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작가들

예수와 극단(極端)

미송 2025. 1. 23. 11:35

예수와 極端
<食人種類> 외 6편을 쓰고나서

박 남 철


1. 예수와 極端

예수의 정신은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김수영에게서도 예수의 정신을 본다. 예수의 정신은 극단이다. 극단을 잃어버릴 때 언제든지 예수의 정신은 떠난다. 나는 언제까지나 이 극단의 정신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허욕이다. 자신을 예수라고 생각하는 일, 이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우리는 다만 전할 뿐이다. 그 소리를 전달할 뿐이다.

 

2. 술과 피

 

나는 술과 피를 너무 마시고 너무 흘렸다.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1차적인 물과 불의 결합들이었다. 산문은 풀이(흐름)이고 시는 맺힘(막힘)이다. 이제 나는 2차적인 물과 불의 결합도 미완성했다. 이제 내가 미완성해야 될 목표는 물론 문학이라는 물과 극단이라는 불의 결합이어야 한다.


3. 선배와 후배

 

적어도 나 까마귀의 예수의 정신은 까마귀의 정신이었다. 고로 나는 이상에게서도 한 실패한 예수의 정신을 본다. 눈으로 보건대는 모든 인간은 미완성이다. 모든 인간은 미완성이고 모든 인간적인 행위도 미완성이다. 미완성일뿐더러 추악하다. 추악할 것들을 아름답게 보는 눈이 바로 예술인데, 그러나 나 까마귀의 눈으로 보건대는 예술 역시 추악하다. 왜냐하면 그 예술을 창조한 인간이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색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심들을 못 잡을 수밖에.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건대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일 텐데, 깨달아야 마땅한 일일 텐데, 어째서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에 대하여 과신을 하게 될까. 모든 인간은 미완성이다. 예수가 완성된 인간이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들도 미완성이어야 한다. 도대체 미완성이 만들어놓은 예술이 완성이라도 될 수도 있단 말인가. 그건 예술 속에 빠져 있는, 허우적거리는 생각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나보고들 건방지다고들 하는데 적어도 나 까마귀의 눈으로 보건대는 나보고 건방지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건방지다. 예수의 정신은 약자의 정신이다. 힘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걸 깨닫고 나중에는 완패해줌으로써 완승해버린 놀랍고도 놀라운 강자의 정신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시대의 모든 예수들은 혹시, 혹시 내 속에 자기보다 더 순수한 반가운 예수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번 검증해볼 생각조차 안했을까? 아니, 아마도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낭만적인 것, 낭만적인 것은 예수적인 것이다 만 놔두고는 모조리 부정해버렸다고 이를 갈면서 요즘 젊은 시인들은 너무 이 사회가 가족에 대하여 뻔하다는 뻔데기식으로만 논다 고 대가리에 털을 산발을 해가지고 불호령이나 내리셨을까? (그것도 그 잘난 반 매스커뮤니케이션 석상에서)

적어도 나는 후배들을 많이 상대했는데, 나는 늘 후배들이 두려운 사람이다. 가끔은 나도 실수로 후배들을 함부로 다룰 때가 많았었는데 물론 그렇게 판단될 때는 지체없이 전화를 걸어 잘못을 용서받았었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갈수록, 갈수록 후배들이 더 무섭다. 간혹은 무의식 중에 후배들에 대한 질투가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가 패배하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다울 거라고, 그리고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내 시집 2인 공동 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에 후배들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그래서 그렇다. 적어도 나는 사람 볼 줄은 안다. 가끔은 나도 실수로 후배들을 내 손아귀에 꽉 넣어두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때가 많았는데, 멍청, 그럴 때일수록 후배들은 더욱 나를 달아났다. 오히려 그 후배들을 놓아주고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니, 글쎄, 6개월이 채 못 되어서 내게 도로 돌아왔다.

 

세상은 항상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선배와 두 사람의 후배가 있다면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선배를 부정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부정할 자유를 통제할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는 바로 실력 없는 선배이다. 나는 이제 다행히 나의 거시기격인 한 선생님의 주선으로, 내가 그 동안 후배들에게 해주었던 만큼, 아니, 그 몇갑절 이상의 사랑을 퍼부어주시는 한 젊은 선배를 만나게 되었고, 나는 생각한다.
<중략>

끝으로 우리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이끌어주신 고 김수영 선배에게 그리고 그 역으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신 성찬경 선생님께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나의 폭력을 끌어안아 사랑으로 대처해주심으로써 나를 더 빨리 깨우쳐주신, 불러주심으로써 더 빨리 깨우쳐주신 그 어떤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현대문학』 1984년 1월호, '신작 특집'의 '시작 노트'

 

 

 

삶을 기억하라 - 삶의 예술들 (계간시평)
- 해설

박 찬 일(시 인)

1. 삶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이르는 길이 있었다면, 인간에서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만큼 다른 또 다른 존재로 이르는 길이 있는 걸까. 그 다른 존재에 도달할 것인가. 니체의 위버멘쉬는 그 다른 존재에 대한 이름일까. 위버멘쉬는 인간을 넘어서는 자이므로 넘어선 인간 초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때의 시제는 완료형이다. 그러나 또한 넘어서는 인간 혹은 건너가는 인간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때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매 순간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누가 위버멘쉬인가, 누가 위버멘쉬가 되는가.

 

파우스트는 위버멘쉬가 아니다. 의학 천문학 법학 등 모든 학문에 통달했지만 세상의 가장 안쪽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 궁금증을 풀 길 없어 자기 자신의 영혼을 악마 메피스토에게 저당 잡힌 파우스트는 아니다. 세상의 가장 안쪽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묻지 않는 자 그가 위버멘쉬이다. 그가 위버멘쉬가 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핥을 수 있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자이다. 신이 없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자이다. 본질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이 대지가 본질이다, 이 대지 위에 홀로 서 있는 내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위버멘쉬는 강한 자이다. 강한 자이어야만 된다. 누가 죽음 없는 삶을 견디는가. 누가 죽음 다음의 삶 피안의 삶 없이 여기의 삶을 견딜 수 있는가. 누가 낙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는가. 누가 기꺼이 몰락하려는가.

 

위버멘쉬는 또한 모든 것이 한 번뿐이라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한 번뿐에 자기 자신의 전부와 결부시키려는 자이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끝이요, 시작이다. 위버멘쉬는 그리고 그 한 번이 영원히 되풀이한다고 인식한 자이다. 한 번을 살아낸 그 순간이 영원히 반복해서 회귀하게 된다면 한 번을 살아내는 그때 그때마다의 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첫날밤 의식을 치르는데 실패한 대가로 그후 또 첫날밤 의식을 치르는데 실패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영원히 반복해서 되풀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영겁회귀의 핵심은 그러므로 똑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데에 있지 않다. 똑같은 것이 그후 영원히 다시 되풀이되므로 순간 순간을 최대한도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에 영겁의 무게를 느끼고 살아가는 삶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사랑의 핵심은 서양의 이원주의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5)

니체는 조건절에서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들이라는 복수형을 썼다. 하이데거는 그의 논문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에 대해서에서 니체가 기독교의 신에 대해서만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현세와 내세를 구분한 기독교뿐 아니라, 현상(감각적 세계)과 본질(초감각적 세계)을 구분한 플라톤 이후의 일체의 서양 형이상학적 전통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칸트 역시 육체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분했음을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니체의 신들에 대한 사망선고는 따로 존재하는 신의 세계(내세), 따로 존재하는 본질적 세계(예를 들면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내세가 따로 없고 본질이 따로 없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근거가 되는 삶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고 묻지 않는 그 삶 말이다. 니체에게 영혼, 혹은 정신이라는 것은 몸에 붙어 있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포함한 몸에 대한 전면적 긍정, 이것이 차라투스트라 철학의 핵심이다.

 

2. 삶을 쫓겠다

 

죽을 때까지 죽음에 쫓기지 않는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종교에 쫓기지 않는가. 살아있을 때 종교에 쫓긴 덕분에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죽어보니 천국과 지옥이 없었다면 그러면 인생을 낭비한 죄가 큰가. 여기 죽음에 쫓기지 않겠다는 자가 있다. 지옥에 가더라도 아니 지옥에서도 죽음에 쫓기지 않고 지옥 같은 삶을 쫓겠다는 자가 있다. 박용하 시인의 달을 쫓다(시와 시학, 2000 봄)를 보자.

 

오늘도 천국을 소개하는 종교광들이 다녀갔다

죽을 때까지 종교에 쫓길

광신도들이 광견처럼

싸구려 낙원을 짖어댈 때

나는 태양교를 믿는 사람

지구교 신자

맹신의 무리들이

싸구려 천국을 대량 복제할 때

나는 수줍은 이방인이 되어

지옥에서도 달을 쫓으리라

 

시인은 싸구려라는 말을 두 번 사용했다. 싸구려 낙원과 싸구려 천국 싸구려 낙원 싸구려 천국이라는 말은 기독교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광신자들을 욕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싸구려인가.

 

우리는 물건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 싸구려라는 말을 쓴다. 또 물건이 흔할 때 싸구려라는 말을 사용한다. 시인은 광신도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다. 시인에게 기독교도들은 광신도들이다. 그들은 광견처럼 같은 말을 계속 짖어댄다. 그래서 낙원은 싸구려 낙원이다. 기독교도들은 맹신의 무리들이다. 맹신도들은 천국을 대량으로 복제해내는 자들이다. 그래서 천국은 싸구려 천국이다. 여러 사람들이 낙원을 향해 짖어대고 여러 사람들이 천국을 찍어내고 있기 때문에 싸구려 낙원과 싸구려 천국인 것이다. 시인이란 족속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싸구려 길)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자들인가.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싸구려 길)이 옳은 길일지라도 거기에서 등을 돌리는 자들인가. 시인은 어깃장인가. 시인은 지옥에서도 달을 쫓으리라 라고 선언하지 않는가. 태양이 밝음이라면 달은 어둠. 달빛은 달의 빛이 아니라 태양의 빛. 어두운 달. 많은 사람들이 가는 밝은 길을 놔두고 어두운 길로 들어서는 자들이 시인인가. 이 시에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본능적 거부, 혹은 그것에 대한 단순한 어깃장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지옥에서도 달을 쫓으리라 라는 구절을 다시 보자. 이 구절은 우선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라고 말한 것이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말 그대로 지옥에 가서도 달을 쫓겠다는 것이다.

 

니체의 신에 대한 사망 선언은 기댈 언덕을 없애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삶이 전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 것이다 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니힐리즘이다. 그러나 니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냐 나는 이 대지를 받아들이겠다. 이 대지를 전면적으로 긍정한다. 나는 대지밖에 없는 운명, 죽음이 끝인 운명을 사랑한다. 나는 기꺼이 몰락하리라. 이것이 니체의 적극적 니힐리즘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기꺼이 몰락해주는 자가 설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므로 기꺼이 몰락해주는 자이므로 악에서도 대범한 자이다. 삶의 광기 자발적 죽음 격정을 칭송한다. 삶을 칭송하는 것이다. 달을 쫓다의 시인 역시 시인을 믿지 않는 자 대지를 믿는 자다. 태양교를 믿는 사람 지구교 신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지옥을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는 것 아닌가. <하략>

 

3. 죽을 때까지 걸어라

 

다음은 한명희 시인의 시와시학 2000년 봄호에 실린 [전설]이란 시이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가 없다

 

혼자서 걸음마를 익히고
혼자서 들로 나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걸었다
계속 걸었다
멈추는 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발등이 부풀어 올랐지만
아버지는 신발을 벗지 않았다

(중략)


정말 더는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자기 발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자갈보다도 더 단단히 굳어있었다

아버지는 걸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납처럼 굳어버린 그의 몸에서
눈물처럼 씨앗이 뚝 떨어졌다

그 자리에 나무가 자라났다
그 후로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시적 자아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없다(첫행).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중의 하나인 시적 자아 역시 아버지가 없다(끝행). 아버지가 없다는 것, 이것은 '신'이 죽은 시대, 혹은 중심이 사라진 시대, 혹은 중심에 대한 꿈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지 않은가. '새' 중심, '새' 신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우주는 대폭발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티끌 보다 작은 특이점(特異點)이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우주는 계속 팽창하지 않는가. 그러다가 다시 한 점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물질의 최소 단위는 원자가 아닌가. 원자를 구성하는 쿼크들이 아닌가. 아니면 디지털 시대의 중심은 비트라고 하던가. 인터넷은 마치 옛날의 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지 않은가. 우주의 시작을 알았다고 해서, 그리고 우주의 끝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해서, 물질의 기본 단위가 드러났다고 해서,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우리는 '새 신'을 신고 기뻐하는가. 우리는 '새 신'을 신고 편안한가. '옛 신'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편안한가. 특이점, 쿼크, 비트들이 '신'의 공백을 메꾸었는가.

 

아직은 아닌 것이다. 나는 '아직은' 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그 공백은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신'이 사라진 것, 중심이 사라진 것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충격이 진행 중인 상태다. '신'이 없어진 시대에, 중심이 사라진 시대에, 그것들에 대한 공백감이 느껴진다. '신'이 없어진 사실, 중심이 사라진 사실에 자꾸 신경이 간다. '신'이 없어졌다는 것, 중심이 사라졌다는 것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말 없어졌는가. 정말 과거에 그토록 열망했던 것들은 깨끗이 사라져버렸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래도 '나'는 살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점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이 셋째 연의 멈추는 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라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 혼자서 걸음마를 익힌 사람,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혼자서 들에 서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부지런히 계속 걷는 것이 아닌가. 발등이 부풀어 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멈추는 것은 죽음이 아닌가. 순간 순간이 최대한도의 힘이 되지 못할 때 그 공허를 어떻게 견딜 수 있다는 말인가. 텅 빈 대지에 혼자 있는 느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순간 순간이 최대한도의 힘이 되지 못할 때 비로소 죽을 것이다. 죽어야 한다. 이때의 죽음은 자발적 죽음이다. 기꺼이 몰락하려는 자의 죽음과 같다.

 

아버지는 걸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매순간 최대한도의 힘을 내서 걸었고, 그래서 발이 자갈보다도 더 단단히 굳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어 맞이하는 죽음은 이제 가치 있는 죽음이다. 이런 죽음이 그 뒤  영원히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매순간이 최대한도의 힘이 되지 못하는 삶, 발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은 삶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최대의 힘을 내어 죽는 날까지 걷다가 죽어버리는 삶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삶이 죽은 자의 나무 그늘 아래 태어난 역시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의 삶속에서 되풀이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까. 이것도 언젠가 전설이 되지 않을까. 어느 날 새 아버지가 다가와 걸음마끈을 붙잡지 않을까. 신이 사라진 것, 중심이 사라진 것에서 오는 공백감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않을까. 이 시를 쓴 것이 전설로 남게되는 날이, 이런 시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뒤 새 아버지도 죽고 또 다른 전설을 쓰게될 날이. 시인은 그래서 시의 제목을 전설이라고 붙였을까.

 

4. 아름다운 소멸은 없다

 

소멸한다. 그러나, 소멸은 아름다운가. 그러나 소멸은 즐거운가. 누가 아름답게 소멸하는가. 누가 즐겁게 소멸하는가. 누구나 아름답게 소멸하지 않는다. 누구나 즐겁게 소멸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소멸하고 싶어해도. 즐겁게 소멸하고 싶어해도 '뒤의 세계Hinterwelt'가 있다면 그럴 수 있을까. 혜암 스님처럼 일중일식(一中一食)하면 그럴 수 있을까.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勇猛精進)하면 그럴 수 있을까.

 

다음은 허형만 시인의 [소멸에 대하여]({문학과의식} 2000, 봄) 전문이다.

소멸은 아름다운 법
그러나 한사코 아름다운 소멸을 없나니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제 몸 안에 불꽃 몇 뿌리쯤
키우지 않는 것 있더냐
불꽃이 푸르다가 벌겋다가
끝내는 허옇게, 정겹게
시나브로 고요해질 줄 아는
소멸은 즐거운 법
그럼에도 또한 즐거운 소멸이란
없는 법, 그만큼
이 우주와 함께 살아있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발정난 고통 아니더냐

허형만 시인은 한사코 아름다운 소멸은 없나니 라고 단정 짓는다. 즐거운 소멸이란 없는 법이라고 결론 내린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더 살고 싶다고 복걸하며 아름답지 않게 즐겁지 않게 소멸하는 중생들 틈에 살고 있는 시인. 자기 자신도 그렇게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에 대한 기억 소멸에 대한 기억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발정난 고통처럼 견디기 힘들다. 반드시 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참하게 소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어찌하랴.


시인은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제 몸 안에 불꽃 몇 뿌리쯤 키우지 않는 것 있더냐 라고 반문한다. 그러다가 불꽃은 시나브로 고요하게 사라져 줄 줄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꽃은 불꽃일 뿐, 실제의 삶은 불꽃같은 삶일수록 끝날 때에는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라 소멸하지 않는가. 불꽃같은 삶은 그만큼 더 비극적 소멸을 예비하지 않는가. 시인이 "그럼에도 또한 즐거운 소멸이란 없는 법이라고 덧붙인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일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죽음을 기억하라 고 설교하는 죽음의 예술과 관계 있다. 죽음의 예술과 삶의 예술은 동전의 앞뒤이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뒤인 것처럼. 죽음의 예술을 통해 독자는 다음과 같이 응전할 수 있지 않을까. 오냐, 죽음이더냐, 살아주마, 삶을 살아주마, 그리고 죽어주마, 아주 비참하게 죽어주마. 소멸에 대한 기억이 삶을 더 찬란하게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죽음의 예술은 삶의 예술이기도 하다.

 

5. 삶이 장엄하다

 

다음은 박남철 시인의 [고래의 항진]({문학사상} 2000년 4월) 전문이다.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앙……
갈매기떼, , , 갈매기들 날고
타아앙……
어디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돌고래 한 마리도 꼬리에 걸리며
타아앙……
자기가 고래인 걸로 잠시 착각한 늙은
숫물개 한 마리도 옆구리에 치인다
타아앙……
입 안에 가득 고이는 새우, 새우들,
타아앙……
나는 이미 바다이고 바다는 이미 나이다
타아앙……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
타아앙……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고래가 아니다
타아앙……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
타아앙……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아아앙……
꼬리로 나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아아아아앙……

나(고래)는 강자다, 약자는 가라, 갈매기 떼들은 날아가 버려라, 돌대가리 돌고래는 가라, 늙은 물개도 가라, 새우 따위는 죽어버려라, 내가 하늘이고 내가 땅이다, 내가 현상이고 내가 본질이다, 나는 나다, 나야말로 군주(君主)다, 라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시의 후반부에 시적 자아가 등장한다. 시적 자아는 이제 관찰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으로 들어가 시적 대상과 하나로 용해한다. 시인은 "나는 이미 바다이고 바다는 이미 나이다",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고래가 아니다", 분별하려는 것들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 라고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바다는 넓고 깊다. 얼마나 많은 것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와 하나가 되는가. 고래 보다 더 큰 생물이 있는가. 그 앞에서 무엇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시적 자아가 바다라면, 시적 자아가 고래라면, 시적 자아의 세상 역시 깊고 넓고 크다는 것. 시적 자아 역시 무엇을 구별하겠는가. 무엇을 분별하겠는가. 내가 바로 세상이다 라고 외치는 것 아닌가. 나는 현상이고 나는 본질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악이요, 또한 선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종반부의 "꼬리로 나를 치며 나아간다, 타아아아아아앙……" (강조는 필자) 라는 표현은 현재 이 시를 쓰고 있는 자아, 다름 아닌, 분별하고 있는 자아, 대상화시키고 있는 자아, 삶과 거리를 두고 있는 자아에 대한 시인의 번민의 표현이다. 시를 쓰는 자아까지 죽여버려라 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시인은 삶은 오로지 삶일 뿐이다, 라고 노래 부르려고 한다. 삶은 그대로 장엄하다고 노래부르려고 한다. 노래보다도 삶이 그대로 장엄하다고, 바다가 장엄하다고, 고래가 장엄하다고, 그리고 장엄한 시보다 장엄한 것이 삶이라고.

 

멋있게 씌어진 시다. 그러나 멋있게 사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족하지 않은가, 타아아앙……탕! 이 시는 박남철 시인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주기도문 / 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시지 않은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나라의 말씀이 아니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그러나

땅에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거시기는 단 한 방울도 내려주시지

않으셨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고 있는 자들을 모르는 척하고 있듯이

우리의 모른 척하는 죄를 눈감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 설 수 있을 때까지는

몇 만 년이라도 우리의 시험이 계속되게 하여 주시고

다만 어느날 우연히 악에서 구하려 들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해지고 있사옵니다, 언제나 출타 중인 아버지시여

아멘

 

 

주기도문, 빌어먹을 / 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 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서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치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 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아멘

 

 

컴퓨터 주기도문 / 박남철

일반 하드 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가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운영체계에 임하시오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모니터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데이터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가 바이러스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정전에서 구하시옵소서,
대개 컴퓨터의 자료와 게임들이 인터넷에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

 

 

시인연습 / 박남철

 

나도 한때는 詩人이고자 했었노라. ㅎㅎㅎ

굉장히 열심히 세수도 않고 다니고

때묻은 바바리 코우트의 깃을 세워 올리면서

봉두난발한 머리카락의 비듬을 자랑했거니,

이미 내 등이 꺼꾸정하게 굽은 뒤에

형사 콜롬보가 기막힌 포옴으로 수입되었었노라

 

무엇인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한시라도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먼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만을 바라보는

내 순수 고독의 시선하며

그것을 담은 詩展 팜플렛을, 오호호

저 무지 몽매한 중생들에게

노나 주었었노라

 

항상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우주와 평화를 걱정하면서

 

尹東柱의 혈서를, 에즈라 파운드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었노라

 

어디 나도 한번 머엇있게 살아 볼려고

오른손을 번쩍 번쩍 치켜 들면서

인생이란 뭐 다 그런 거라고, 아무 때고 간에

떠나고 싶을 때 혹 떠날 수 있는 거라고

목에 힘 꽉 주어 엄격하게 단언하면서

귀족처럼 우아하게 酒店 할미집을

들락거렸었노라

 

때로는

끓어오르는 詩興을 가누지 못하여

별로 인적이 뜸하지 않은 오솔길을

홀로 사색에 잠겨 비틀거리곤 했었노라

 

납작하니 짓밟힌 꽁초를 주어 피우면서

李小龍이처럼 절묘한 비명을 질러댔었노라.

아카 ! 아카카카 !

 

아아 , 근데 누가 뭐 신경이나 좀 써 줘야지

태산 明洞에 서일필이더라, ㅍㅍㅍ

 

좌우지간 나도 한때는 굉장히 열심히

詩人이고자 했었노라

 

 

1979 문학과 지성사로 등단한 박남철 시인은 황지우와 더불어 해체시의 선두 주자로 불리고 있는 시인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모든 금기를 해체하는 해체시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수사나 시의 구조보다는 형태 파괴, 풍자,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독자놈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관계까지 파괴하는 파격을 보여주었으며,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박남철을 "문법 해체를 통해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평가했다.

여섯 번째 시집인 바다 속의 흰머리뫼 2005년에 경희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이것은 박남철 시인이 등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받은 상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박남철 시인, 그가 갔다. 우리 곁을 떠나갔다. 1980년대 해체시의 거목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문단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가 여러가지 일화를 남겨두고 시세계를 영원히 떠나갔다.

생전 술을 좋아했던 그는 신장기능 악화와 요독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지난 3월부터 모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지금까지 투병하던 끝에 끝내 사망했다.

 

 박남철 시인은 195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하였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1979 문학과 지성 겨울호에 시 연날리기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하였으며 그가 남긴 저서로는 시집으로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1984) 반시대적 고찰(한겨레, 1988 / 세계사, 1999) , 러시아집 패설(청하, 1991)자본에 살어리랏다(창작과비평사, 1997), 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사, 2005), 1(문학수첩, 2009)과 시선집 생명의 노래(문학세계사, 1992) 와 박덕규와의 공동시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청하, 1982)와 박남철 비평시집 용의 모습으로 (청하, 1990)가 있다.

 

20140302-2021112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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