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 金起林
여기는 늙은이들의 나라가 아니다.
젊은이는 서로서로 팔을 끼고
새들은 나무 숲에―
물러가는 세대는 저들의 노래에 취하며―
문학사는 과학이라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의 객관적 인식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우선 그 안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의 사건(유파, 작품, 작가, 이론 등등)의 특수성을 붙잡아 끄집어내는 동시에 그 사건의 계열을 한 체계에 정돈해야 한다.
어느 시기에,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학사를 요망하는 기운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은 그 시기의 문학이 자신의 계보를 정돈함으로써 거기 연결한 전통을 찾아서 그 앞길의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요구를 가지기 시작한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어느 사이에 엄정하게 객관적이라야 할 문학사에 시대의 주관적 요구를 침투시킨다. 문화과학의 시대성이란 이런 데서 오는 것 같다.
우리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들려 오는 우리 新詩史 요망의 소리는 틀림없이 수년 이래 시단이 혼미 속을 걸어오던 끝에 어디로든지 그 바른 진로를 찾아야 하겠고 그래서 교훈을 받으며 역사를 우러러보게 된 데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시선은 바로 돌려야 할 데로 돌려졌다. 우리 신시의 역사는 단순한 계기(繼起) 병존처럼 보이는 현상의 잡답(雜沓) 속에서도(모든 역사가 그런 것처럼) 분명히 발전의 모양을 갖추었던 것이다. 긍정과 부정과 그 종합에서 다시 새로운 부정에로 - 이렇게 그것은 내용이 다른 가치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 새로운 가치가 요구되어서는 낡은 가치는 배격되었다.
신시의 여명기로부터 시작한 「로맨티시즘」과 상징주의는 이론적으로는 벌써 20년대의 중품에 끝났어야 할 것이다. 20년대의 후반은 물론 경향파의 시대였으나 30년대의 초기부터 중품까지의 약 5, 6년 동안 특이한 모양을 갖추고 나왔던 「모더니즘」의 위치를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30년대 중품에 와서는 벌써 이 「모더니즘」 아니 우리 신시 전체가 한가지로 질적 변환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변환이 순조로 발전 못 한 곳에 그 뒤의 수년간의 혼미의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탄탄한 발전을 초시작에서 막아 버린 데는 외적 원인과 함께 시단 자체의 태만도 또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소론의 목적은 제1차의 경향파의 뒤를 이어 제2차로 우리 신시에 결정적인 가치전환을 가져온 「모더니즘」의 역사적 성격과 위치를 구명해서 우리 신시사 전체에 대한 일관한 동견(洞見)을 가져 보자는 데 있다. 새삼스럽게 필자가 이 제목을 가린 것은 30년대 말기 수년 동안의 시단의 혼미란 사실은 시인들이 「모더니즘」을 장황하게도 잊어버린 데 주로 기인한 것 같으며, 또 자칫하면 「모더니즘」을 그 역사적 필연성과 발전에서 보지 못하고 단순한 한때의 사건으로서 취급할 위험이 보이는 때문이다. 영구한 「모더니즘」이란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말이다. 다만 그것은 어떠한 역사의 계기에 피치 못할 필연으로서 등장했으며 또한 그 뒤의 시는 그것에 대한 일정한 관련 아래서 발전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론을 가짐이 없이는 신시사를 똑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모더니즘」의 역사성에 대한 파악이 없이는 그 뒤의 시는 참말로 정당한 역사적 「코스」를 찾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신시의 발전은 그것의 환경인 동시에 모체인 오늘의 문명에 대한 태도의 변천의 결과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모더니즘」은 특히 이 점에 있어서 의식적이어서 그것은 틀림없이 문명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져왔다. 이 일을 이해함이 없이는 신시사 전체는 물론 「모더니즘」은 더군다나 알 수 없이 된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문명은 더욱 급격하게 동양제국을 그 영향 아래 몰아넣었다. 일본․중국․인도 등 제국에서 일어난 신문학 - 소설․서양시의 모방을 딴 신체시등 - 은 맨 처음에는 서양문학의 모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 문학의 모체인 문명의 침입에 따라오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렇게 한 색다른 문명의 진행을 따라서 거기는 반드시 거기 상응한 형식과 정서를 가진 문학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문학의 孤高」를 믿는 신도들에게는 놀라운 추문일 것이다. 동양의 젊은 시인들은 벌써 이태백이나 두보처럼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들이 먼저 맞아들인 것은 그들의 재래의 정서에 가장 近似한 「로맨티시즘」과 그 뒤에는 세기말의 시였다. 세기말의 시는 서양에 있어서는 그 문학이 가장 동양에 접근했던 예다. 여기 「시몬즈」와 「예이츠」와 「타고르」가 악수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신시의 선구자들이 이윽고 맞아들인 것은 「로맨티시즘」이었고 다음에는 이른바 동양적 정조에 가장 잘 맞는 세기말 문학이었다. 그런데 이 두 문학은 한결같이 진전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퇴각하는 자세를 보이는 문학이다.「로맨티시즘」의 혁명성은 물론 인정하나 그것의 목표는 잃어버린 중세기의 탈환이었지 결코 새로운 시민의 질서가 아니었다. 「로맨틱」의 귀족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혁명적으로 보이다가도 필경 「칠월십사일」적 돌진에서는 몸을 뒤로 끈 까닭은 실로 여기 있었다. 산업혁명의 불길 아래 형체없이 사라져 가는 城과 기사와 공주의 중세기적 잔해의 완전한 종언에 눈물을 뿌린 최후의 輓歌 시인은 이른바 90년대의 사람들이었다.
은둔적인, 회상적인, 감상적인 동양인은 새 문명의 개화를 목전에 기다리면서도 오히려 그 심중에는 허물어져 가는 낡은 동양에 대한 애수를 기르면서 있었다. 애란의 황혼과 19세기의 황혼이 이상스럽게도 중복된 곳에 「예이츠」의 「갈대 속의 바람」의 매력이 생긴 것처럼 우리 신시의 여명기는 나면서부터도 황혼의 노래를 배운 셈이다. 20년대의 처음에 이르러서는 이들 선구자 및 그 말류들은 벌써 신문학의 건설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돌진하기를 그치고 맞아들인 황혼의 기분 속에 자신의 여린 감상을 파묻는 태만에 잠겨 버렸다.
최초의 반격은 20년대의 중품부터 시작된 경향문학 이론가의 손으로 되었다. 그것은 주로 사상상의 반격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시에 있어서의 19세기」의 문학적 성격이 폭로되어 주로 문학적 입장에서 배격되기 시작한 것은 30년대에 들어선 뒤의 일이다.
「모더니즘」은 두 개의 否定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탈․로맨티시즘」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였다. 「모더니즘」은 시가 우선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과 시는 문명에 대한 일정한 감수를 기초로 한 다음 일정한 가치를 의식하고 씌어져야 된다는 주장 위에 섰다.
① 서양에서도 오늘의 문명에 해당한 진정한 의미의 새 문학이 나온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20세기 속에 남아 있는 19세기적 문학말고 진정한 의미의 20세기 문학의 중요성은 여기 있는 것이다. 영국에 있어서는 「죠지안」은 아직도 19세기에 속하며 문학에 잇어서의 20세기는 「이미지스트」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입체시의 시험 이후 「다다」 초현실파에, 이태리의 미래파 등에 20세기 문학의 징후가 나타났다.
조선에서는 「모더니스트」들에 이르러 비로서 「20세기의 후문학」은 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고 나는 본다. 낡은 「센티멘탈리즘」은 다만 시인의 주관적 감상과 자연의 풍물만을 노래하였다. 오늘의 문명의 형태와 성격에 대해서도, 그것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심정에 일으키는 상이한 정서에 대해서도 완전한 불감증이었다.「모더니즘」은 우선 오늘의 문명 속에서 나선 신선한 감각으로써 문명이 던지는 인상을 붙잡았다. 그것은 현대의 문명을 도피하려고 하는 모든 태도와는 달리 문명 그것 속에서 자라난 문명의 아들이었다. 그 일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신시사상에 비로소 도회의 아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제재부터 우선 도회에 구했고 문명의 뭇 면이 풍월 대신에 등장했다. 문명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새로운 감각 정서 사고가 나타났다.
② 서양에 있어서도 20세기 문학의 특징의 하나는 (특히 시에 있어서) 말의 가치 발견에 전에 없던 노력을 바친 데 있다. 과거의 작시법에 의하면 말은 주장, 음률의 고저, 장단의 단위로서 생각되었고 조선에서는 음수 관계에서만 평가되었다. 말의 음으로서의 가치, 시각적 형상, 의미의 가치, 또 이 여러 가지 가치의 상호작용에 의한 전체적 효과를 의식하고 일종의 건축학적 설계 아래서 시를 썼다. 시에 있어서 말은 단순한 수단 이상의 것이다. 「모더니즘」은 이리하여 전대의 운문을 주로 한 작시법에 대항해서 그 자신의 어법을 지어 냈다. 말의 함축이 달라졌고 문명의 속도에 해당하는 새 「리듬」을 물결과 범선의 행진과 기껏해야 기마 행렬을 묘사할 정도를 넘지 못하던 전대의 「리듬」과는 딴판으로 기차와 비행기와 공장의 소음과 군중의 규환을 반사시킨 회화의 내재적 「리듬」 속에 발견하고 또 창조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더니즘」이 전통적 「센티멘탈․로맨티시즘」에 향해서 공격한 것은 내용의 진부와 형식의 고루였고 편내용주의에 대한 불만은 그 내용의 관념성과 말의 가치에 대한 소홀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집단적 시운동의 모양은 갖지 못했다. 또 위에서 말한 특징을 개개의 시인이 모조리 갖춘 것은 아니다. 오직 대부분은 부분적으로만 「모더니즘」의 징후를 나타냈다. 또 그것이 반드시 의식적인 것도 아니고 시인적 민감에 의한 천재적 발현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하간에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지표를 통해서 우리는 몇 사람의 우수한 시인과 그 시풍을 한 개의 유파로서 개괄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활약한 30년대의 전반기에 있어서 시단의 젊은 추종자들이 압도적으로 이 경향 아래 있었던 사실은 이 시기를 한 개의 특이한 역사적 「에포크」로서 특징 짓기에 족하다.
가령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거의 천재적 민감으로 말의 (주로) 음의 가치와 「이미지」, 청신하고 원시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발견하였고 문명의 새 아들의 명랑한 감성을 처음으로 우리 시에 이끌어들였다. 신석정은 환상 속에서 형용사와 명사의 비논리적 결합에 의하여 아름다운 상징적 「이미지」의 적확한 파악과 구사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김광균 씨, 신석정의 시풍을 인계하면서 더욱 조소적인 깊이를 가진 장만영 씨, 그 밖에 박재륜 씨, 조영출 씨 등등에 이르기까지 일관한 시풍은 시단의 완전한 새시대였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30년대의 중품에 와서 한 위기에 부닥쳤다.
그것은 안으로는 「모더니즘」의 말의 중시가 이윽고 그 말류의 손으로 언어의 말초화로 타락되어 가는 경향이 어느새 발현되었고 밖으로는 그들이 명랑한 전망 아래 감수하던 오늘의 문명이 점점 심각하게 어두워가고 이지러져 가는 데 대한 그들의 시적 태도의 재정비를 필요로 함에 이른 때문이다. 이에 시를 기교주의적 말초화에서 다시 이끌어내고 또 문명에 대한 시적 감수에서 비판에로 태도를 바로잡아야 했다. 그래서 사회성과 역사성을 이미 발견된 말의 가치를 통해서 형상화하는 일이다. 이에 말은 사회성과 역사성에 의하여 더욱 함축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다양해져서 정서의 진동은 더욱 강해야 했다.
전 시단적으로 보면 그것은 그 전대의 경향파와 「모더니즘」의 종합이었다. 사실로「모더니즘」의 말경에 와서는 경향파 계통의 시인 사이에도 말의 가치의 발견에 의한 자기 반성이 「모더니즘」의 자기비판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고 보인다. 그것은 물론 「모더니즘」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고 보여질 근거가 많다. 그래서 시단의 새 진로는 「모더니즘」과 사회성의 종합이라는 뚜렷한 방향을 찾았다. 그것은 나아가야 할 오직 하나인 바른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려운 길이었다. 시인들은 그 길을 스스로 버렸고 또 버릴밖에 없었다. 가장 우수한 최후의 「모더니스트」 李箱은 「모더니즘」의 초극이라는 이 심각한 운명을 한몸에 구현한 비극의 담당자였다. 30년대 말기 수년은 어느 시인에게 있어서도 혼미였다. 새로운 진로는 발견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길이든지간에 「모더니즘」을 쉽사리 잊어버림으로써만 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무슨 의미로든지 「모더니즘」으로부터의 발전이 아니면 아니 되었다.
《인문평론》(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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