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소설의 재미와 문체혁명(文體革命)

미송 2009. 11. 28. 13:24

소설의 재미와 문체혁명(文體革命)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Mario Vargas Llosa-

 

[예술이란 너 따위의 보도업무보다 더 중요한 거란 말이다. 이 헛개비야] 이것이 요사의 한 소설의 주인공, 연속방송극 작가의 욕설이다. <훌리아 아줌마와 글장이 La Tía Julia y el escribidor>(Barcelona, 1977)에서 뻬드로 까마초라는 극작가가 다짜고짜 남의 사무실에 들어와 타이프라이터를 끌어내가며 내뱉는 소리. 그 헛개비(trasgo)라는 소리가 무슨 욕설인지 어리둥절해 하며 서있는 무리들을 젖히고 한 예술가는 그야말로 초인간적인 힘으로 구식 레밍턴 타자기를 들고 비칠비칠 걸어나간다. 그렇다. 예술은 확실히 보도업무보다는 중요하다. 한 예술가에게는, 한 글장이에게는, 적어도 오늘의 소설가 바르가스 요사에게는. 다시 말해서 그 말은 보도업무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뜻도 잊지 않고 있다.

 

현실을 파헤치고 고발하고 분노하고 참여하는 작업도 예술의 임무라는 것을 글의 예술가는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가의 혁명은 작가로서의 혁명, 다시 말해서 스스로가 쓰고 있는 글, 즉 그 문체의 혁명이 우선하지 않고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중남미 소설은 알고 있다. 연속극이나 연재물이 원고 매수조차 아닌 근이나 킬로로 팔리는 사회에서 작가는 대중의 몰이해(沒理解)와 여타세력의 무자비한 압력속에 부대껴야 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 차가운 매개체가 순간 순간 창조해가는 신화속에 너도 나도 혹은 흑(黑)을 잡고 혹은 백(百)을 잡아가며 영웅처럼 열심히 로보트화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나 [종속이론]보다 오늘 중남미 문화는 소설의 혁명으로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한다. 그러면 중남미 소설의 혁명이란 무엇인가?

 

이 복잡하고 어려운 명제에 답하기 위해 오늘은 우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 접근해 보자. 오늘의 중남미 소설은 우선 소설이 글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무슨 상상이나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허구가 아니라 쓰는 재미, 이야기하는 재미(특히 마르께스 같은 경우), 노는 재미(보르헤스의 [심각한 어린이의 장난]같은)가 소설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독자도 읽는 재미, 마음대로 해석을 내려보는 재미, 웃는 재미, 놀라는 재미로 호기심을 가지고 글에 접근한다. 따라서 어떤 소설은 수수께끼나 퀴즈를 푸는 재미까지도 동원하여 독자를 유혹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언급한 <훌리아 아줌마와 글장이 La Tía Julia y el escribidor> 책머리에 살바도르 엘리손도 Salvador Elizondo의 <지리학자 El Grafógrafo>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해 쓰고 있다. [나는 글을 쓴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있다고 쓴다. 마음속으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쓰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나도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보는 나를 볼 수가 있다. 이미 나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던 나를 보며 기억해낸다. 그리고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본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본다.]

 

쓰는 재미, 그것은 쓰는 것을 보는 재미이며 쓴다는 일에 참여하고 생각하고 동시에 쓰고 있는 재미를 말한다. 읽는 것도 무엇을 배우고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손에 잡히니까 읽고 읽다가 보니까 생각하게 되고 말이 재미있으니까 혹은 웃고 혹은 분노하는 재미가 짭짤하다. 재미있는 이야기꾼은 이야기 내용을 재미있는 것만 골라서 한다기 보다는 이야기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입에서는 어느 이야기이고 재미가 있다. 영웅담이 나오면 영웅처럼 목소리를 바꾸고 바보가 나오면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린다. 말재주가 없어 가지고는 이야기꾼이 되긴 글렀고 글재주가 없어서는 글장이가 되지 못한다. 다만 이것이 소설가의 경우는 보다 책략적이고 창조적인 구조를 사용하는 글장이라는 점이 있다.

 

소설의 병치법(倂置法) 요사의 문체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작가의 창조적인 책략을 엿본다는 말이 된다. 많은 중남미 소설이 그렇듯 요사는 그의 소설에서 이야기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즉, 일이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났다는 이야기 방식을 수립해서 이야기와 관계없는(피상적으로는) 사건이나 묘사가 끼어들고 특히 <훌리아 아줌마와 글장이 La Tía Julia y el escribidor>에서는 하나의 스토리 속에 다른 수 많은 단편소설류의 일화들이 설명없이 한 장(章), 두 장을 메꾼다. 이런 수법은 시에서의 대치법(Paralelism)에 상당하는 표현 방식으로,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무리가 가해지는 것이지만 그 대신 같은 이야기에 여러가지 비전을 제시하고 비유적인 효과는 가져올 수 있다. 가령 <훌리아 아줌마와 글장이 La Tía Julia y el escribidor>에서 가장 중요한 패턴으로 부각되는 <나>와 <훌리아 아줌마>와의 사랑은 극작가 <뻬드로 까마초>와

<사회>의 충돌로 병치된다. 나이가 열살차이가 넘는 아줌마를 사랑해서 온 가족과 사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에 골인하는 <나>의 이야기는 청중들의 반발과 라디오 회사측의 횡포를 무릅쓰고 하나의 창조적인 예술작업을 밀고 나가는 뻬드로 까마초와 같은데가 있다. 끝내 회사에서 축출당하고 아무 보잘 것 없는 빈궁한 생활인으로 돌아온 까마초의 몰골이나 <훌리아 아줌마>와 이혼하고 다시 결혼해서 생활에 묶여 사는 <나>의 모습은 다르면서 너무나 같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의 창조의 의지, 한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은 하나같이 사회라는 벽에 부딪혀 닳아지고 부서져 속물화 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 요사의 <결혼>은 곧 진정한 창조적인 가치와 사회와의 타협으로 비유되고 있는 점이 흥미있다. 퇴색한 두더지 같은 예술인 까마초도 창녀와 결혼했고(지금 그의 말대로면 천사 같은 이해심이 많은), <나>도 한 발 잘못 딛었다가는 대갈통에 접시 벼락을 불사하는 무서운 빠뜨리시아와 결혼해 있다. 이와 같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데 묶어 쓰는 스타일과 함께 각각 다른 물체나 문학 장르를 한 소설속에 비벼넣는 수법도 바르가스 요사의 장기 중의 하나다.

 

소설 <빤딸레온과 위안부들 Pantaleón y las visitadoras>에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이 신문 조각이나 대화, 녹음 테이프, 편지, 공문서 등을 두서없이 묶어놓은 듯한 인상이다. 그 중에 제일 많은 것이 군대내에서의 사건인 만큼 <전통>이나 보고서이며 그 다음이 편지, 그리고 군대의 훈령, 지시 사항, 법규 등의 순서이다. 아마조나 지역군 내에서 위안부대를 창설하여 실패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위안대 책임자 빤딸레온 대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내용인 만큼 이 모든 서류나 기사는 하나의 사건을 초점으로 설명 없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흡사 작자는 연극이나 영화에서처럼 이들 서류나 화면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보통 소설에서처럼 친절하게 알도록 설명이나 해설을 해 주는 부분이 없다. 물론 자연주의 소설 투로 작자가 이론과 해석을 덧붙여 상황을 설명하는 건 더더구나 아니다. <빤딸레온과 위안부들 Pantaleón y las visitadoras>의 세계 그러나 이렇게 답답하리만큼 규격에 짜인 글만 묶어 놓은 이 소설은 군대라든가 어떤 일정한 귀결에 얽매여 사는 사회의 분위기를 도식처럼 나타내 준다. 이 소설에서 인간적인 감정과 갈등은 하나의 상자 속에 갖힌 생쥐들처럼 이들 보고서의 문장(겉으로는 엄격한 형식에 따른) 속에서 꿈틀거린다.

 

깜깜한 어둠과 침묵 속에 생쥐의 찍찍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듯이 소설에서 빤딸레온의 인간스러운 고뇌와 희극에 가까운 그의 군에 대한 충성은 너무도 선명하게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조나 지역 주둔 부대에서는 많은 강간 사건 때문에 드디어 위안대를 창설하기로 한다. 다만 이 위안대는 군대의 숭고한 사명과는 연결 지을 수 없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해서 성실하고 능력 있는 장교 한 사람을 골라 일반 단체인 것처럼 운영하도록 한다. 이리하여 뽑힌 장교가 빤딸레온이다. 군대에 충성을 다하는 군인으로 군대에서 지시한 사명을 너무 훌륭하게 이행하다 보니 도리어 이 위안대의 명성 때문에 군대가 피해를 당해야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이 소설의 가장 희극적인 요소는 위와 같은 상황 속에 빚어지는 위안대라는 업무의 지속성과 그 업무를 다루는 빤딸레온의 군인으로서의 성실성이다. 가장 과학적이고 엄격한 군 보고서에 내용은 우스꽝스러운 창녀의 이야기. 빤딸레온은 위안대 이용 예상자수를 파악하기 위해 각 부대로 설문을 보내 보고하도록 한다.

 

 

/ 민용태(스페인문학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