광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채 속의 광채는 마치 무수하게 자잘한 꽃가루처럼 보였다. 불투명하고 부드러운 꽃가루였다. 그것들은 공중을 어디나 없이 떠돌다가 이윽고 서서히 시간을 들여 춤추듯 땅에 내려앉았다. 나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미술관 앞 광장에 들렀다. 그리고 연못가에 앉아서 동행과 둘이서 별 하는 일도 없이 맞은편에 있는 일각수 동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초여름 장마가 그제서야 막 갠 참이었다. 바람에 떡갈나무 잎이 희미하게 팔락거리고, 얕은 못물 수면은 이따금씩 잔물결을 일으키곤 했다. 시간은 그런식으로 움직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움직였다. 맑은 물 속에는 콜라 깡통이 숱하게 잠겨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수몰되어 버린 고대 도시의 폐허를 연상케 했다.

 

똑같은 유니폼 차림의 동네 야구 팀, 자전거를 탄 아이들, 개를 데리고 온 노인, 조깅 셔츠를 걸친 외국인 청년 하나가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잔디밭 위에 놓인 대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로부터 달콤한 멜로디의 팝송이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 왔다. 잃어버린 사랑이라느니 잃어버릴 것만 같은 사랑이라느니 하는 노래였다.

 

어디선가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 멜로디였는데, 확실히 들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닮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멍하게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태양의 햇살이 나의 벌거숭이 양팔에 흡수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리도 없이 아주 평온하고 조용하게 나는 이따금씩 팔을 얼굴 앞으로 올려 꼿꼿하게 뻗쳐 보았다. 여름이 막 왔던 것이다.

 

그런 일요일 오후에 어째서 하필이면 가난한 아줌마가 나의 마음을 붙잡았는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 않는다. 주위에는 가난한 아줌마의 모습은 없었으며, 가난한 아줌마의 존재를 상상케 하는 그 무엇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아줌마는 나를 찾아왔다가 사라져 갔다. 겨우 몇백 분의 1초의 순간이긴 해도 그녀는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뒤에 불가사의한 사람 형상의 공백을 남겨 놓고 갔다. 마치 창 밖을 누군가가 쓱 지나쳐 그대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급히 창께로 뛰어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가난한 아줌마?

 

 

20090331-20210301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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