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737

김경주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하늘이 없다>外

정교한 횡설수설 구름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구름의 너머에 대해 나는 입술이 없는 사람이다 구름의 이쪽에 대해 나는 수천 개의 입술을 비우고 단 하나의 입술로 포개지는 구름에 대해 나는 입술을 다무는 쪽이다. 구름의 저쪽을 보고 발들이 붓는 새들의 둥긂이나 둥긂 보고 나는 미음을 찾는 술어, 술을 만드는 사람의 입맛, 나는 오랜 동안 나를 뭉친 손의 살결만 기억하고 사는 눈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구름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수천 개의 물기로 만든 생식기, 가령, 내 생식기로 유인하고 싶어지는 창백한 펭귄들, 밤의 낱말들, 정교한 횡설수설이 있다 하지만 천년 전으로 바람이 눈을 감을 때 배반은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서사이고 샘은 벌레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다 구름이 걷히면 *..

운문과 산문 2020.12.27

생명의 서(書)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求)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운문과 산문 2020.09.27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키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운문과 산문 2020.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