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家는 獨裁者가 아니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경우
세르반테스의 心思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세르반테스가 나온다.
‘아니, 그 책 옆에 있는 건 또 뭔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는 자의 “라 갈라테아” 여인 이군요’
이발사가 말한다.
‘그 세르반테스라는 친구 몇 년 전부터 나와는 아주 절친한 녀석이지. 시(詩)같은 거보다는 차라리 불행에 더욱 이력이 난 사람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 친구 책은 뭔가 좀 오리지널한 데가 있긴 있어. 뭐 좀 한답시고 하다가는 별 볼일 없이 끝내고 말거든 다음 제2권이 나온다니까 그걸 봐야 얘기가 될 거야. 새로 어디 한번 잘 써서 내면 여태까지 아직 대우 못 받던 처지니 이번에는 어떻게 제대로 성공이나 하는가 보지 뭐…’
신부는 세르반테스의 책을 이렇게 평하고는 이발사더러 당신 집에나 갖다 놓고 보라고 권한다. 세르반테스가 세르반테스를 놓고 놀고 있다. 그 뿐인가?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조차도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 라 만차에 사는 아랍계의 역사적인 시데 아메테 베에헬리가 쓴 것이라고 시치미를 뗀다. 톨레도의 잡화시장에서 우연히 헌 종이 고서를 파는 소년을 만나 산 것이 “라 만차의 돈키호테의 이야기”였노라고 주워섬긴다. 그것도 자신은 아랍어를 몰라서 거기 아랍어를 아는 모로계의 스페인 사람을 만나 건포도 두 말을 주고 스페인 말로 되치게 해서 받아 쓴 게 오늘의 “돈키호테”라는 능청이다.
일이 이쯤 되면 “돈키호테” 2부에서 이런 말이 나올 법한 일이다. 즉 산초가 고향에 돌아와 아내에게 자기들의 딸을 귀족에게 결혼시키게 될 것이라고 점잖게 풍을 떠는 대목이다. 갑자기 세르반테스는 말을 끊고 괄호 속에 이런 말을 집어 넣는다.
(여기 산초의 말하는 투라든지 그리고 밑에 이야기하는 어조로 보아서 – 그의 그 좁은 소견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상하고 어려운 말을 하는데 – 이 이야기를 번역하는 사람의 말이 이 章만은 그냥 익명으로 덮어두자고 해서 여기 그대로 싣는다)
그러니까 세르반테스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또 다시 “돈키호테”의 작자 세르반테스와 장난을 치고 있다. 산초가 촌놈의 말을 쓰지 않고 귀족의 말이나 지식으로 이야기하게 만든 것도 물론 세르반테스와 거기에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그것도 같은 장에서 세 번씩이나) 세르반테스다. 세르반테스의 말은 한마디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를 믿지 못한다면 그가 쓴 “돈키호테”는 또 뭔가?
그렇다. 세르반테스는 자기의 말을 믿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뜻을 깊이 전하고 인류를 구원하고 교도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세르반테스는 민중을 구하기 위해서 잠을 못자는 압박자와 피압박자의 드라마에서 일단 독재를 거부한다. 이것도 저것도 독재다. 민중을 이용하는 것도 민중이나 독자를 깨우치겠다는 것도 모두 속이 들여다보이는 달갑지 않은 독재다.
작가는 全智者인가
내 이야기는 곧 훌리오 코르타타르의 소설의 이야기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은 독재를 거부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얄팍한 풍토에서는 쉽사리 제 3 세계 문학의 공통 문제점과(문학이 경제, 사회의 종속이라고 말하려드는 새로운 종속 이론처럼) 그 중 한 위대한 소설가의 위대한 반체제 운동을 (물론 코르타사르도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실각과 피노체트의 독재에 대해 강력히 항거한 사람의 하나지만) 보기 좋게 보여주려니 기대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야기가 틀린다. 지금 나의 말은 한국 소설가의 독재의식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에 대한 해설이다. 한 사회의 의식은 패턴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재주 좋게 재미있는 기발한 이야기로 날마다 반복되는 TV 연속극이나 그와 비슷한 TV 프로처럼 멋지게 찬란한 작가일 수 있다. 유행가 가수처럼 되도록이면 찬란하게 심심하면 노벨 문학상이나 뭐 신나는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작자는 이거 재미있지? 하지만 그 속엔 인생이 있는 걸세. 생각해 봐. 독자는 나 좀 웃겨줘. 나 좀 재미있게 뭐 신나는 이야기나 하나 들려주란 말일세. 이렇게 시작된 계약이 소설이 된다. 사회 현상에 따라 독자는 우리나라에서처럼 극도로 수동적이 되고 작자는 능동적이다 못해 독재자가 된다. 작자는 정식이와 미쓰 민의 가정 사정, 심리 상태, 뱃속 내부까지 속속들이 알아서 점지한다. 인생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사회를 알고 경제를 알고 민중을 알고 영원한 진리를 알고 그 법칙을 작품 속의 꼭두각시들을 통해 살아있는 것처럼 구현한다. 소설가의 재주란 그걸 어떻게 눈치 안 차리게 잘 구슬려 가지고 재미있게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몇 마디 인생의 교훈을 집어 넣어 독자를 회유하는가 하는 일종의 교조 민주주의식 독재를 쓴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경우는 다르다. 작가도 자유롭고 독자도 자유로와야 하는 풍토가 소설이다. 세르반테스에서부터 시작한 근대 소설은 애초부터 자유의 광장 같은 데가 있어왔다. 세르반테스는 한 성직자의 입을 빌려 <소설은 풀어놓은 글자들(escritura desatada)>, 아니면 <자유로운 글>이라는 소리를 한다. 작가가 작중 인물이 되고 작중 인물이 작가를 비웃을 수도 있고 인간 세르반테스가 작가 세르반테스를 놓고 작품 속에서 논쟁을 벌릴 수도 있다. 심지어 작가가 소설 속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가령 “돈키호테”에서 산초 판사 아내의 이름이 서너 가지로 다르게 나오는 거라든지… 이건 물론 세르반테스의 망각이다) 또 뒤에 가서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변명할 수도 있다. 문학 작품의 심각성이나 진지성은 바로 이 놀이의 성실성에 있다. 소설이 작가가 체득한 진리를 이야기로 엮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속임수이겠는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에 있어서 소설은 한 개성을 일깨워 가는 작품과 작가의 대화이며 투쟁이다. 그는 “마누엘의 책”(Libro de Manue)의 서문에서 말한다.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은 이 책이 처음 시도했던 책과는 같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시도하지 않았던 작품 같은 데가 더욱 많다는 점이다> 즉, 코르타사르의 소설은 작가 자신이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대등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코르타사르의 소설에 있어서의 자유의 요소를 크게 나누어 설명하자면 다음 몇 가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첫째 작가와 작품과의 상호 관계다. 작품이나 작중 인물이 작가의 꿈의 소산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꿈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듯 작품 나름대로의 생리와 연상 작용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는 없는 일이며 또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자동필기법에서부터 인식되어온 시작(詩作)이나 소설작법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오늘의 소설이 시와 가까워지는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하나의 개성으로 존중할 때 “돈키호테”에서 보는 경우처럼 작가와 작중 인물과의 대화도 새로운 자유의 광장의 재미로 등장한다. 같은 이야기를 내용이 시시해지니까 다시 써내려 간다든지 주인공의 이름을 바꿔서 전개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우리는 같은 친구나 사물에 대해서도 때로는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는 편견이나 인상을 수정할 때가 있다. 소설이 자유로와지면 우리 삶 자체가 소박하고 겸손하게 투시 되어진다.
<연쇄적인 사건들(secuencias). 나는 이걸 어떻게 다른 말로 잘 표현 할 줄 모른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 속에 느닷없이 어떤 괴상망측하고 허무맹랑한 연쇄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는 경우를 일컫는 말 같은 것이다. 가령 무슨 전화가 한 번 있더니 곧 아우베르니아에 사는 우리 누나가 찾아온다든지 우유가 화롯불에 쏟아진다든지 아니면 발코니에서 문득 차 밑에 깔린 아이를 보는 순간 같은 거… .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아는 법칙이나 논리 이외의 무슨 또 다른 법칙을 따라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삶 말이다>
코르타사르의 “추적자” (El Perseguidor)의 속에 나오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작품의 주인공인 쟈니와 말다툼을 벌인다. 재즈의 영웅인 쟈니의 일생을 책으로 낸 것이 말썽이다. 쟈니의 비평은 이렇다. <… 허지만 나 자신도 연주할 줄 모르는 어떤 것까지 쓰질 않았다고 불평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다. 네가 그 책에서 나의 진정한 일생은 나의 음반 속에 있다고 하는 말을 썼는데 넌 아주 그걸 사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아.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나 자신도 제대로 연주를 할 줄 몰랐는데, 내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주는 연주를…? > 쟈니와 자니의 음악, 코르타사르와 그의 작품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상의 삶이다.
진실에의 접근과 장난
둘째로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에서 보는 자유를 보자. 이제 작품은 차라리 한 작가가 제시하는 도큐멘터리 영화 같은 것이기를 원한다. 하나의 사건을, 그 사건이 불러 일으키는 상상의 세계까지를 해설 없이 초점을 흐리게 제시한다. 그 영화는 보는 관중의 상상능력과 호기심, 구미 등에 따라 다시 재구성되어야 한다.
/ 민용태(스페인문학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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