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백지연 <배수아, 존재를 증명하는 글쓰기>

미송 2009. 10. 5. 23:46

[문학칼럼] 배수아, 존재를 증명하는 글쓰기

 

백지연 

 

 

 

 

배수아의 신작『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의 신작인『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을 펼치면서 배수아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의 소설이 안겨준 충격은 묘사의 상세함을 이미지의 나열로 대체해버린 데 있었다. 숱한 상품기호와 외래어의 등장, 문법규칙의 무시는 기존의 문학독자들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소설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묘사의 세계가 무심한 상품기호들로 바뀌는 풍경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읽기의 방식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미지 세대의 대표주자로 부각된 이후, 그동안 배수아는 그 틀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소설적 시도를 보여왔다. 최근 작품들에서는 초기작에서 보였던 불안한 문장구조나 강박적인 외래어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용 면에서도 점차 개인의 내면에 관한 추상적 기록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늘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많은 변화의 지점이 엿보이긴 하지만『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고려원 1995)에서부터『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이르는 긴 여정에서 일관되게 찾을 수 있는 배수아 소설의 주제는 '나는 늘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라는 확신이며 예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한 대목을 환기해보자.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늙고 초라하여져서 먼지투성이 국도에서 사과를 팔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야. 그것도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저녁이 되어 아무도 이 푸른 사과를 사러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확실하여질 때까지, 내가 영원히 가지 못할 먼 데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짠 두꺼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있을 것 같은." '길가에서 푸른 사과를 팔고 있던 여인의 무표정하고 건조한 눈동자'가 상징하는 고독의 환상은 운명론적 색채를 벗어나 최근에는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자기보호의 기제가 된다. 고독하고 황량한 삶에 대한 강렬한 환상과 열망은 이제 타인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증명하는 자부심이 되고 있다. 때로 이 자부심은『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이룸 2000)나『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다루어지는 상대적 빈곤과 궁핍의 문제에 이르러 상당히 공격적인 진술로 드러나기도 한다. 주인공이 느끼는 소외와 가난의 콤플렉스는 그 자신이 주창하는 고독의 자부심만큼이나 철저하게 주관적인 감정이다.

 

냉소와 경멸을 자기에 대한 응시로 전환 

결혼이나 가족제도에서 구현되는 속물적 계층의식에 대해 주인공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강한 냉소와 경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두 작품에 비한다면 서술자의 자기 독백이 극단적으로 강화된『이바나』(이마고 2002)와『동물원 칸트』(이가서 2002)의 세계는 이 냉소와 경멸을 자기에 대한 응시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차별되는 작품들이다. 어떻게 보면 독자와의 소통마저도 의식적으로 차단한 듯한 이 작품들은 가장 배수아다운 모습을 드러낸 작품들이기도 하다. 신작인『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배수아의 소설이 보여주는 최근의 행보에 대한 종합적인 자기 해설서라는 느낌을 준다. '핑크의 코튼 가운'이나 '에스테틱 센터' '엘레베이터 걸' '고디바 초콜릿 한 상자'와 '샤넬 립스틱'의 소비적인 이미지들은 이제 자의식을 둘러싼 불투명한 관념 용어들로 변화하였다.『에세이스트의 책상』에는 두려움, 고독, 죽음, 언어에 대한 추상적인 진술이 수시로 등장한다. 그것은『이바나』와『동물원 칸트』에서 본격적으로 노출된 징후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 작품에는 배수아 특유의 감각적인 기억의 이미지들도 등장한다. "내가 숨을 헐떡거리며 층계를 다 올라가 M의 집 앞에 서면 반쯤 열린 문 안쪽에서 오래된 집에서 나는, 말린 오렌지가 살짝 부패하기 시작하는 듯한 가볍고 달콤하면서 야릇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어둠을 만나곤 했다"라는 문장은 배수아 소설이 즐겨 사용하는 감각적 표현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파편화된 기억을 조립해가는 특유의 서술방식을 통해 작가는 이 소설에서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해 스스럼없이 고백하고 있다. 낯선 공간인 독일에서 이국의 언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글쓰기의 욕망을 되돌아보는『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자아의 고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사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벽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더이상 나를 자극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고립이다." 문학의 필요성과 고립의 자부심을 이토록 명징하게 합리화하기도 힘들 것이다. 주인공이 타국의 언어를 배우면서 느끼는 모멸과 소외감은 '고립을 받아들이는 당당한 태도'를 통해 극복된다.

 

고립된 자아에 대한 자부심이 소외와 결핍의 콤플렉스를 어떠한 방식으로 견디게 해주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에세이스트의 책상』은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글쓰기의 욕망이 자기 고립을 정당화해가는, 이 기억의 서사가 주목되는 것은 자신에게 씌워진 문화체험의 틀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변형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출되는 집단적 자아에 대한 맹목적 혐오감, 자기 속에 매몰된 빈곤과 결핍의 체험이 전적으로 공감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호소하는 자기애의 수사학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자아의 본질적인 욕망을 건드린다. 완전한 자기애를 실현할 수 있는 이 밀폐의 공간은 고독한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이름 속에서 충분한 매혹과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창비 웹매거진 /200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