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2008년 겨울호

미송 2021. 10. 13. 12:03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김행숙(〈서시〉, 2008년 겨울호)

 

 

월식

 

촉촉하게 달뜬 그녀의 몸에 나를 대자 스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나의 첨단이 그녀의 둥근 틈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열었는지 내가 밀고 들어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르르 눈앞이 캄캄해진 것을 보면 불어먹는다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만,

 

 

-김산(〈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숲새

 

1

새는 나무의 꿈, 나무가 꾸는 꿈

새를 품은 나무는 지저귄다

수만 개 부리로 지저귄다

새는 나무의 영혼

나무는 새들이 잠드는 짙푸른 봉분

새를 품은 나무의 영혼은 훨훨 날아오른다

흰 새들이 나무 위에 피어 있다

새는 나무가 낳은 아이들

소란하게 떠들며 몰려다닌다

 

2

새벽 숲에 들어서자 나무들

몸 깊숙이 부리를 묻고 외다리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은 진작 조류로 분류되어야 했다

다리 묶인 새

땅에 매인 새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

나무는 푸드덕거리며 깨어난다

쫑긋거리는 귀 지저귀는 부리 반짝거리는 눈

숲이 들썩거린다

소란한 고요와 섬광 같은 순간

새들은 날아오른다

수천 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

 

-서 영 처 (시로여는세상, 2008 겨울호>

 

 

잎사-귀로 듣다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잎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단단하여라

사랑은 삶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배인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 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 심 보 선 (문학선, 2008. 겨울호)

 

 

물방울의 역사

 

연잎에 떨군 물방울이 맑은 구슬로 또르륵 굴러가는 것은

연잎에 스며들지 않도록 제 몸 고요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

오직 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건들지 않고

그저 가볍게 스치기만 하려고 자신을 정갈하게 말아 쥔 까닭이다

그러나 물방울의 투명한 잔등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포자들이 출렁거렸는지

수 만 갈래의 흩어지려는 물길을 달래며 눈물의 방을 궁굴려 왔는지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찍했는지

물 위에 닿는 순간 물방울은 잠시 흔들렸던 세상을 먼저 버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서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가장 아픈 방법으로

 

-이영옥(시작, 2008년 겨울호)

 

 

모래시계가 있는 방

 

그가 오래 비워둔 방에 들어섰을 때

거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맡의 모래시계는 천상의 시간을 비우고

지상에 무덤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부러진 늑골로 누워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은 늘어서서 자신의 시선을 보았던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시선은

남은 불빛을 하나씩 떠나갔다

모래시계에 갇힌 지평선은

검은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시간은 그의 입에 모래를 부어넣었다

모래 흐르는 소리 이명처럼 울리고

눈썹 위로 지평선이 올라가겠지

그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태양과 바다를 오가는 구름처럼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죽음은 잠을 완성시킬 뿐이다

죽은 가지 끝에 눈을 틔우는 봄처럼

그는 이 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몹시 더운 방 너머 눈 덮인 저 길 너머로

시간은 오래 흐르고 흐르리라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

천상의 시간을 지상에 펼쳐놓는 사막에서의 밤처럼

모래시계는 비어있는 시간에 다시 젖줄을 댈 것인가

 

-김연아 (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겨울호)

 

 

 

한지에 수묵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 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 성 목 (〈시로 여는 세상〉, 2008년도 겨울호 )

 

 

대황하 10

 

취하리라 저 물에 취하리라 자동차를 타고 계단을 오르고 집에 들어누우리라 노을의 냇내를 풍기며 그대에게 안기리라 늙은 사람과 만나 술 한 잔에 취하리라 지혜의 말에 취하리라 새로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리라 푸른 초원을 달리리라 소리를 지르리라 그러나 그리워하리라 그러나 웃으리라 그대의 아들을 안고 웃으리라 그대의 주검을 안고 웃으리라 떡을 먹고 살리라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곳의 법을 버리리라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 기도하고 울리라 그물처럼 집 위에 눌러 앉은 햇살에 몸을 누이리라 눈을 감으면 폭우가 내리리라 빗물이 얼굴에 생채기를 내리라 취하리라 피가 흘러내리는 저 물에 취하리라.

 

- 이 재 훈 (〈딩하돌하〉, 2008년도 겨울호)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테그

 

애인아

두꺼운 전화번호부 두 권의 갈피갈피를 서로 맞물려 놓고 대형트럭이 양쪽에서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는 걸 보았다. 쉽게 찢어질 낱장들의 허약함을 알지만

애인아 그 정도 자력은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이지.

 

무명초

부두에서 잠 배를 놓치고 A4 종이못에서 낚시하고 있는데 퐁당 소리가 난다. 살펴보니 머리카락 몇 가닥 빠졌다. 저울에 올렸더니 바늘이 어느 결에 360도 돌고 나서 시치미 딱 떼고 0 가운데에 숨어 있다. 무명초가 이리도 무거워지는 새벽이란, 시간의 새 벽에 부딪쳐 느닷없이 안기는 오늘이라니.

 

 

수도적

꽉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리자 사방으로 물이 튄다. 너무 오래 많은 걸 머금고 있었다. 글을 쓰다 수동적을 수도적이라고 잘못 쳤다. 스스로 분출할 수 없으니 수도가 수동적인 건 명백한 일. 녹물은 핏물과 다르지 않지.

 

-이정란 (「시로여는 세상」, 2008겨울호)

 

 

20211013 타이핑 채란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0) 2022.06.29
아침의 안이  (0) 2021.10.30
김승일 <나의 자랑 이랑>  (0) 2021.04.13
일요산책  (0) 2021.03.27
가난한 아줌마 이야기  (0) 202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