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오쇼의 장자 강의 3

미송 2009. 11. 29. 08:55

도의 사람은 장애물이 없이 행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남을 상처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재물을 모으고자 애쓰지 않으며

그렇다고 청빈의 덕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남에게 의존함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또한 홀로 걸어감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도의 사람은 알려짐 없이 머물러 있다.

완전한 덕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진 것이 진정한 자아.

가장 위대한 자는 아무도 아닌 자다.

 

-<도의 사람>

 

마음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 거의 불가능한 일은 중간에 머무는 일이다. 균형을 이루는 일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움직여가기는 쉽다. 언제나 하나의 극단에서 반대편 극단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이것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명상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음의 본성은 한 극에서 반대편 극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마음의 불균형에 의존한다. 그대가 불균형을 이루면, 그때 생각도 사라진다. 생각은 병과 같다. 그대가 불균형일 때 생각이 그곳에 있다. 균형을 이룰 때 그 곳에 생각은 없다.

 

그래서 과식하는 사람은 금식을 하기 쉽다. 이것은 얼핏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금식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음식을 탐하는 사람만이 금식을 행할 수 있다. 금식을 행하는 것은 곧 반대편에서 음식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변화할 것이 아니다. 그대는 여전히 음식을 탐하고 있다. 전에 그대는 탐식했었다. 이제 그대는 배가 고프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그 반대편 극에서 음식에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성에 탐닉하는 사람은 쉽게 금욕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은 올바른 양의 식사를 하기가 어렵다. 마음은 한 가운데 머물기가 어렵다. 왜 중간에 머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그것은 곧 시계추와 같다. 시계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반복 운동을 멈춘다. 시계추가 오른쪽으로 이동할 때 그대는 단순히 그것만을 보지만. 실제로 시계추는 왼쪽으로 이동하기 위한 반동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점점 움직여 갈수록 시계추는 왼쪽으로 반대쪽으로 움직여 가기 위한 더 많은 에너지를 모으는 것이다. 과식하는 것은 곧 금식하기 위한 반동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성에 탐닉할 때마다 브라마차리야. 곡 성을 초월한 존재가 마음에 끌릴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 첫번째 기능은 이것이다. 한 곳으로 움직여갈 때마다 그대는 또한 그 반대현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는 숨겨져 있고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곧 그를 미워하기 위한 반동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친구만이 적이 될 수 있다. 먼저 친구가 되지 않으면 갑자기 적으로 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이들만이 말다툼을 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미워할 수 있는가? 왼쪽 끝까지 이동하지 않고서 어떻게 오른쪽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연구는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친밀한 적대관계라고. 이 말은 모순되고 비논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논리는 피상적이고, 삶은 더 심오하다. 삶 속에서는 온갖 반대되는 것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것들은 함께 존재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때 비로서 명상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중략>

 

때때로 그대는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접촉을 잃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그에게로 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가 그곳에 있을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배가 비어 있을 때는 축복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고유한 본질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쏟아 부어질 뿐이며, 그것이 바로 삶의 숨결이다.

 

어디에서나 환희의, 축복의 비가 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대는 그토록 불행하고 목마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대는 정말 불가능한 일을 해왔다. 빛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대는 어둠 속에 살고 있다. 죽음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대는 계속 죽어가고 있다. 삶은 축복인데, 그대는 지옥에 있다. 그대는 어떻게 그렇게 해 왔는가? 분리를 통해, 생각을 통해 그렇게 해왔다. 생각은 분리와 분석에 의존한다. 분석과 구분이 없을 때 명상이 시작된다. 모든 것이 종합되고 하나가 되었을 때. 

장자는 말한다.

 

도의 사람은 장애물이 없이 행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남을 상처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알지 못한다.

 

그대가 이미 그대 자신을 해쳤을 때만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은 중요한 비밀이다. 자기 자신을 해친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그대는 해를 끼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대를 통해서는 해치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날 수가 없다. 상처를 갖고 사는 사람, 번민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다른 이들에게 많은 비참함과 번민만을 안겨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갖고 있는 것만을 줄 수 있다.

 

<중략>

 

장자는 말한다. 도의 사람은 그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존재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그가 비폭력 정신을 키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동정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자다운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을 멈추었기 때문에 남을 상처 입힐 수가 없다. 그는 상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에서나 비행위에서나 오직 기쁨만이 흘러나온다.  

  

도의 사람은 많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가장 본질적인 것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면 그는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으로서 더없이 만족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움직여 갈 필요가 없다. 그의 행위는 마치 행위하지않는 것과 같다. 그는 행동하지만 행하는 누군가가 없다. 그는 빈배, 바다 위를 움직여 가는, 어디로도 향해 가지 않는 빈 배다.

 

도의 사람은 내면 세계의 귀족이다. 그는 조화를 이루고 있고, 어떤 전시 효과도 없다. 그대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순수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성자의 눈 속에서 비난을 발견한다면. 그는 이제 막 부자가 된 사람이고 아직 내면 세계의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 두라.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 자신을 알 수가 없다. 자신을 알 때마다, 그 자신은 이미 그대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 그대와 분리된 무엇이다. 자신은 언제나 아는 사람이지 결코 앎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자신을 알겠는가? 그대는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끌어내릴 수가 없다. 나는 그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 보는 자가 되며 누가 보여지는 대상이 될 것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은 다른 것들을 아는 그런 방식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보통의 감각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는 자는 항상 초월하고 비약하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고대 인도의 경전)는 말한다. 네대, 네티, 그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그대가 무엇을 알든 그대는 그것이 아니다. 그대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든, 그대는 그것 또한 아니다. 그대는 아는 자이며, 이 아는 자는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순수함이 그대 내부의 본성에서 나온다면 그대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라면 그대는 그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삶의 진정한 호흡이 아니다. 그 순수함은 키워진 것이며 키워진 순수함은 추한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면, 내면 세계가 진정으로 풍요롭다면 그대는 과시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대는 늘 누군가가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바보라고 생각하면 그대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대를 바보라고 생각하면 그때는 자기 확신이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대를 바보라고 계속해서 말하면 조만간 그대는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속지 않는다. 그는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미치광이로 알려진 한 지혜로운 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누구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이름도, 그 어떤 것도. 그는 다만 광인이라고만 불렀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유태 민족은 소수의 진정한 현자를 키워 냈다. 그들은 어떤 내적인 원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중략>

 

종교적인 밤, 이스라엘의 축제날인 욤 키푸르나 그 밖의 다른 축제날이 되면 유태인 사회 전체가 두려워했다. 이 미친 랍비가 어떻게 할지, 그가 그곳에 나타나서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의 기도 역시 미친 그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재판관들을 불렀다. 열 명의 배심원들과 함께 유태인 재판관을 소집했다. 랍비가 불렀기 때문에 재판관이 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난 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친구, 신을 벌 줄 방법을 결정하도록 하라. 신이 불공평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든 논거를 내가 제시하겠다." 재판관들은 매우 두려웠지만,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는 회당의 지도자인 랍비였기 때문이다. 랍비는 법정의 법관처럼 고소문을 작성했다. 그는 말했다.

 

"신이여, 당신은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포기하는 방법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당신은 우리에게 욕망을 주었다. 그런데 당신의 교사들은 계속 와서 말한다. 욕망을 버리라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욕망을 만들어 보냈기 때문이며 진정 죄인은 당신이다." 재판관들은 어떻게 결정을 내렸는가? 그는 옳았다. 그러나 법정은 이 사람이 이제 완전히 미쳤으며 회당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한 것은 진실이었다. 그는 신을 그토록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과 나'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토록 그는 신과 가까웠다. 그는 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제 충분하다. 그만 멈추라. 더 이상 바보짓을 하지 말라. 그는 신을 그토록 사랑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불렀을 때 신은 즉시 멈추었다고 한다. 신은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자 한 천사가 신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멈추십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신이 말했다. " 저 광인이 기도하고 있다. 난 들어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형식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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