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달마이야기 <아리따운 소녀(少女)의 미소(微笑)>

미송 2009. 11. 29. 09:27

아리따운 소녀(少女)의 미소(微笑) - 달마이야기

 

 

아침 해가 막 솟아 올랐다.

 
눈부신 햇살이 총림고찰(叢林古刹)을 오색 찬란하게 물들인다. 거기에 더하여 신비로운 독경 소리가 울려퍼지니 천상사의 아침은 청신(淸新)하고도 유장(幽長)했다.
 
조약돌을 오밀조밀하게 깔아 놓은 오래된 길을 따라 두 젊은이가 걷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보리다라, 바로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이는 사매 막의다. 막의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평민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싸워나가는 총명과 의지를 두루 갖춘 여자였다. 절에 들어 온 것도 그 때문이었고 수련도 이미 어떤 경지를 이룬 상태였다. 그녀는 보리다라보다 입산이 훨씬 앞섰다. 그러나 해탈을 구하지 않고 무술만을 연마했다. 따라서 경전공부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무술만은 아직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보리다라가 천상산에 들어온 이래로 두 사람은 사형과 사매로 금새 가까워졌다. 늘 함께 기예를 연마하면서 그림자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보리다라는 은근히 막의의 기량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걸음만 재촉했다. 뒤따라오는 막의가 그저 대견스러웠다.
 
“꽥―!”

갑자기 숲 속에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쏜살같이 보리다라의 머리 위로 날아와 크고 뾰족한 부리로 탁 쪼고 괴성을 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독수리의 괴성은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막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리다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 싶어 가슴 한 구석이 고동쳤다. 그녀는 보리다라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태연자약했다.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막의는 눈을 돌려 날아간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독수리는 부리에 커다란 벌레 한 마리를 물고 막 고목나무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보리다라의 옷깃에 떨어진 벌레를 발견한 독수리의 번개같은 먹이 잡기가 한바탕의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웃으면서 보리다라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사형! 산길이 울퉁불퉁하고 주변엔 벌레도 많으니 신경 좀 쓰셔야겠어요….”
 보리다라는 엷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대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다.
 “사매! 내 한 가지 묻겠는데…, 아직도 무슨 세속적인 것에 미련을 갖고 있나?”
 
대답 대신 막의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코 세속을 떠나 정토에 귀의할 생각이 없었다. 무예를 배우는 것도 세상에 나가서 나라와 백성에게 헌신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녀는 진작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리다라가 이 곳에 들어오자 마치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어떤 계급에 속하며 출생지가 어딘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착한 생김과 정중한 품성 그리고 다재다능한 능력은 그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를 향한 그녀의 감정은 마치 깊은 산 속에서 솟는 샘물처럼 콸콸 흘러들어 가슴 속 깊이 굽이치고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생각을 확실하게 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막의와 함께 무공을 익히는 이외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불경을 탐구하는 데 바쳤다. 경전과 불법을 말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위대한 불조(佛祖)의 환생인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자기의 마음을 보리다라에게 밝히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의치 않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인연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에 그의 그림자는 지워지기는커녕 더욱 깊게 인각되었다.
 
막의는 자기 앞에 우뚝 선 사형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감정의 샘물이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오름을 느꼈다. 간절하고 뜨거운 물결에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사랑을 쏟아 붓고 싶었다. 그리고 둘이 손잡고 이곳 천상사를 떠나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골의 전원으로 가서 자그마한 무릉도원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지(理智)의 냉각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그녀의 열정을 식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머리에 떠올렸다. 평민계급의 여자가 감히 헛된 꿈을 꾸다니? 그녀는 사랑 때문에 그에게 누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사형! 시간이 꽤 흘렀네요…. 아침 수련을 시작해야지요.”
보리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문을 지나 두 갈래 길이 나타나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때 행자승 하나가 헐떡이며 막의를 찾았다. “발타(跋陀)대사께서 오시랍니다.”
“나를?…”
막의는 뜻밖의 부르심에 놀랐다.
“예, 지금 정사(精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의는 한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혹시 대사께서 나의 속마음을 알아채시고 절에서 나를 내보내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발타대사께서 하신 말씀이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무술공부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 너는 이미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느니라! 만약 선(禪)을 수행할 마음까지 먹은 게 아니라면 떠나고 싶을 때 자유로이 떠나도 좋으니라….’
 
막의는 무거운 마음으로 정사 앞에 섰다. 대사를 향해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 부르셨습니까? 무슨 가르침을 내리시려는지요?”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발타대사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막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서 서재의 책상 서랍을 열고 보자기에 싼 꾸러미 하나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펼쳤다.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은 모두 번쩍번쩍하는 보석들이었다. 발타대사는 막의에게 물었다.
 
“이 보석들은 행자승들이 청소를 하다가 보리다라의 침대 밑에서 발견한 것이다!… 너와는 매우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아는데…, 혹시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
“저….”

막의는 대답할 말을 잊은 채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그는 사형·사매의 관계에서 조금도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매우 친하게 지낸다고 하시다니? ‘매우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이지만 겉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런 보석들을 일찍이 듣도 보지도 못했다. 하물며 이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걸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막의의 두 입술은 한동안 붙었다 떨어졌다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한마디 말도 쏟아내진 못했다.
 
“너도 모른단 말이냐?”
발타대사는 되는대로 보석을 싼 다음 다시 한번 막의에게 다짐받듯 물었다.
“그가 평소에 보석에 관한 일을 너에게 한 번도 말한 일이 없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적은 전혀 없습니다!”
막의는 감히 말했다.
“심지어는 그의 출신성분이나 경력조차도 모릅니다. 물을 필요도 없었구요.”
 발타대사는 막의가 귀여운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는 부귀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막의는 이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반발하듯 대꾸했다.
 “부귀한 사람이라고요? 아닐 겁니다. 그는 부귀에 관해선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
 
발타대사는 막의의 말에 수긍이 가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한동안 망설인 끝에 말했다.
 
“듣자 하니 남천축 향지국의 셋째 왕자가 궁을 떠났다는구나. 보아라! 이렇게 많은 진귀한 보석은 일반 민간에서는 극히 보기 어려운 것이다. 혹시 그가….”
 
“그가 셋째 왕자라구요?”
막의는 깜짝 놀랐다. 순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말 그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발타대사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행자승들이 한 이야기인데…, 얼마 전 조정에서 관원이 절에 온 일이 있었다는구나. 도 혹시 착오가 있을까 염려스러워 향지국에 행자승을 파견해 조사해 오도록 했다. 확실히 셋째 왕자는 무술을 익히고 선수행을 하기 위해 궁을 떠났다는구나!”
 
“아!”

막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그제야 그녀는 마음 속에 짚이는 게 있었다. 보리다라 사형은 향지국의 왕자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의 몸으로 궁성 안에서 존경받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산야의 총림에 묻혀 고생하며 수련에 매진하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이 왕자 사형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감정이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대사님! 저더러 가서 그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다. 남이 말하고 싶지 않는 걸 캐묻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도 우리 불문(佛門)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일이니라. 그저 자연의 순리에 맡기도록 하자. 하지만 지금 보리다라가 쓰고 있는 방은 너무 낡았으니 내 생각에는 선방(禪房)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보석은 우선 네가 갖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돌려주거라!…”
 
막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 보자기를 건네 받았다. 그녀는 대사께서 보리다라의 거처를 옮겨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사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소동이 벌어질까 염려스러워 미리 보안 조처를 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발타대사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정사를 나왔다.
 
절 안의 선방은 본당의 안쪽에 있다. 한 칸씩 단칸방으로 되어 있어 그윽하고 조용하다. 이 곳은 큰제자들의 거실로도 쓰이며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지금까지 보리다라가 쓰던 방은 요사채로 본당 밖에 위치한다. 이곳은 일반 스님들과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처다. 요사채에서 선방으로 옮겨 가는 것은 한 단계 승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자나깨나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막의는 총총히 뜰을 가로질러 선방을 찾았다.
 
뜰 앞에는 보리수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었다. 막의는 보리수를 무척 좋아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 끝에 마침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그녀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나무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 즉 곧은 줄기와 맑은 기운으로 윤기가 감도는 잎새는 그녀를 황홀케 했다. 보리수의 푸른 잎을 보고 있으면 순박함과 고결함 그리고 탈속의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 보리수의 그런 특성은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게다가 ‘보리’라는 두 글자가 들어있는 나무 이름은 사형 ‘보리’다라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피부에 와 닿는 가까움을 느꼈다. 어떤 땐 보리수를 사형의 화신인 양 착각하기도 했다.
 
막의는 보리수 옆을 지나면서 발타대사가 한 말을 새삼스럽게 곱씹었다. 대사께서 사형을 선방으로 옮겨준 것은 너무나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상념에 빠졌다. 때마침 보리다라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선방에서 뛰어나왔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정면으로 부딪쳤다.
 
보리다라는 황급히 물러섰다.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사매…, 내 불찰을 용서하시오!”
그는 합장하며 사과했다.
“….”
황망하기는 막의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일에 두 볼이 발개졌다. 보리다라의 사과에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러나 곧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오히려 제가 주의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제 잘못인데 사형께서 사과하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한데, 사형께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나오시다니….”
 
사실 두 사람이 이처럼 부딪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보리다라는 무술이 출중한 막의가 자기를 피하지 못한 것을 내심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사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예….”
막의는 보자기를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대사님의 명을 받들어 사형의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이라고?”

보자기를 보는 순간 그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열어 볼 것도 없이 보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석들은 급할 때 요긴하게 쓰라고 부왕(父王)께서 사람을 시켜 몰래 보내온 것이었다. 궁성을 떠날 때 보리다라는 몸에 지닌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생활하는 데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불문(佛門)의 자비로움에 늘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이 보석이 사람의 눈에 발견될까 싶어 무척 신경을 썼다. 만약 그렇게 되면 왕자의 신분이 탄로날 뿐만 아니라 일대 소란이 벌어져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요사채의 침대 밑에 깊숙이 감췄다. 평소 행자승들이 청소할 때도 그곳만은 지나치는 것을 확인까지 한 터였다. 이렇게 사매가 보따리를 들고 오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보리다라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선방으로 옮겨 준 까닭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발타대사를 찾아가서 다시 요사채로 돌려 보내 줄 것을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아직은 여러 사형들과 함께 수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대사께서는 모든 비밀을 아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눈앞에 서 있는 사매도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가 염려하던 일이 마침내 터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향지국 같은 큰 나라의 왕자는 작은 나라의 왕과 같은 신분이다. 어찌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서슴없이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신분이 드러나 이곳 사찰 안팎에 소문이 퍼지면 모든 사람들이 어려워 할 것이고 만나기조차 두려워할 것이 뻔하다. 평소 그의 잘못을 거리낌없이 지적해 주던 사매마저도 그를 경원할 듯 싶어 안타까웠다. 사실 이런 모든 것은 전혀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보리다라는 막의를 흘깃 보면서 아무 말도 없이 보따리를 받았다.
 “사형! 당신은…?”

이미 내막을 알고 있는 막의는 여전히 의혹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큰 나라의 왕자라면 무엇이든 부족한 게 없을 것이고, 근심걱정 또한 없을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휘황찬란한 보석을 몸에 걸치고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한데, 무슨 까닭으로 속세를 버리고 이곳 깊은 산 속 절간으로 들어온 것일까. 만약 그가 정말 왕자라면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도 여기서 접을 수밖에 없다. 천박한 평민계급의 딸이 어디 감히 왕자를 마음 속에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보리다라는 막의의 이런 마음 속 흐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코 목석이 아니었다. 그녀를 끔찍하게 생각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평민의 딸이라곤 하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구태여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애정이 끓어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오래 전에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굳게 지키기로 다짐한 그였다.
 
사실 그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성군이 되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를 잘 하더라도 그것이 만백성을 제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불법(佛法)만이 무량하여 진리의 비를 두루 뿌려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속의 생각을 끊어버리고 진지하게 수행에만 전념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보리다라는 왕자라는 신분이 노출된 이상 여기서 더 머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막의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사매! 그대가 이미 모든 것을 알았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다만,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소!”
“사형은 정말로 왕자이신가요?”
막의의 말투는 이미 극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왕자라고 해서 달라질 게 뭐 있겠소.”
“어쩐지….”
“사매!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왕자라고 해서 그대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오…. 나는 직….”
“그만 하세요!”

막의도 보리다라가 왕자라는 신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감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요…. 아직도 나를 사매로 생각하시나요?”
보리다라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사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저는요?…”
막의는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마치 바람에 너울거리는 촛불처럼 춤을 추었다. 그 웃음소리는 그의 마음 속에 긴 여운을 남기며 퍼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여전히, 한 사람은 선방문 안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선방문 밖에 선 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시간은 멈추어 선 듯 싶었다. 예불을 올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실려 온 종소리는 두 남녀의 귓가에 울려 맴돌았다. 종소리 하나하나는 이윽고 그들의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온몸은 종소리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사매!”
보리다라가 정적을 깼다. 그리고 막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렇게 진지하게 그리고 뚫어지도록 쳐다본 일은 일찍이 없었다. 막의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여기서 오래 머물면서 사매와 함께 무술을 닦고…, 경전 공부도 할 작정이었소…. 그런데 내가 왕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소…. 왕자라는 나의 신분 앞에 모두가 허리를 굽히는 천박함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소…. 심지어 발타대사조차도 특별 대우를 하시다니…. 분명,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뭐 어때서요? 본래 마땅히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막의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본래 이래야 된다고?”
보리다라는 큰 소리로 웃었다.
 “왜 이래야만 되지? 사매! 일이 이렇게 된 바엔 나는 역시 궁으로 돌아가서 왕자노릇이나 할 수밖에 없겠어…. 번거로운 일이지만… 이 보석은 대사님께 전해 주었으면 좋겠어…. 절 안에서 피우는 향을 사는 데 쓰시도록….”
 “궁성으로 돌아가시려고요?”
막의는 건네받은 보자기 속의 보석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본래 이래야 된다고 하지 않았소?”
보리다라는 가슴을 젖히면서 짐짓 큰 소리로 웃었다.
“사형! 우리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지도 3년이나 되었으니… 가시는 길에 좀 바래다 드려도 괜찮겠지요?”“좋아요! 고맙소!… 사실 그동안 나의 공부가 이나마 진전을 이룬 데는 사매의 도움이 컸소….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보리다라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정다운 기운이 감돌았다. 막의는 그런 표정을 보자 행복했다. 정겨운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보리다라가 겉으로는 무척 냉정해 보이지만 속으론 다정다감한 인간미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우뚝 솟은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보리다라를 다시 한번 올려보았다. 나무가 사람이고 사람이 나무인 듯 환영(幻影) 속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늘은 까마득했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선방 앞 연못의 맑은 물은 저녁노을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선방 주변을 겹겹이 싸고 있는 숲엔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둥지로 찾아 들었다. 선경이 따로 없었다. 이곳이 바로 선경이다. 선방 앞에 서 있는 보리다라와 막의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 이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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