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법(依法)
삶과 존재의 의미와 가치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쳐 준다면 그 복이 저 앞의 복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의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수승한 깨달음은 모두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불법이 아니다.
부처님은 온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의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금강경의 네 구절을 설명해주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금강경 안에는 가장 높고 넓은 올바른 지혜가 들어있고, 그래서 모든 부처님들이 바로 이 금강경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아초월 심리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브라함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6단계로 제시했습니다.
1. 신체적, 생리적 욕구
2. 안전에 대한 욕구
3. 사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4. 존중 욕구
5. 자아실현의 욕구
6. 자아초월의 욕구
매슬로는 앞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로 이동한다고 보았습니다. 또 1~4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까지는 충족되어야지 지나치게 결핍되면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들을 기본(결핍)욕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보시의 기준을 매슬로의 욕구위계설에 근거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1은 물질적 보시
2~4는 정신적 보시
5~6은 영적 보시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는 각각 타자의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돕는 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한편 영적 보시는 보다 깊이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가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인 깨달음과 성장, 행복으로 인도하는 금강경의 내용들을 깊이 새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물질적 보시에 비해서 훨씬 더 본질적이라는 말씀이 그다지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불법이라는 것이 사실은 불법이 아니라고 하셨을까요? 부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서로 베풀고 도우면서 살아야 하는지, 또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설법을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법이란 건강하고 행복하게 존재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요? 이를테면 순간순간 일어나는 우리의 경험들을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각하는 겁니다.
고통스런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자신에게 자애로워야 합니다. 스스로를 연민으로 바라볼 때 타인에게도 같은 시선을 줄 수가 있습니다. 자기 연민이 가능할 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도 받아들이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자비심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즉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불법을 산삼에 비유하자면, 산삼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서 많이 난다는 식의 알음알이로 설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삼에 대해서 아무리 잘 알아도 그 효능을 직접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직접 먹고 그 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불법을 공부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느끼고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통찰이 타자를 향해 봉사하고 나누는 삶의 행위로 전환되어, 불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자연적으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네 구절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칠보를 보시하는 공덕보다 더 큰 공덕이 된다는 진짜 의미입니다.
수보리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은 성인들이 각자 자신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이름으로 존재할 뿐, 실제로 그렇게 불릴 만한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를 욕망을 떠나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가는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나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의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 수보리는 열반의 고요와 맑음을 즐기는 자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는 무아에 바탕을 둔 무위법이기 때문에 배우는 이들의 수준과 조건에 따라서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따라서 불법은 일정하고 고정된 형태가 없어서 움켜잡을 수도 없고 말로 설명될 수도 없어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순간 불법이 불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성의 실현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와는 달리 초기불교는 중생의 깨달음을 장애하는 번뇌를 제거하는 정도에 따라서 수행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단계로 분류합니다. 수행자들은 이 수행사과의 과정을 통해서 법을 성취하고 수행의 열매를 얻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수행사과의 각 단계에는 성취할 법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그러한 의문을 해소해줍니다. 이들 성자들의 영적 수준에서는 몸과 정신 현상을 자아로 착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깨달음의 단계를 얻었다는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또 고정된 실체로서 수행의 열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이름이 수다원이고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라는 겁니다.
수보리 존자는 욕심을 떠나서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최고의 아라한이라고 하지만, 수보리 존자 자신은 스스로 그러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최고의 아라한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은 자기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생각이 왜 없는 걸까요? 만일 있다면 그것이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는 걸까요? 육조혜능 대사는 얻은 것이 있다는 마음에는 다툼이 있고, 다툼이 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얻는다는 마음은 인식의 대상을 취하는 것이어서 얻는 주체와 얻는 대상간의 주객 이원성을 낳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얻는 행위는 주체 의식, 즉 아상을 강화시키게 되고, 아상은 다시 대상에 대한 소유 의식인 인상을 강화시킵니다. 주체의식과 대상 의식의 만남은 다양한 형태의 계산을 유발하여 갖가지 갈등과 다툼이 있는 중생상을 낳고 그와 같은 조작적인 계산 자체가 수자상을 유지시키고 강화시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불교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얻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정반대로 얻은 것이 있다는 의식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얻었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지혜가 아니라 또 다른 모양의 번뇌와 망상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수행은 탐욕 화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성을 해독하는 과정이므로 무엇을 얻었다거나 성취했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얻으려고 하는 그 무엇은 실체가 없어 공합니다. 그래서 독성에 중독된 마음이 해독되면서 정화되고, 깨끗해진다는 자성청정이라는 표현이 수행의 의미에 더 부합됩니다.
즉 탐욕과 화 어리석음에 의해서 생겨난 천만 가지 들끓는 감정과 생각들이 수행을 통해서 누그러지고 사라지면서 중독되기 이전의 상태인 본래부터 맑고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마치 감정과 생각의 먹구름이 사라지면서 그 속에 가려졌던 태양이 빛나듯이 말입니다.
p107-114
진아(眞我)
무아에도 집착말라
수보리야 여래가 옛날에 연등불로부터 법을 얻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서 모양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 같다면 그 몸이 크다고 생각하는가.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이 아닌 것을 가리켜서 큰 몸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취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전생에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고 설법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불법을 취하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면 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에 대해서 해명하기를, 당시 부처님은 말로써 들은 것이지 몸으로 체득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서 보살이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표현 또한 말로써 설명하자니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꾸미는 자와 꾸며지는 대상, 즉 주객의 경계가 사라진 마당에 누가 무엇을 꾸민다는 말이 맞지 않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아는 실체가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아는 실체가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없다는 말 자체 즉, 무아라는 개념에 집착합니다.
제가 진행하는 참나 만나기라는 수행 프로그램을 보고, 불교의 핵심 사상은 무아고 공인데 참나 진아 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원효 스님의 열반종요에 보면 외도는 자아에 집착하고 성문은 무아에 집착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원효 스님은 우리가 아我에도 무아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대아 즉 진아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보살은 청정한 마음을 내어서 모양이나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등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낸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일까요?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자아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 자아의 기능이 멈추었다는 의미입
니다. 주객이 전체적이고 통합적이고 조화롭게 작용한다는 거지요.
그 결과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을 생각 개념 판단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표상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 감각 통찰 직관 등을 수단으로 체화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타자에게 전달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는 지식입니다. 후자는 언어 이전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말로 전달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지혜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의 내용에서 부처님 말씀의 요지는 누구든지 보살행을 닦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나 개념 판단이라는 이원적 수단을 사용하는 대신, 느낌 감각 통찰 직관 등의 비이원적 수단에 의지해서 자비심을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주객의 경계가 사라진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에 수미산처럼 절대 평등한 큰 몸이 되어, 한 중생도 빠짐없이 일체중생을 모두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16-118
무애(無碍)
트라우마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
우리는 앞에서 아공, 법공, 이사무애, 사사무애, 번뇌장, 소지장 등 상당히 전문적인 불교 용어와 함께 정서 장애, 인지 장애 등의 심리학 용어를 많이 접했습니다. 이들에 대해 이해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약간의 부수적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불교심리와 정신분석을 정신치료에 통합해온 마크 엡스타인은 그의 저서 <트라우마 사용설명서>에서 불교를 내면의 과학, 형체 없는 내면의 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불교의 무아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더 생생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는 무아가 바로 진짜 우리 자신, 진아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경험이 풍부한 임상 전문가들에게, 지혜롭고 자비로운 치료자가 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냐고 질문했는데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대부분의 치료사들이 ‘나’ 자신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치료자 자신이 치료 효과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뜻인데요.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견해, 편견 등의 오염된 색안경을 통해서라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아공) 무아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담자를 바라보는 일은(법공) 치료자들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요. 당연히 그 원인은 치료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집과 법집 때문입니다.
만일 우울증을 호소하는 내담자를 향해서, 치료자가 무아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치료자는 자신의 편견을 넘어서서 내담자의 본성과 우울증을 분리해서 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만일 치료자가 우울증이나 불면증 등 갖가지 심리현상들이 본질적으로 비어 있음을 안다면 그러한 증상들 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내답자와 치료자 사이에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겠지요(사사무애).
결국 무아를 체득한 치료사라면, 우울증이라는 정신현상도 우리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이 다양한 조건들(불면증,자살충동,무기력...)로 짜여진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울증에 대한 어떤 고정된 관념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울증 또한 자연스런 삶의 경험일 뿐일 테니까요.
이제 왜 부처님 앞에서는 우울 불안 질투 미움 등 갖가지 정서적인 장애(번뇌장)와 그릇된 신념, 사고 등의 인지적 장애(소지장)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병이 봄분 녹듯이 녹아내릴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부처님은 아공(인무아)과 법공(법무아)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것 또한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아와 무아를 초월하셨기 때문에 판단이나 분석, 진단하려는 태도나 그들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고통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공감하셨겠지요. 한마디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의왕으로서 부처님의 치료 행위는 있지만 치료한다는 생각이 없고, 치료 행위가 부처님 자신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없으며, 그냥 상황이나 그 순간의 필요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식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성취하신 네 가지 지혜 가운데 하나인 성소작지, 즉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그야말로 치료하는 자와 치료받는 자가 없이, 오직 치료만 있는 것(진아)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와 자비의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가르침을 펴고도 단 하나의 법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p137-139
업장(業障)
고통은 성장을 향한 징검다리
수보리야 만약 금강경을 읽고 사유하면서 수행하는 사람이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전생에 지은 죄업 때문에 악도에 떨어질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을 독송하고 사유한 공덕으로 악도에 떨어지는 대신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으로 전생의 죄를 소멸하고 나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수보리야 무량한 나의 전생 삶을 돌이켜보니 나는 연등불을 뵙기 전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세에 이 경을 읽고 사유하면서 가슴에 간직한다면, 내가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그 공덕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어떤 계산이나 비유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수보리야 말세에 선한 사람들이 금강경을 읽고 사유하고 가슴에 새기는 공덕을 자세하게 말하면, 아마도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 금강경은 그 뜻이 워낙 불가사의하고, 그 복덕 또한 불가사의해서 생각하거나 짐작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강경을 읽고 사유하고 가슴에 새기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을 얻는 일인지,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가르쳐주고 설명해 줌으로써 얻게 될 복과 덕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에 대해서 공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보면 금강경을 읽고 외우고 사경하고 가슴에 새긴다고 해서 누구나 다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두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게다가 금강경을 독송하고 공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는 것이 힘들고 별로 좋아지는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나를 깔보거나 욕하며 괄시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전생에 지은 과보로 인해서 현생에서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공격성을 갖는 지옥의 삶, 만족을 모르고 끝없는 갈망과 결핍감에 허덕이는 아귀의 삶, 성적 욕망과 충동, 무지에 사로잡힌 축생의 삶을 살아야 마땅한데, 금강경을 공부하는 공덕으로 인해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천대와 멸시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또는 전생에 지은 업이 소멸되고 나면 반드시 자신이 수행한 만큼의 복과 덕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이, 어느 정도까지 금강경을 이해하고 사경하고 가슴에 새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줘야만 삶의 문제와 고통, 갈등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물론 개인마다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집과 법집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해방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집과 법집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경험의 주체인 ‘나’가 경험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대상인 ‘너’를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경험에만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잊는다는 의미는 ‘나’와 ‘너’에 대해 무지해져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나’에 대한 경험과 ‘너’에 대한 경험을 저항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말고 관찰하고 음미하고 사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집착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싫어하거나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즉 집착과 무관심을 떠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경험에 개방적이고, 경험을 반추하고, 경험으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경험에 반응해서 휩쓸리지 말고 지혜를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인생 경험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경험으로만 존재해야 할까요? ‘나’를 의식하는 순간이 바로 갖가지 정서적 심리적 번뇌를 낳는 순간이고 ‘너’를 의식하는 순간이 바로 갖가지 판단과 생각, 분별상을 낳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의 주체인 ‘나’를 의식하는 아집과 경험의 대상인 ‘너’를 의식하는 법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나의 업장을 소멸시키는 길입니다. 즉, 눈앞에 다가오는 천대와 멸시의 재앙을 부처님의 가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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