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일요산책

미송 2021. 3. 27. 12:48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를 반쯤 읽다가 상환날짜가 되어 반납하였다. 한 달이 지난 후 눈먼 자들의 도시부터 다시 읽어볼까 하여 도서관에 갔다. 그러나 찾으려는 도시가 없었다. 그냥 나오려던 참에 마침 쉼보르스카가 눈에 띄었다. 장편소설 한 권 분량보다 훨씬 두꺼운 그녀의 시집.

 

그녀가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던 바, 선입견을 갖고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녀와 다시 만나려면 안경을 써야 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1945년 등단작부터 2005년 최신작까지 총 170편의 시가 수록되어 60여 년에 걸친 시인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표지 뒷장에 있는 말이다. 작가 연보와 기획자의 말까지 포함하여 총 505쪽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녀의 시에 대해 모차르트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 위에 베토벤 음악같이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하고 있다 라고 극찬하자 그녀 새로운 도전거리를 발견한다면 어떤 직업이든 끊임없는 모험의 연속일 것입니다. 나는 모르겠어 라고 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감이 솟아나죠. 또한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하여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번 더 또 다시 한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지요. 이것이야 말로 시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는지요 라고 답변한다. 겸손해서 아름답다.

 

지난 밤 자정 전까지 나는 거실에서 쿠션을 베고 시집을 읽었다. 중간에 건너뛰기도 하면서 단거리로 271쪽까지 달렸다. 소설이 이렇게 빨리 읽히면 얼마나 좋을까. 공산명월이 보내준 앵무새 죽이기가 떠올랐다.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도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중략)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pp14-15 <단어를 찾아서> 부분

 

참, 친절하다. 요즘 나의 고민을 어떻게 알고 책 앞부분에 단어에 대한 시를 배치해 두었을까.

 

 

열쇠Klucz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너를 향한 내 애타는 감정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이미 너와 나,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니

 

누군가의 낯선 손에 들어 올려져서는

아무런 대문도 열지 못한 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쇠의 형태를 지닌 유형물로 존재하게 될

내 잃어버린 열쇠처럼

고철 덩어리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녹(綠)들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카드나 별자리, 공작새의 깃털 따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점괘는 종종 나온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배가 고파온다. 감자라도 구워먹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쉼보르스카 그녀의 시는 군더더기가 없다. 지평선이자 수직의 화살. 감탄하다 보면 덩달아 활달해진다.

 

두 번은 없다 (Nic dwa rasy) 역시 공감이 컸던 시다.

 

 

여기 우리, 벌거벗은 연인들이 있다

서로에게 이미 신물 나게 아름다운 우리들

조그만 잎사귀로 눈꺼풀만 가린 채

깊고 깊은 어둠 속에 함께 누웠다

 

네 개의 모퉁이와 다섯 번째 벽난로는

우리 둘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발 빠른 그림자가 의자 밑에 자리 잡고

책상은 침묵 속에 의미심장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찻잔들은 이미 명백히 깨달았다

한낮에 다 마시지 못한 차는 차갑게 식어버린다는 걸

스위프트*는 일찌감치 모든 희망을 버렸다

이 밤중에 책 따위를 읽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에

 

새들은 환상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어제 보았다 내가 널 부르는 둘만의 은밀한 이름이

저 뻔뻔스러운 새들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그것도 아주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나무는 제발 말 좀 해주려무나

그들의 쉼 없는 속삭임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는 말한다 친절하게도 바람이 말해줄 거야

바람이 과연 어디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단 말인가

 

불나비가 창문을 향해 날아든다

보송보송 잔털이 돋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비상과 착륙을 되풀이하며

우리의 머리 위에서 끈질기게 윙윙댄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볼지도 모른다

곤충 특유의 예민한 감각을 가졌으니

나는 느끼지 못한다, 너도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의 심장이 어둠 속에서 훤히 빛나고 있음을

 

<공개Jannosc>전문

 

시어들 중 스위프트*가 생소하다. SWIFT(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인지, 걸리버 여행기의 조나단 스위프트인지,

 

 

사소한 공지사항 Drobne ogloszenia

 

어디에 가면 연민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

비록 그것이 심장의 헛된 상상이 빚어낸 인공적인 감상에 불과할지라도

일단 출처를 알고 계신 분은 누구든지 알려주세요 제발 좀 알려주세요

온 힘을 다해 노래 부르며

이성을 잃은 듯 덩실덩실 춤을 추십시오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여윈 자작나무 아래서

왁자지껄 흥겹게 놀아보는 거예요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드립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다 가능합니다

별이 총총 수놓인 하늘과

북경 사람의 각 진 아래턱과

메뚜기의 뜀박질과

갓난아기의 손톱과

플랑크톤과

눈송이를

골똘히 응시할 수 있는 비법을

특별한 훈련을 통해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되돌려드립니다

자, 조심조심 기회가 왔어요

풀잎이 목덜미를 간지럼 태우던 일 년 전의 바로 그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워 가만히 기다리세요

바람이 춤을 춥니다

(작년 이맘때 그대들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던 바로 그 장본인이죠)

자, 아직 꿈에 흠뻑 도취된 다양한 매물들이 여기 있습니다

 

양로원에서 숨진 노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애도해줄

사람을 구합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거나 증명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제출된 서류는 전부 파기될 예정이고, 수령 확인증은 발급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남편이 남발한 헛된 약속에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음을 밝힙니다

내 남편은 사기꾼

사람들이 득실대는 이 세상의 온갖 빛깔과

떠들썩한 소음 창가의 노래 한 곡조 벽 너머 짖어대는 강아지 한 마리로

당신들을 참 잘도 속여 넘겼죠

어둠 속에서도, 적막 가운데에서도 결코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는 그 서약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낮의 미망인인 밤으로부터.

 

pp41-43

 

 

날카롭다. 1957년쯤에 썼던 시, 서른 중반의 그녀 시가 시니컬하다. 행복한 사기를 만났었길 빌어 본다. 인터넷에 참 많이 배포된 그녀의 시편들. Per-Olov Kindgren 만큼 국제적으로 독자들을 챙기는 시인이란 느낌.

 

구운 감자를 먹던 남자가 두 잔째 커피를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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