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프로이트의 고고학적 상상력과 문학비평

미송 2009. 10. 6. 09:49

프로이트의 고고학적 상상력과 문학비평

 

 

꿈의 해석』을 출간한 프로이트는 3년 뒤에 나온 옌센의 『그라디바』를 발견하고 놀란다. 이 소설이 그가 역저에서 개진한 꿈의 이론이나 기타 정신분석학 이론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옌센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망상가 꿈』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프로이트는 이 에세이를 통해 그가 발견한 꿈의 이론을 이 작품을 통해서 확인해보려 하였다. 이 에세이는 프로이트의 생애 전반기에 나온 문학비평에 대한 중요한 진술이다.

 

프로이트가 확인해 보았듯이 옌센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시인과 작가들은 과학자들이 꿈도 꾸어보지 못한, “천지 사이의 많은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자는 자신이 아니라 앞서간 시인들이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작가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발언은 문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친화력, 혹은 상동관계를 찾으려는 현대의 정신분석비평 이론가들에게 강한 암시를 준다. 프로이트는 옌센의 문학텍스트에서 꿈과 그 해석의 문제, 억압과 억압된 것의 되돌아옴의 문제, 그리고 고고학적 메타포의 문제 등을 발견하였다. 정신분석학의 고고학적 메타포와 꿈의 매커니즘은 억압과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정신계의 보편적 법칙과 연결된다. 이 문제는 무의식의 기호적 현현 혹은 텍스트적 무의식과 관련되고 욕망의 전략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접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라디바』텍스트에 대해 ‘증상적 글읽기’를 시도했다. 사람의 증상을 통해 그의 무의식을 추정할 수 있듯이, 텍스트에 기호적으로 드러난 ‘텍스트의 증상’들을 심문하여 무의식적 의미를 읽어내려 한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의존한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의 논리였다는 사실에 문학비평적 의미를 둘 수 있다.

프로이트가 옌센의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보여준 기본 태도는 문학과 정신분석학이 겹친다는 것이다. 문학과 정신분석학의 친화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믿음은 그의 뒤를 잇는 현대분석비평가들의 믿음이기도 하다. 현대의 대표적인 정신분석비평 이론가 피터 브룩스는 정신분석비평에 따라붙는 여러 부정적인 이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 문학비평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문학이 정신분석학이고 정신분석학이 문학이라는, 따라서 “인간의 허구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연구와 정신심리 과정에 대한 연구는 겹치는 행위”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그라디바』분석을 통해서 시도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모델을 통해 문학텍스를 읽은 것이다. 모델이란 그것과 유추적 관계에 있는 이종동형의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렌즈’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처음에는 모델이 ‘발견적 허구’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모델에 대한 ‘존재론적 참여’의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이것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문학에 대해서 좋은 모델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정신분석학을 문학연구에 성공적으로 도입할 경우, 전자의 “비교적 잘 조직된 인식영역의 내포된 의미”와 통찰력이 후자의 담론에 스며들어 이것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문학텍스트의 어두운 부분에 빛을 던져주고,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새로운 관련성을 보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의미의 확장, 이런 것들이 문학연구에서 정신분석학 모델을 필요로 하는 요인들이다.

 

의심의 해석학인 정신분석학 모델은 옌센의 텍스트의 표층적 현상 너머를 짚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을 세우며 그 가설을 텍스트에 되돌려 증명해 보임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의 간격이 메워지고 서로 무관하게 보였던 파편의 고리들이 연결되며 무의미가 의미로, 비서사가 서사로 정복된다면 문학비평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말년에 「분석에 있어 구성의 문제」라는 글을 썼다. 그는 분석의 “구성 작업, 혹은 원한다면 재구성 작업은 파괴되어 묻혀버린 어떤 주거지나 옛 건물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과 크게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사용한 ‘구성’과 ‘재구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성/재구성의 말들이 앞에서는 상호교환적으로 혼용해서 쓰이다가 그 후로는 ‘재구성’이라는 말이 탈락하고 ‘구성’이라는 단어만이 쓰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재구성’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역사적 재구성’, ‘고고학적 재구성’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정신분석학의 고고학적 메타포에 강한 집념을 보인다. 반면 그가 ‘구성’이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대치했을 때 그 내포적 의미는 고고학적 메타포로부터의 벗어남을 나타낸다. 잊혀진 과거나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고 그것을 원형 그대로 발굴해내는 것이 분석가의 일이라고 믿어왔던 고고학적 태도와는 달리 “그의 역할은 잊혀진 것을 그것이 뒤에 남겨놓은 흔적으로부터 생성해내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에서는 과거 못지않게 현재가 중요하며 의미의 발견보다는 창조가 강조된다.

 

분석가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독자는 독서행위를 통해 텍스트의 서사적 담론에 참여하면서 그것에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런데 “독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구성적 가설들이 강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때가 있는데 이때가 바로 그 가설들이 텍스트 속에서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관계와 의미의 망을 생성해내고 그럼으로써 서사적 거미줄의 확장을 확인하는 경우다”. 독서현장에서 독자에 의한 텍스트의 구성은 텍스트 내에서의 새로운 사실의 발견, 의미의 확장 등을 통해 그것의 타당성을 확인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