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와 단식가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 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게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 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요리책
나는 요리책입니다.
나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질투를
일으키거나 시기를 품지도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어떤 전술이나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나는
요리책입니다.
나는 당신을 웃게 하지도 울게 하지도
못합니다 나에겐 갈등도 반전도 없으니까요
또 나는 당신으로 하여금 외치게 하지도
침묵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물론 당신을
침대에서 일으키지도 못하고
라디오를 켜게도 끄게도 못 합니다
단지 나는
요리책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음탕한 욕설을 배우지도
못할 것이고 총쏘는 방법이나 주먹질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뿐 아니라
당신들은 나에게서 색다른 피임법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구린내나는 부패의 냄새를 맡거나
으시시한 부정의 그림자를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나는
요리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나에게는
행운당첨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기관총을 든 특공대가 튀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구음성교를 권장하지도
동성연애를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녀간의 정상적인 사랑을 찬미하지도 않고
실연에 대처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요리책이니까요.
하므로 이화효과를 노리지도 정신적 배설을
노리지도 않습니다 나는 상징하거나 은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회적이거나
풍자적이지도 않죠 더더욱이 자동기술법이나
자유연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말이지 나는
구조주의나 원형이론 따위와 관계가 없고
현상학을 응용하지도 않습니다 새로운
학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
말씀입니다 나는
요리책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욕할 의사가 없을 뿐더러
여론에 호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신비극을 보여주거나 막간극을 보여주지도
않죠 나는 당신의 반응에 박수를 치거나
당신으로부터 박수를 받고자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지도
꿈을 지니라고 충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당신 멋대로 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요리책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사상투쟁을 하도록 이론을 제공
하지도 않고 민중봉기를 부추기지도
않습니다 나는 또 정부를 선전하지도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어떤
주의와 종파를 지지하거나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긴요하게 쓰여집니다 나는
요리책입니다.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
36년 전 씌여진 시를 읽는다. 시간의 기억을 더듬지 않으면 패러디 냄새가 난다. 그 모든 출처가 여기였을까. 한 달 여전인가 일주일 전인가 유투브 패널들이 거론하던 시 제목을 비로소 찾아 읽는다. 무심히 타이핑하기 좋은 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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