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피라미드의 높이
피타고라스는 인간은 철학, 수학, 음악을 통해 정신적 정화(Katharsis)를 이루고 의학을 통해서 육체적 정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영혼은 육체 안에 갇혀 있는데 죽음으로 육체에서 해방된다는 영혼불멸설을 주장하여 플라톤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 주장은 카르마에 오염된 영혼의 정화를 주요목표로 삼은 티벳트의 『사자의 서』의 주장과 같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무한세계의 혼돈(Choas)앞에서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Cosmos)를 부여해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숫자에서 찾았다. 이러한 우주에 대한 미학적-수학적 전망은 플라톤에 이어져 이데아사상으로 발전한다.
피타고라스를 언급하는 이유는 과거의 지성이 ‘무한세계의 혼돈(kaos)앞에서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해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찾고자 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과학적 세계관의 모태가 된 사상인데 언뜻 생각하면 예술과는 반대 입장 같기도 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동시에 서양미학의 원조이기도 하다. 피타고라스는 음향학자이기도 했는데 ‘영혼의 정화’가 음악의 목적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음의 협화協和를 현의 길이의 비례로 설명했으며 음악을 수학형식의 하나로 보았다. 피타고라스의 미학은 "조화는 미덕이다. 건강과 모든 선 그리고 신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주 역시 조화에 따라 구성된다."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십일세기의 과학과 정보의 발달에 따라 세계상은 뉴턴역학의 ‘질서모델’을 넘어 양자역학이나 카오스이론으로 설명해야하는 복잡계의 ‘무질서(암흑질서)모델’에 의존한다. 에너지와 힘의 분포로 보면 세계는 ‘무질서 모델’의 영역이 대부분이다. 암흑공간의 행성이나 지구에서의 생명유기체는 무질서의 힘과 에너지대양에 떠 있는 질서의 ‘작은 섬’들에 비유할 수 있다. 질서와 패턴이란 매우 희귀한 현상이며 고도의 정보와 에너지집중이 배치된 결과이다.
수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말과 글도 세계를 인간의 의식과 질서아래 두고자하는 표현이다. 인간정신의 상징작용인데 세계의 감각과 경험을 기호에 대응시켜 인간의식이 수와 언어의 문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거울역할을 한다. 이때의 거울은 세계를 인식하는 수동과 인간이 욕망하는(바라보고자 하는) 세계를 투사하는 능동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해석한 세계란 인간이 꿈꾸는(욕망하는) 4차원 영화관이란 뜻이다. 높은 질서수준인 의식과 상대적으로 낮은 질서수준인 무의식이 관계하지만 유기체로서의 인간욕망은 세계를 주체의 질서로 바라보고 행동한다.
인간의 욕망과 꿈이 세계에 대한 미의식美意識을 만들어낸다고 정신분석학자들은 말한다. 칸트는 인간정신의 가치지향을 진선미로 보았다. 가치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삶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욕망형식이자 그 반향이다. 가치로서의 진선미는 한 내용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이름인데 칸트에게 있어서 진선미란 자연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과 오성이 선험과 초월론적 통각을 통해 바라보는 인식형식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자연에게 건네는 언어의 메아리이자 욕망이며 가치지향이다.
시는 인간의 언어형식과 미의식에 동시에 관여한다. 시는 시인의 꿈과 욕망이 세계를 시인 자신의 상상력과 언어질서로 해석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시의 미는 시인자신의 개인적인 가치지형과 인간집단정신의 보편미의식이 동시에 작용한다. 언어와 미의식의 형식이 다르다면 시는 타인에게 이해될 수 없는 물건이 된다. 피타고라스의 미학은 ‘조화’였지만 오늘날의 시와 예술의 미의식은 세계를 피타고라스식의 ‘조화’’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부조화’도 ‘무질서’도 세계를 인식하는 다른 방법의 하나로 본다. 그러나 이 경우의 ‘부조화’와 ‘무질서’는 기존 ‘조화’의 양식으로 수용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를 상대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개념이지 엔트로피의 증가로 표현하는 우주의 종말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행성이나 물질, 생명현상으로 표현되는 질서패턴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단은 진선미와 ‘조화’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미학을 대변하는 시들과 상대적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 ‘부조화’의 미학을 드러내는 시들이 공존하는 것 같다. 이번 계간 비평에서는 양자의 시들을 골고루 다루어서 내 나름대로 차이와 비교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1.김상미와 안현미
미스터리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김상미(〈시와 사람〉, 2009년 여름호)
알쏭달쏭 별별 이야기
파멸과 죽음을 물어다 주는 새 부엉이
풍향계가 가리킬 수 없는 방향으로 불어 간 바람
양, 황소, 쌍둥이, 게, 사자, 처녀……
별의 사용 부족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 천문학자가
2단 구구단처럼 외우는 황도 12궁
그때 천문학자의 눈가에서 별처럼 빛나던 물
봄의 대곡선, 여름의 대삼각형
가을의 사각형, 겨울의 다이아몬드
어느 날 불현듯 별을 좇아 수학을 버린 수학자가
아득한 밤하늘에 그리는 별들의 지도 위의 보이지 않는 꼭짓점들
그때 물병을 안고 등장하는 처녀
반인반수(半人半獸)를 사랑한 처녀
울다 잠든 천문학자의 얼굴을 물병자리 별처럼 바라보는
마법처럼, 찰박찰박 물소리를 음악처럼 연주하는
죽음은 없답니다 죽음은 껍데기를 벗는 일에 불과하지요
쿨룽 라마의 잠언을 詩처럼 읊는
전생에는 별들의 궤적을 짚으며 여러 生을 占치던
꼬끼오! 아침이면 닭의 모가지를 치던
-안현미(〈한국일보 [별, 시를 만나다]〉, 2009년 5월 발표)
김상미는 세계가 신비라는 얘기를 불과 6행의 짦은 시안에 담았다. 이 시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 시에 부연한 다음 글이 다 사족 같다. 꽃이 왜 피어나는지, 인간은 왜 태어나는지, 존재와 생명이란 신비함 그 자체다. 동물과 식물은 즉자卽自의 존재이므로 타자(환경)와 자신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타자로 볼 수 있는 대자對自의식이 있어서 자신의 운명을 안다고 한다. 신이 인간에게 이러한 의식을 준 이유는 창조자의 영광과 기쁨을 피조물이 인식하게 함으로서 신/인간이 스스로 기쁘고자 함이라는 기독교적인 해석이 있다. 「미스터리」의 내용과 비슷한 잠언에 ‘인간의 정신은 나비로 태어나 굼벵이로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모두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 말들인데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는 표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안현미는 그야말로 『알쏭 달쏭 별별 이야기』를 이미지의 연쇄형식으로 늘어놓았다. 비약이 심해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지만 이미지들이 주는 아름다운 연상을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종착역에 어느새 도달한다. ‘점성학’이란 별과 사물과 인간이 힘과 인과로 얽혀 있다고 보는 학문이다. ‘하늘의 일은 지상의 일과 대응한다’는 사고에서 황도의 별자리 위치를 따져 인간과 사물의 운명을 재단하고 예언한다. 화자는 “그때 물병을 안고 등장하는 처녀” “반인반수(半人半獸)를 사랑한 처녀”에 자신을 투사한다. 점성학에서는 ‘물고기자리’의 시대가 끝나고 ‘물병자리’의 새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구질서가 물러가고 새 절서가 오는 변환을 안현미는 “죽음은 껍데기를 벗는 일에 불과하지요”라는 티벳라마의 잠언을 인용해 새로 태어나는 자신을 표상하고자 한다. 드러난 상징에는 반드시 숨겨진 상징이 있게 마련이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환상을 동원해 천상의 새 질서를 바라는 시인의 내면에 숨겨진 대극은 무엇일까. 안현미 시인에게 지상의 현실이 어려운가 보다. 시를 많이 읽다보니 나도 시점詩占을 치는 점쟁이가 되간다.
2. 도종환과 안도현
받아들인다는 것
저녁 호수를 볼 때면 나는 받아들인다는 것의 숭엄함에 대해 생각한다 계곡도 산도 오래전 잎을 버린 나무들도 천천히 어둠에 지워지고 하늘 마저 몸을 바꾸는 동안 호수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체념의 표정도 아니고 포기하거나 두려워하는 것과도 다른 호수의 얼굴 저녁 호수는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담담함으로 여명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도 보았다 수식도 허세도 없이 가만히 여는 호수의 눈 고요히 출렁이는 몸짓이 잠시 있을 뿐 과장하지 않는 느낌이 주위를 감싸면서 어둠에서 벗어나오는 표정을 보았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기까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얼음이 어는 밤도 있었다 모든 물결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하얗게 질리며 쓰러지는 밤 호수는 그것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쩌엉 쩌엉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시간은 있었지만 그 소리는 비명과 달랐다 견디고 있는 소리였다
어느 겨울 오후 햇살이 호수에 내려와 수천 개 물살마다 내려와 물살을 타고 놀고 있는 걸 본적이 있다 나는 그 햇살들도 모두 보석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 결빙이었던 것들도 몸을 풀고 함께 건들거리고 있었다 호수는 그것까지 품어 안고 있었다 깊은 곳이 있어서 믿는 데가 있어서 호수는 받아들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종환(〈시에〉, 2009년 봄호)
직소폭포
저 속수무책, 속수무책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필시 뒤에서 물줄기를 훈련시키는 누군가의 손이 있지 않고서야 벼랑을 저렇게 뛰어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오 물방울들의 연병장이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소
저 강성해진 물줄기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고 싶은 게 어찌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소 채찍을 허공으로 치켜드는 순간, 채찍 끝에 닿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적어도 구천 마리의 말이 푸른 비명을 내지르며 폭포 아래로 몰려올 것 같소
그 중 제일 앞선 한 마리 말의 등에 올라타면 팔천구백구십구 마리 말의 갈기가 곤두서고, 허벅지에 핏줄이 불거지고, 엉덩이 근육이 꿈틀거리고, 급기야 앞발을 쳐들고 뒷발을 박차며 말들은 상승할 것이오 나는 그들을 몰고 내변산 골짜기를 폭우처럼 자욱하게 빠져나가는 중이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 저물 무렵 말발굽소리가 서해에 닿을 것이니 나는 비명을 한 올 한 올 풀어 늘어뜨린 뒤에 뜨거운 노을의 숯불 다리미로 다려 주름을 지우고 수평선 위에 걸쳐 놓을 것이오 그때 천지간에 북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기를 해도 좋소 나는 기꺼이 하늘에 걸어둔 하현달을 걸겠소
-안도현(〈시안〉, 2009년 봄호)
독자들이 도종환과 안도현을 잘 알려진 전통 서정시인으로 부른다 .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일이 서정이다. 서정시인이면 됐지 ‘전통’이란 수사는 왜 붙이는가 생각해본다. 어떤 작가이든 그의 사유와 문체는 전통으로 내려온 문화 즉 과거에 빚진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작가는 ‘과거의 문학을 계승해서 현재를 새롭게 한다’라는 온고지신의 시작태도를 견지한다. 일종의 고전주의라 할까. 반대로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작가 개인의 개성이나 상상력으로 과거와 단절 비약한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서정시는 순수자연에 기대어 자신의 정서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작태도를 말한다. 전통의 도덕과 사유에 대한 가치관이 개인의 정서에 반영되어 있고 잘 알려진 보편정서를 말하기에 독자의 호응도가 높다. 도종환은 시인을 포함한 인간이란 ‘호수’처럼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는 眞人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자연과 사물에 거스르지 않는 무애와 자재가 동양의 선비와 수도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정신세계이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불가의 『화엄』이 추구하는 이상을 도종환은 자신의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고 호수/선비적 정신인 경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도종환의 세계를 다소 수동적인 노자의 세계관에 비유한다면 안도현은 상대적으로 능동적인 장자의 호방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직소폭포’는 부안군 진서면의 內변산에 있는 폭포인데 나도 가본 적이 있다. 계류폭포로 높이 20m이상을 비류하여 옥수담에 떨어진다. 내변산 제일 경승景勝으로 친다고 한다. 안도현은 직소폭포를 "채찍“으로 은유했다. ”채찍 끝에 닿은 하늘이 쩍 갈라지며 적어도 구천 마리의 말이 푸른 비명을 내지르며 폭포 아래로 몰려올 것 같소“는 활달한 시상을 드러낸다.
이 구절을 보니 이백의 「망여산폭포」라는 대귀가 생각난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삼천 자 높은 곳의 물이 세차게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 반짝이네)의 명시이다. 시상으로만 보면 안도현의 시상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전통시상에 현대적인 해석을 붙인 부분이 4연의 첫행이다. “삶은 그리하여 기나긴 비명이 되는 것이오”라는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 있다. 초월적인 풍경이지만 이 구절 때문에 인간과 하늘이 경계를 통해 이어지는 확장된 초월 풍경을 낳았다.
3.허연과 이정섭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형제는 같은 둥우리 안에서 어미 새의 사랑을 놓고 싸운다. 먼저 태어난 형은 큰 덩치로 둥우리를 장악한다. 엄마의 사랑을 가진 형에게 둥우리는 세계다.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동생은 할 수 없이 진보주의자가 된다. 먼저 태어나 덩치가 큰 형에게 이기려면 녀석은 둥우리를 부정해야 한다. 둥우리를 긍정하는 건 죽음이다. 그래서 동생은 평등을 외친다. 진보는 늘 성공 아니면 죽음이다. 동생으로 태어난 새가 할 수 있는 건 혁명밖에 없다. 새로운 둥우리를 만들지 않는 이상 그에게 미래는 없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모든 것은 유지된다. 둥우리 안에서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 역사다.
보리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보릿대가 쓰러졌고 시간은 흘렀다.
새들이 하늘을 난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허연 (〈시인시각〉, 2009년 여름호)
그 나라
구름 건들거리고 처음 아이를 잉태했을 때 이웃에서는 싸움이 한창
이었다 보름달은 찌그러져 막 하현으로 전향하는 중이었다 미닫이가 박살나고 밥상이 공중 부양을 했다 신을 믿는 남자는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늦은 봄날이었을 거다 죄 있는 자 먼저 주먹을 들지어니 사랑을 외치는 자 스스로 몸 던질지어니 풀뿌리 뽑혀 나간 텃밭에는 자리공이 시절이었다 공중 부양한 밥상이 냄비와 밥그릇과 결별을 선언한 후 결별이 잉태한 달빛들이 텃밭 근처로 하얀 나신을 집어던졌다
아마 신선한 새벽이었을 거다
사랑으로 이룰 것 하나 없으니 주저 없이 칼을 뽑았다
눈 감은 하늘은 어둠으로 위장한 한낮의 뒤에서 바야흐로 절정에 이른 스펙타클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첫 아이의 울음이 대문을 넘어 하늘의 머리맡을 지나 공동묘지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이정섭 (〈웹진 『시인광장』〉, 2009년 가을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의 영화를 나도 본 것 같다. 남녀의 연애스토리인가 했더니 주제는 아일랜드 혁명이었다. 아일랜드의 고통과 혁명은 다양한 책과 영화의 주제다. 영국의 분리 식민지정책으로 아일랜드에는 카톨릭과 신교의 내전, 영국과의 분리 독립운동등 정치상황이 복잡하다. 척박한 땅이라 역사적으로 가난한 농부들이 많고 막다른 상황에 몰린 사람들은 저항과 혁명에 나선다.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겠지만 허연은 현실의 한계에 처한 형제의 갈등구조를 정신분석학으로 해석했다. 인간의 성격과 운명은 환경(트라우마)의 영향을 받는데 어머니의 사랑(넓은 의미의 사회의 보살핌까지 들어간다)을 받은 자식과 그렇지 못한 자식을 둥지안의 새로 은유해서 대비했다. 사랑을 받은 자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진보주의자가 된다는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자본주의현실에 비추어 사랑을 물질로 바꾼다면 맞는 이야기가 된다. 둥지 안의 새처럼 현실에서는 형제도 부모의 유산을 놓고 싸우는 적이다. 시에서는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고 했으나 생존전쟁에서 이 정도의 양심이 있다면 인간성이 훌륭하다고 봐야 한다.
이정섭은 이웃의 부부싸움을 객관적인 사물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려냈다. “밥상이 공중부양을 하고” “칼을 뽑았다”는 극한 상황이 인간의 시선이 아닌 “눈감은 하늘”의 시선으로 바라본 점이 이 시의 장점이다. “ 죄 있는 자 먼저 주먹을 들지어니 사랑을 외치는 자 스스로 몸 던질지어니” 라는 선악의 시선도 인간이 아닌 자연의 담담한 포즈로 보니 그 절실함이 더 선명하다. 비극적인 인간상황을 희극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이러니다. 아이러니는 타자(자연)가 높은 시선의 위치에서 주체(인간)의 행동과 운명의 어리석음을 보고 쓴 웃음을 웃는 시선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지혜와 인식이 높이 고양됨을 무의식중에 알게된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현실반성과 계몽이 들어간 주제를 무리없이 그려냈다. 감정에 이끌리지 않은 시선의 확대와 집요함 때문이다.
요사이 리얼리즘 시에 자꾸 눈이 간다. 사회를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관심을 보인 톨스토이식의 리얼리즘도 있지만 ‘당대의 문학은 그 시대의 사회구조및 경제적 생산양식을 반영한다’는 마르크스식의 리얼리즘이 한국의 리얼리즘을 대변한다. 리얼리즘은 사회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서 현실에 대한 반성을 유도한다. 문학에서 관념이나 형이상학적 의미를 드러내는 인식의 고양도 필요하지만 시대와 현실의 해석으로 인간의 위치와 운명을 알게 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본다. 문학이 인간정신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볼 때 정신에너지가 한쪽에 치우치면 인간문화는 편협해지고 빈곤해진다. 근래에 상징으로서의 기호와 문학, 인간정신을 생각해보는데 인간의 마음이 표현하는 상징형식은 언제나 대극으로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문학에서 인간과 세계를 드러내는 형식은 다양 할수록 좋다.
4.이성렬과 김윤선
한편, K가 절벽에서 비박*하는 사이 도시에서는
매 순간 수많은 피부세포가 윤회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철학자가
아침에 깨어나 〈그대는 누구신가, 부인에게 물었다.
〈진실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 경구를 가슴 깊이 새긴 젊은 시인은, 돈을 갚지 않기로 결심했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한계에 대해 깊이 연구한 천문학자는 논문조작을 해명하는 기자회견에서 곤혹스런 질문이 시작되자, “거기까지!”라고 외치며 퇴장했다.
술기운에 여자와 밤을 보낸 물리학 조교수는, 물건의 위치의 불확실성 원리에 의하면 그대와 관계한 바가 전혀 불명확하다고 선언했다.
영화 〈메트릭스〉를 본 다음날, 시대정신에 투철한 작가는 신작중편을 원고지에 0과 1, 이진법으로 옮겨 출판사로 보냈다.
*bivouac: 야영
-이성렬 (〈현대시학〉, 2009년 7월호)
언어학개론
발화되는 순간의 의미가 대상과 합쳐지는 순간이
언어라고 소쉬르*는 말했다
랑그와 빠롤의 관계
사과는 사막이 아니므로 붉은 껍질 속 흰 몸
사막은 사과가 아니므로 모래바람 속이지만
사과도 사막이고 싶고
사막도 사과이고 싶고
사람도 사람이고 싶을 때가 있지
출근 길 전동차 문을 박차고 나와
황홀한 가젤사슴의 무리를 따르고 싶어질 때가 있겠지
공원벤치도 사형실 전기의자도 되고 싶고
여자도 남자이고 싶고 남자도 여자이고 싶고
태양도 새벽 세 시의 달이 되고 싶어질 때 있겠지
진공의 어느 한 순간
로뎅의 그이처럼 턱 괴고 돌아 앉은
우주의 푸른 등을 볼 때 면,
날마다 불멸의 태양을 밀어내던 태양의 여신도 그만
자궁을 닫고 싶을 때가 있겠지
누가 다가와 바다여 라고 목 놓아 부를 때
바닥을 들어내며 물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를 바다
'너'이고 싶은 '나'
'나'이고 싶니?'너'
즐거워라 랑그와 빠롤의
아이러니
왜이러니
*소쉬르: 프랑스의 언어학자
-김윤선 (〈현대시〉, 2009년 6월호)
아이러니를 근대문학의 특질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이러니란 발화의 내용이 표면의 뜻과 반대되는 형식을 말한다. 기지機知와 풍자와 상황과 현실이 어긋나는 유머를 포함한다. 문학이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가정하에 인간은 비극으로서 삶을 위로받고자 하며 희극으로서 자신의 여유를 즐긴다고 한다. 산업사회이후 현실이 복잡해져서 아이러니의 문학이 발달했다는 해석도 있다. 문학교과서를 보면 아이러니는 경이(Wonder). 모순과 더불어 역설(Parodox)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역설이란 ‘일상의 세계에서는 모순되는 진리가 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초극된 진리로 드러나는’ 언어형식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드러내는 선문답이나 종교의 진리를 드러내는 상징은 대개 역설의 형식을 갖는다.
이성렬은 범주(Category)가 다른 세계의 진리를 병렬로 묶어 해석함으로서 ‘상황과 현실이 어긋나는 유머를 구사한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아전인수의 해석과 행동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한편, K가 절벽에서 비박*하는 사이 도시에서는」의 표제시는 전형적인 아이러니 시다. 이 시를 희극적 재미로만 느끼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암시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진리라고 여기는 명제들이 현실에서 인간에 의해 오용되는 비극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역설(Parodox)에 주목해 진리자체에 무게를 두는 감상은 독자의 교양과 취미에 달렸다.
김윤선은 ‘언어’를 대상으로 시를 썼다. 나는 언어를 주제로 한 시가 발표되면 유심히 읽어보는 스타일이다. 시인으로서 언어에 대한 고민을 안한다면 그 시인은 언어의 부족을 느끼지 않은 천재이거나 사유와 상상력이 일상 언어의 범주에 머무는 범인일 것이다. 동양에서는 공자의 정명론이 동양의 언어관을 대표한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사물과 사회질서를 목표로 삼았다. 현실에서는 기표로서의 이름이 기의로서의 삶과 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공자도 인정한 셈이다. 김윤선은 소쉬르의 생각처럼 기의가 기표와 맺는 관계가 자의적이며 사회적관습에 묶여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한국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실재의 ‘사과’를 “사과”라는 언어로 배우고 표현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주어진 기호체게를 벗어나 실재로서의 사물이 자유롭게 이름을 선택하고 표현하는 세계를 꿈꾼다. 그 세계는 “사과도 사막이고 싶고”, “공원벤치도 사형실 전기의자도 되고 싶고”의 욕망과 가능성의 세계이다. A=B가 되고 싶은 은유욕망의 세계인데 시의 창작과정에 대한 암시로 볼 수도 있다. 시인의 상상력이 보여주는 즐거움은 여기까지다. 여기서 더 나가 실재의 드러남이 “사과”이며 “사막”이며 “공원벤치”이며 “전기의자”인 무애자유의 전체세계가 언어체계를 벗어난 禪의 세계가 된다.
5. 박남희와 함성호
그 꽃병
그 병에 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관념이다 꽃병과 꽃은 별개이다 다만 그들이 우연히 만날 뿐이다 그 꽃병을 나는 여자라고 바꾸어 말해본다 꽃병이 갑자기 누드로 보인다 사실 꽃병은 늘 누드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누드가 아니다 누드의 조건은 육체에 이목구비가 있어야 한다 꽃병은 단지 이목구비 아래의 허방일 뿐이다 꽃병과 꽃이 만나야 이목구비를 갖게된다 꽃 밑에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관념이다 꽃병이 있으면 된다 꽃병은 뿌리이다 때로는 분리도 가능한 조립식 뿌리이다 요즘 세상엔 조립식이 편리하다 신혼부부도 요즘은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다 조립식 신혼을 꿈꾼다 조립식은 이동이 편리하다 분해가 가능한 만큼 그 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꽃병의 속내는 그냥 캄캄한 것 같지만 사실 좀 음흉하다 때로는 죽은 꽃들도 오래 방치해둔다 종종 꽃과의 이혼을 꿈꾼다 나는 그 꽃병의 정체가 궁금하다 꽃병이 나비를 위한 것인지 세상의 눈(目)을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꽃병에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인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꽃병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이냐고, 근데 꽃병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냥 뾰루퉁하다 그러다 갑자기 꽃병은 히히힝거리며 날개 달린 말이 되어 천마도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의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꽃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꽃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박남희 (〈시로 여는 세상〉, 2009년 여름호)
다시 봄편지
날이 많이 풀렸지요?
흰 꽃 피워 그대에게 한 송이
보내고 싶은 정옵니다
꽃은 시들겠지만 하고, 이어서는
(영원한 것을 묶어두는 문장이어야겠지만)
나의 아트만도 내일이면 시드니
그대가 오늘 이 꽃을 보면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추위가 있을까요? 하는
질문은 가능하겠지 만은
그건 모르는 일이겠지요
종이꽃에 물을 주는 아이를 보세요
때로는 쇠락함이, 다시 그릴 수 없는
영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그것도 원래 나타나지 않았던 듯
-하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꼴이 마음에 드나요?
아직 불러줄 노래도 많은데
짧게, 우리 서로의
눈 속에 잠깐, 아름답게
-있었지요
-함성호 (〈웹진 『시인광장』〉, 2009년 여름호)
시인들의 시 소재에 가장 많이 등장한 사물이 꽃이 아닐까? 인간의 마음에 자연발생적인 미감과 정서를 제공하는 꽃은 문자(Literal)와 은유(Metaphor)와 상징(Symbol)의 코드가 모두 가능한 기호이다. 시인들은 은유와 상징을 전제로 ‘꽃’을 사용한다. 동서양에 걸쳐 꽃은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의탁한 소재이지만 박남희와 함성호가 바라본 꽃은 좀 다르다.
박남희는 꽃병과 꽃을 관계론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꽃병이 꽃이 없어도 의미가 성립하느 존재이냐고 묻고 있다. 서양철학의 주류해석인 존재론의 입장에서는 단독자로서의 꽃병은 독립된 사물이며 당연히 자체의 의미를 갖는다. 緣起로 대표되는 관계론에서는 개별사물은 의미가 없다. 언어의 속성이 본래 그렇지만 단어와 단어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시는 관계론의 모범형식이 아닐까?
박남희는 사물과 사물(단어와 단어)을 치환해서 만들어지는 의미의 상상력을 즐긴다.“꽃병”을 “여자”로 “뿌리”로 바꾸어서 상상하기도 하고 “꽃”과 “꽃병”의 관계를 “조립식” 신혼부부의 삶에 대비시키기도 한다. “너는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이냐고” 화자는 묻지만 시가 답변을 하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암시로 달아난다. “꽃병은 히히힝거리며 날개 달린 말이 되어 천마도 속으로 사라진다”고. 다소 비약적인 암시이지만 작가가 드러낸 길로 독자들은 그냥 따라 갈 수 밖에.
함성호가 드러낸 “꽃”이라는 상징은 난독을 요구한다. “봄 편지”=사랑편지 이어야 문맥이 쉬운데 “나의 아트만”이 등장해서 시가 복잡해졌다. “봄”과 “꽃”과 “나”와 “그대”와 “아이”와 “종이 꽃”은 모두 브라만의 이야기임을 암시해서 독자에게 사랑이야기 이상임을 강조한다. 독자들은 서정시가 편하다. 철학적 사유의 상상력을 동원하라고 요구하는 작가에게 독자는 상상력의 재미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 시가 새로운 상상력의 재미를 제공하는가?의 질문에 나는 그런 입장에서 시를 선택했다. 작가가 -으로 처리한 문맥에 어떤 단어를 삽입해 상상력을 즐겼는가는 독자의 기량에 달렸다. -자체로 읽는 침묵의 방법이 제일 좋다. 시 전체를 관통하는 암시와 생략의 문맥이 볼만하다.
6.윤호병과 조인호
기적을 꿈꾸는 그대에게
그대여, 입고 있던 옷을 찢고 삼베옷을 걸치고 머리에 재를 뿌려본 적 있는지요?
「창세기」의 요셉과 야곱에서부터 「이사야서」의 히즈키야 임금을 거쳐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그랬던 것처럼, 서른 번 넘게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을, 그대여,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보았는지요? 마음속에 일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격렬한 분노를 겉으로 드러낼 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을 가슴깊이 애도할 때, 하느님의 말씀의 참뜻을 뒤늦게 깨닫고 절실하게 회개할 때, 바로 그 때에 옷을 찢어 알몸을 드러내고 재를 뒤집어써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았는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루카복음서, 11장 29절)라고 우리 모두의 믿음을 질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단 한 번만이라도 묵상해 보았는지요?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냐. 그래, 맞아,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라며 고래를 잡기 위해 상어 떼와 사투死鬪를 벌이는 노인의 꿈과 희망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그려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흰 고래 ‘모비딕’에게 오른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이 바로 그 분노로 인해 고래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마는 허만 멜빌의 소설 『백경白鯨』처럼, 분노를 잠재우고 희망을 잃지 않고 회개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에, 그대여, 불신不信에서 돌아선 요나처럼, 그대도 기적을 꿈꿀 수 있겠는지요?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요나서, 1장 2절)라는 주님의 말씀이 귀찮아 달아났던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갇혀있다 되살아나 니네베 사람들에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요나서, 3장 8절)라고 처절하게 소리쳐 외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대, 그대여, 그러나
뿌리내리지 못한 믿음을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더위를 식혀주던 아주까리가 벌레가 쏠아 말라죽자 잠시 동안의 더위를 참지 못하고 잔뜩 화가 치밀어 퉁명스럽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투덜대는 요나에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4장 10-11절)라고 타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는지요? 기적을 꿈꾸는 그대, 그대여.
귀찮으면 달아나고 곤경에 처하면 뉘우치고 힘들면 기도하고 편해지면 더 편해지려 불평하는 요나, 요나와 고래, 요나와 아주까리―기적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그대 주변의 일상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는지요? 기적을 꿈꾸는 그대, 그대여,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선포하십시오”(티모테오2서, 4장 2절), 당당하게 앞장서서, 두려워하지 말고
-윤호병 (〈시와 문화〉, 2009년 여름호)
야훼 יהוה
포클레인이 폐사한 가축들을 한가득 코에 담고 떠나던 날 밤. 사육사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있었네. 오오, 가엷은 우리의 술주정뱅이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 어둠을 틈타 축사에 불을 질렀네. 바보 같은 건초더미에 불이 붙은 찰나! 이런 제기랄, 하늘에서 비가 내렸지. 재수 옴 붙은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의 코털 한 가닥 삐죽, 빠져나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네.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임금님처럼 벌거벗기 시작했네. 고약한 유기농 생화학무기 고무장화를! 타임캡슐에 처박힐 초록색 새마을 모자를! 어버버버…덜 떨어진 아홉 살 소년 같은 멜빵바지를! 모두 모두 홀라당! 벗어던졌지.
섹시하게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죽은 새끼 쥐 같은 까만 성기를 달랑거리며, 뇌에 스펀지마냥 숭숭 구멍 뚫린 미친소처럼 축사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네. 오오 가엷어라, 완전 미친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 텅 빈 구유 속에 핏덩어리 신생아 같은 똥도 누었네. 두루마리 화장지도 없이. 그러다 문득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보았네! 축사 지하로 연결된 작은 해치 뚜껑을! 오랄라, 신의 장난 같은 해치 뚜껑을 열고,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지. 놀랍게도 지하실엔 야훼가 살고 있었다네. 천장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갓을 쓴 알전구 아래, 야훼는 할인매장 냉동식품 코너에 진열된 세계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핑크빛 고기덩어리 같았네. 지하실로 배달된 족발보쌈인 양 야훼의 발목엔 상추 같은 푸른 녹이 낀 오래된 청동족쇄가 채워져 있었지. 그 옆엔 또 다른 청동열쇠가 아귀餓鬼처럼 푸르스름하게 놓여 있었네.
유레카! 헐리우드식 블랙유머 앞에 맞닥뜨린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멍청하게도 호기심이 많았지. 열쇠를 주워들고 족쇄에 뚫린 구멍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네.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는 자꾸만 구멍으로부터 튕겨 나왔네. 십자군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의 녹슨 정조대처럼. 아니네. 그녀가 우리의 어리석은 십자군남편을 속였던 게지. 성지聖地는 동방의 예루살렘이 아니었지. 그녀가 정조대 속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남편 몰래 숨겨놓았던 거지. 그러다 마침내 맞물린 자물쇠가 찰칵, 돌아갔을 때 야훼는 아귀처럼 거대한 붉은 입술을 열기 시작했네. 우우우…벌어진 틈 사이로 지하계단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네. 뾰족한 지하실 모서리마저 둥근 공처럼 데굴데굴 틈 속으로 굴러 들어갔네. 야훼는 모자이크처럼 봉인된 사타구니를 활짝 열었지. 뚜껑 열린 틈 속으로 지하실을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네. 겁에 질린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야훼로부터 달아났지.
지하계단도 갓을 쓴 알전구도 모서리도 없는 무無 속을,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달리고 또 달렸네. 야훼는 웅웅웅 성능 좋은 후버진공청소기처럼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를 뒤쫓았지. 훌라훌라,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처럼 달리던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 순간. 무,언가에 걸려 철퍼덕 넘어졌네. 그것은 무속에서 불쑥 창조된 돌부리! 돌부리로 진화한 조선무! 같은 생명이었네. 하얗게 질린 무 같은 표정으로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 “지저스 크라이스트!” 소리칠 틈도 없이. 야훼는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를 삼켜 버렸네. 그렇게 젤라틴처럼 부드러운 야훼의 육질 속으로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미끄러져 들어갔네. 미끌미끌한 점액질과 뒤엉켜 꿈틀거릴수록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조금 더…조금 더 깊이…삽입돼갔네. 오싹했겠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겠지. 자꾸만 빳빳해졌겠지.
우리의 붉은 코 사육사 아저씨는 팽창하는 우주를 오롯이 체험했네. 섹시하게. 리드미컬하게. 최후의 붉은 코를 삐죽내민 채. 틈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던 사육사 아저씨는 무속에서 우연히 돌부리와 마주쳤네.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완성하던 날 밤. 손가락을 밀어 넣은 그녀의 구멍 속에서, 낯선 누군가의 또 다른 손가락을 마주친 경이로운 충돌 같았지. 그렇게 붉은 코와 돌부리 사이. 사육사와 야훼 사이. 자유무역협정 신화가 마침내 체결되었네. 별들이 찬란히 흩뿌려진 밤하늘 저편 휘어져 흐르는 은하수여! 펄럭이는 성조기여! 아멘*
-조인호 (〈현대시〉, 2009년 3월호)
서점에서 소설이 안팔리다고 한다. 시는? 당연히 더 안 팔린다. 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정보력이 약한 소설을 한가하게 읽는 사람은 시간이 많은 유한주부이거나 소설에 자기개발의 길이 있다고 믿는 젊은 처녀들의 몫이다. 요새 스토리를 담은 시들이 작은 소설처럼 산문형식으로 많이 등장한다. 시는 좀 더 길어지고 내용이 풍부해졌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는 독자에게 시가 압축된 이야기와 상징과 은유로 정보의 엑기스를 제공할테니 읽어달라 고 호소하는 것 같다. 대하소설이 영화한편으로, 2시간짜리 영화도 보기 바쁜 고급독자에게는 스토리가 담긴 시로 승부해야겠다는 시인들의 무의식적인 대응같기도 하다. 아니면 기존의 압축과 암시의 전통적인 형식에 싫증난 젊은 세대의 록(Rock)과 랩(Rap)의 반항일 수도 있겠다. 조인호의 시가 특히 그렇다.
윤호병의 경우는 좀 다른데 성경의 요나 이야기를 패스티쉬(pastiche)기법으로 빌려왔다. 전문가의 견해를 인용하면 구약 성경텍스트는 <야살의 책>(The Book of Jashar), 혹은 <의인의 책>(The Book of Upright) 고대 사본들을 인용하고, 신약성경텍스트 역시 구약성경텍스트를 패쉬티쉬적 방법으로 차용하고 있다고 한다. 윤호병도 이런 형식으로 요나를 차용하고 믿음이 사라진 현실사회를 비판한다. 성서의 특징이지만 요나의 이야기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풍부해서 즐겨 작가들이 차용하는 소재이다. 인간이 시련을 거쳐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주제는 원형(Arche)이미지에 가깝다. 윤호병은 지금 현대의 시대가 신이 보기에 타락한 니느웨처럼 멸망직전의 시대라 생각한다. 요나를 빌어 말했지만 화자의 이야기일 터인데 새로운 세상을 위해 기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조인호도 같은 성서의 소재를 차용해 현실을 비판했다. 광우병사태를 빌어 자본시대에서 소를 사육하는 사육사의 절망을 그려냈는데 차용한 상징과 알레고리의 주제들이 만만치 않다. 특이한 점은 기독교의 신 야훼가 지하에 산다고 상상한 내용이다.
물신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표상인 야훼는 현실에서 물러나 무의식 세계인 지하로 내려갔다. 조인호가 그려낸 인간의 심층에 있는 야훼는 성욕과 엽기로 대표되는 악마의 이미지를 하고 있다. 미국과 자본주의와 그들이 믿는 신인 야훼를 풍자해서 인간과 시대를 동시에 비판했다. 세계를 만든 창조주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가진 야누스이며 세상의 창조와 멸망을 성욕의 알레고리로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엽기영화의 이미지와 장면을 차용해서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는데 이 시인의 내면도 신화적 원형(Arche)의 이미지와 상징이 가득한 것 같다.
우리 시단의 스택트럼 매우 넓어 다양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우리 시단의 스택트럼이 매우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인들이 자신과 환경, 세계에 대해 형이상학에서 물질의 현실까지 고민하고 있는 풍경들이 눈에 잡혔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선미와 ‘조화’를 대변한 전통미학의 시들과 상대적으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 ‘부조화’의 미학을 드러내는 시들이 있다. 사물과 세계는 인간이 아는 만큼 보이고 해석할 수 있다는 명제가 옳다면 지력과 정보력이 증가하고 있는 21세기는 세계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외부에서는 과학에서의 세계지평이 넓어지고 있고 인간의 내부에서는 정신분석학이나 뇌과학 사회생물학등의 해석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작용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시인은 시대이데올로기와 문화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작품을 만들 수 없다. 시인인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감각이 그의 무의식에 흘러들고 그가 배운 인식의 형식에 따라 그의 판단과 상상력의 형태가 결정된다. 여기에다가 심층의식에는 태아의 발생과정과 관계하는 내용들이 물질 혹은 심혼의 형태로 들어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형성한다고 한다.
시인이 경험하고 만나는 모든 타자가 시인의 내면에 침투해서 사유와 정서와 판단을 만들어 낸다. 나도 시를 쓰고 쓰지만 무의식적인 흥분상태에서 작품을 쓰고 나면 ‘이거 내가 쓴 작품이 맞아?’ 하는 때가 있다. 나와 ‘내안의 다른 나(타자)’가 작품을 공동으로 썼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는 자아가 만들어내는 거울상이라는 佛家의 이야기와 오늘날의 양자역학에서 관찰자의 참여로 물질의 위치와 운동이 결정된다는 해석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현상은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신비하다. 언어와 예술과 과학과 종교를 만들어 낸 이 작용은 고도의 정보와 에너지집중이 만들어 내는 불꽃이다. 이 불꽃의 거울에 비친 문화와 문명, 세계관과 형이상학의 그림들은 시인의 심장을 뜨겁게 한다. 이미지와 상징형식으로 시인의 심혼에서 타오르는 경이와 기쁨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노래하게 한다. 시인의 시는 사막의 피라미드처럼 고독한 침묵 속에 세워진다. 피라미드는 그리스어 어원으로는 ‘중심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라는 뜻이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뜨거운 열망이 장대하고 영구한 건축물을 만들어냈고 순례자와 관광객들에게 상징물으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안내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의 시가 피라미드처럼 세월의 풍상을 견딜려면 시인의 “중심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강도와 순도가 만들어내는 정신의 높이가 얼마나 견고한 가에 달려있다.
■ 김백겸 시인
-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
-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한국시인협회회원
- 웹진 『시인광장』主幹
- 한국원자력연구원 감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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