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달마

미송 2009. 11. 23. 22:03

달마 1 / 오쇼라즈니쉬

 

 

불교는 중국에 건너가자 즉시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들은 몇 세기 동안 목이 말랐는데 불교가 하나의 비구름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았다. 그것이 그들의 목마름을 더없이 채워 주었기 때문에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것을 목말라했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어 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다. 6백년 뒤에 달마가 그곳에 갔을 때, 중국에는 이미 3만 개의 절이 있었고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다. 2백만 명의 불교 승려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중국 인구의 5퍼센트에 달하는 숫자였다.

 

달마의 스승 프라기야타라는 달마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깊은 충격을 던져주었으나 그들 중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학자였고, 높은 인격과 수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깨달음에 이른 자는 없었다. 이제 중국은 또다른 고타마 붓다를 요구하고 있었다. 씨를 뿌릴 밭이 준비된 것이다.

 

달마는 중국에 건너가 첫 번째의 깨달은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고타마 붓다가 여성을 자신의 승단에 입문시키기를 두려워한 반면에 달마는 고타마 붓다의 길을 걸으면 서도 여성을 스승으로 받아들일 만큼 용기있는 자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깨달은 자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달마는 굳이 여성을 스승으로 선택했다.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란 여성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자 스승의 문하에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그는 보여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달마의 이름은 깨달음에 이른 모든 불교도들 사이에서 고타마 붓다 이후 두 번째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2백만 명의 불교 승려가 있었지만 달마는 그들 가운데 오직 네 명만이 자신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았다. 달마는 제자를 선택하는 데 대단히 까다로웠다. 그가 첫 번째 제자인 혜가(慧可)를 찾는 데에도 거의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9년이란 세월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달마의 동시대에 기록된 역사서들이 모두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무제를 왕궁으로 돌려보낸 뒤 달마는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중요한 명상수행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벽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벽만 바라보며 줄곧 앉아 있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 벽처럼 그대 마음의 화면이 서서히 점점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달마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난 그를 만나지 않겠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등 뒤에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었다. 달마는 벽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의 등 뒤에 앉아 있어도 그는 결코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벽과 같다. 사람들은 전혀 이해가 없어서, 그토록 무지한 인간 존재들을 바라보는 것은 큰 아픔이다. 하지만 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벽은 그저 벽일 뿐이다. 벽은 원래 듣지 못하니 내 가슴이 아플 이유도 없다. 누군가 행동으로써 내 제자가 될 자질을 증명해 보였을 때, 그때에만 나는 고개를 돌릴 것이다."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행동을 해야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혜가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가 달마를 찾아왔다. 그는 칼을 꺼내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서 달마 앞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이 돌아앉거나 제 머리가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돌아보지 않으시면 제 머리를 잘라서 당신 앞에 던지겠습니다."

 

달마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대야말로 진정으로 나의 사람이다. 이제 머리를 자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 사람 혜가가 달마의 첫 제자가 되었다.


 

달마 2

 

우파니샤드에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한 왕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아야티였다. 그는 100살이 다된 늙은이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어 저승사자가 그를  데리러 왔다. 그러나 늙은 왕은 말했다.  "내 아들 중의 하나를 데려갈 수는 없소? 난 아직 제대로 살아보질 못했단 말이오. 왕국의 일을 보살피느라 너무 바빠서, 나는 이 육체를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소. 날 데려가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오. 다른 사람들과 왕국에 봉사하느라 난 기회를 모두 놓쳤소.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줄 순 없겠소?"

 

죽음의 사자가 말했다.

 

"좋다. 그대의 아들들에게 물어보라."

 그에게는 10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아들들은 이미 교활해졌다. 경험은 사람을 교활하고 계산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16살 먹은 막내 아들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좋아요. 제가 갈께요."  죽음의 사자조차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100살된 사람도 인생을 다 못살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16살짜리야. 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자는 말했다.

 

"너는 너무 어려서 모른다. 저기 99명의 형제는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잖니 ? 저 사람들 중에는 70이나 75살이 된 사람도 있어. 그들은 늙었고 머지않아 죽을거란다. 불과 몇 년이 문제될 뿐이지. 그런데 네가 왜 ?"

 

아이는 대답했다.

 

"아버지가 100년이 되도록 삶을 다 살지못했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100년의 시간이 흘러도 나 또한 다 살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 만으로 충분해요.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거예요. 생명을 통해서는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나는 죽음을 통해서 시도해 보겠어요. 허락해 주세요."

 

이것이 바로 산야신이 "에고를 통해서 살 수 없다면, 나는 에고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보도록 하겠다. 그러니 나를 데려가라!"고 말한 때의 의미이다. 

 

아들이 잡혀간 뒤 아버지는 100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나서 죽음의 사자가 다시 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 100년은 긴 시간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도 다 살지 못했소. 이것 저것 시도해 보고 계획을 짠 후 막 살기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온거요. 이건 너무 하지 않소?"

 

이런 일은 열번이나 반복 되었다. 매번 아들 하나가 나와 목숨을 바치고 아버지는 살아 남았다. 그가 천살이 되었을 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물었다. 

 

"어때? 다른 아들을 데려갈까?"

왕은 말했다.

 

"아니오. 이젠 천년이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소. 시간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문제요. 나는 존재와 삶을 낭비하는데 익숙해져있소. 그래서 시간은 이제 아무런 도움이 안되오."

 

아야티는 다음 세대에게 기억할만한 말을 남겼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천 년동안을 살았지만 나의 마음 때문에 삶을 살지 못했다. 항상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놓쳐 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삶은 현재이다."

 

지금 여기를 즐기지 못하면 당신은 삶을 놓치는 것이다.  초대장은 계속해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곳에 없었다. 그대는 다른 어느 곳에 가 있었다. 그리고서 그대는 자기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대는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비참하게 보인다. 오래사는 사람도, 오래살지 못하는 사람도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없이 모두 비참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레스토랑의 창문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밖에서 서서 비참하게 보이지 말라. 들어와서 실컷 먹어라." 밖에 서있으면 비참한 것이고 안에 들어오면 마음껏 먹는다. 그런데 그대는 지금 비참하다. 마음이 비참한 것이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생이든 여러개의 생이든 그것에는 차이가 없다. 문제는 그대가 지니고 다니는 바로 그 마음이 장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 그 마음을 버려라.

 

 

달마 3

 
어느 이른 아침 붓다가 아침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 붓다는 그의 눈을 잠시 들여다 보며 말했다. "아니다. 신은 절대로 없다. 결단코 있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치워버려라."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붓다를 항상 따라다니는 아난다에게마저 붓다의 방금전 그 대답은 너무 노골적이고 잔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가 붓다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붓다의 얼굴은 너무나 자비스러웠다.


같은 날 오후 다른 사람이 와서 신은 존재하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렇다. 신은 있다. 신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보라." 아난다는 매우 당황했다. 아침에 붓다가 말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묻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해질 무렵에 찾아왔다. 붓다는 나무 밑에 앉아 저녁 노을의 아름다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람이 물었다. "신은 있습니까?" 붓다는 단순이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사람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속에 앉아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났다. 해가 졌다. 그는 붓다의 발을 만져주며 말했다.

 

"응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하고는 떠나갔다.


이제 아난다는 피가 끌어올랐다. 거기에 아무도 없을 때 아난다는 물었다.

"당신께서 대답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오늘밤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날, 같은 질문에 당신께서는 세가지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없다고 하였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당신께서는 소박한 사랑으로 그렇게 앉아 눈을 감으라고 몸짓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을 만졌고 또한 당신의 응답에 고마움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에 있었을 때,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어떤 응답도 네게 주어진 것은 없다. 왜 네가 어리둥절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질문이었고, 나의 응답이었다. 너는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난다는 말했다. "저는 귀먹어리가 아닙니다. 저는 거기에 있었고 단지 듣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세가지의 응답이 저를 계속 혼란하게 합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 첫번째 사람은 유신론자였다. 그는 정말 묻기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의 믿음을 내가 뒷받침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을 믿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붓다 또한 믿는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매우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관념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학자였다. 경전을 둘둘말아 외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속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망치처럼 잔인하고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들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격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누구의 믿음도 뒷받침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은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 역시 학자였다. 그는 모든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번째 사람과는 정반대 였을 뿐이다. 그 또한 같은 목적으로 왔었다. 그 둘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서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같았다. 그는 나에게 그의 불신앙을 옹호받고자 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오직 신만이 있을뿐 다른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그의 불신앙을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참된 탐사자였다. 그는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원했다. 그는 질문하러 온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관념도 편견도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문을 열고자 왔었다. 그는 나에게 상처받고자 왔다. 그는 지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드러내줄 것을 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그에게 내옆에 앉으라 고 말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당신께서 옳았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깊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언젠가 무엇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붓다와 같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어마어마하게 진귀한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침묵에는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대가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의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올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욕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그대는 순결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먼지가 그대의 거울에서 사라지게 될것이다. 그대의 눈은 선명해 질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내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해답을 받았다. 그의 침묵속에서 모든 해답중의 해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절하면서 발을 만지면서 고마워하였던 것이다.

 

이글은 <달마대사의 선화(관음출판사, 길연 역)>에 나오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