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는 손 - 예쁜 손, 고운 손
출판계의 불황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을 읽지 않아도 할거리,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다. 문자제국이 패망한 지 오랜데 아직 사양산업에 목을 매달고 있는 불우한 동지들이 많다.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글 쓰고 책 내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원시인들이 많다.
책을 사지 않는 이들, 가혹하게 말하면 책 사는 기능이 퇴화되었거나 소멸된 이들이 있다. 그것도 책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하는 이들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매도하는 오류를 감수하며 세태를 지적한다.
비평가, 교수, 기자, 출판 평론가 등이 그들이다. 책 속에 자신의 밥그릇이 있거늘 책 사는 기능이 퇴화해버렸다. 읽어주십사고 증정하는, 쉽게 말해서 갖다 바치는 책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소화하기에도 벅차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공짜다. 공짜에 길들여진 족속들이다.
지인이 낸 책을 증정 받으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출간한 책을 보내오지 않으면 섭섭, 괘씸해한다. 난처한 습관이다. 글 쓰는 이, 출판 시장의 암울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친절한 동업자라면 자기 주머니를 털어 책을 사야 한다. 인연을 소중히 여겨 증정 받았으면 별도로 한두 권 사야한다. 습관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타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나는 책을 낼 때마다 자존심 손상당하지 않을 지인들을 대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책의 내용, 간행 경위, 출판 시장의 실태를 설명하며 전화를 한다. 진땀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저마다 선선히 응대한다. 20권, 10권, 5권씩 주문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니 무척 좋아한다며 감사 인사까지 받는다. 추가 주문하는 이도 있고 아예 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영업사원을 자원하는 이도 있다.
출판사 사장님 왈, ‘와! 선생님 대단하네요. 인생 헛살지 않았네요.'라고 한다. 인터넷의 위력으로 외국에 있는 이도 주문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절감한다.
진리는 유치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책을 사는 습관이 운명을 바꾼다. 매 강의 시간마다, 구입한 책 검사를 한다. 1주일에 한권씩 책을 사라. 읽는 것은 늦어져도 좋다. 사둔 책은 반드시 읽게 된다. 빌린 책은 읽지 않고 그냥 돌려줄 확률이 높다. 빌린 책은 남의 손을 탄 여자 혹은 남자를 만나는 것과 같다. 두 권 읽은 놈이 한 권 읽은 놈을 지배한다. 입에 달고 다니는 강조 사항이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이던 학생들이 차츰 호응한다. 아예 한꺼번에 10여권 사서 한 권씩 검사를 받는 학생도 있다. 단순한 검사가 아니라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곁들여 발표해야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 퍼런 고무인인 있다. 대여점에서 빌린 책 - 바코드 딱지가 붙어 있다. 이런 것은 검사 대상에서 제외다.
공짜 좋아하면 엉덩이에 솔 난다. 지식 공급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부터 책을 사시오. 사서 보시오. 수년 전, 대학로 샘터사 건물 1층 서점에서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가슴 가득 책을 안고 있었다. ‘동업자끼리라도 책을 사줘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특유의 소년 같은 웃음을 지었다. 고인이 된 그의 표정과 말이 아직도 선연하다.
앞에서 언급한 직종에 있는 분들이여! 오피니언 리더라는 그럴듯한 헌사에 헛기침만 하지 말고 지갑을 열어 직접 책을 사시오. 여타의 직종에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고급 비밀 하나 알려드리겠다. 좋은 책을 사서 거래처, 업무상 관계자, 친구, 애인에게 한 아름 안겨도 뇌물이 아니다. 청문회에서도 문제거리가 아니다. 그건 고귀한 선물이다. 선물의 약발은 대단하다. 자신 있게 보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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