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눈 뜬 아침의 열림

미송 2010. 2. 15. 13:05

눈 뜬 아침의 열림

 

 

히말라야 설산에서 흘러내린 어느 골짜기에 피골이 상접한 걸인이 쓰러져 있었다. 마침 신에게 바칠 성스런 우유를 가지고 신전으로 가던 수자타라는 처녀가 걸인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우주의 주인인 브라만 신에게 우유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갈비뼈가 다 드러나고 얼굴이 해골처럼 변해버린 굶주린 걸인에게 이것을 먹일 것인가, 수자타는 머뭇거림이 없이 걸인의 머리를 자기의 무릎에 얹고 겨우 벌어진 입 속으로 우유를 흘려 넣었다. 말라 붙어버린 뱃속으로 영양분이 가득한 우유가 흘러들자 걸인은 눈을 떴다. 온 몸에 기운이 돌았다. 수자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 걸인은 몸을 일으켜서 갠지스강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물에 몸을 담가 오랜 기간 고행에 찌든 몸을 씻었다. 옷을 빨아서 햇볕에 말려 입었다. 그리고 걸인은 다시 돌아와서 나무 아래에 앉아 명상에 들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칠일 밤낮의 명상 후에 걸인은 눈을 번쩍 떴고 삼라만상의 올바른 모습이 바다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광명이었다. 만물은 스스로가 발하는 빛으로 근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의 입이 아닌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서, 빛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 만물 모두가 우주법계를 장엄하는 꽃이라, 골짜기의 조그만 꽃 속에 거대한 우주가 들어있고 거대한 우주 속에 꽃이 피어있어 번뇌의 꽃, 업의 꽃, 생사의 꽃, 윤회의 꽃이 장엄한 우주 속에 들어있고 우주가 그들 속에 펼쳐 있나니, 세상의 어느 미물이라도 우주가 아닌 것이 없고 우주를 포함하지 않은 미물이 없던 것이다. 그리하여 꽃은 꽃으로도 통하기에 하나의 티끌 속에 펼쳐진 우주를 건너 또 하나의 티끌 속의 무한한 우주로 들어감에 걸림이 없어 사사무애(事事無碍), 사방이 거울로 둘러친 방 한 가운데에 들어앉은 촛불이 생명이라서, 촛불이 켜진 거울은 또 다른 거울 속의 촛불로 이어지고, 그 촛불을 안은 거울은 또 다른 거울로 끝없이 달려가, 인드라망의 그물코 마디마디에 매달린 수억 수천억 수조, 무량의 금방울이 또 수억 수천억 수조, 무량의 금방울을 포함하여 비치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 흔들린다. 시작도 없는 시초로부터 생사윤회와 고통의 강을 건너다가 겨우 보살의 언덕에 올랐고, 그 보살의 경지에서 또한 수 백 생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강을 건넌 후, 카필라성 마야왕비의 몸을 빌려 세상에 발을 디딘 싯달타, 그는 이렇게 우주를 덮고 있는 인드라망의 그물을 목도하여 장엄의 바다에 섰던 것이다. 또한 인드라망의 그물을 목도하여 장엄의 바다에 선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수행자들아, 평생 동안 내가 설한 팔만 사천 법문이 있었는가?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런 설법도 하지 않았고 설법한 사람도 없었으며 설법에 귀 기울인 너희들도 없었다.”

 

아! 세상은 본래 실체가 없이 허공에 뜬 그림자만 희뜩대는 만화경이라서, 끝없는 부정(否定)과 부정을 거듭한 공(空)이고 공공(空空)이고 공공공(空空空)... 이라서, 미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알지 못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서북부까지 정벌하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그곳을 부하장수로 하여금 통치케 하였다. 희랍 철학에 정통하고 중동지방의 종교를 두루 섭렵하여 서양 헬레니즘 정신을 대표하던 미린다왕은 그 곳의 통치자로서 한 가지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저기 몰려다니는 걸인들의 집단은 무엇인가? 평생 한 벌뿐인 노란 가사를 걸치고 그릇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니며 구걸을 하여 하루 두 끼니 뿐이 먹지 않으며, 생사에 집착하지 않고 신과 영혼과 사물의 본질을 부인하며 지팡이 한 자루에 의지해 떠돌다가 절대 소멸의 경지에 미소 지으며 들어서는 그들은 누구인가?”

 

미린다왕은 황색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논박의 도전장을 던졌다. 역사의 무대에 영혼실재론과 영혼부재론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신도 이데아도 삼라만상의 본질도 존재한다. 그 반대라면 신도 이데아도 삼라만상과 심지어는 나의 본질도 사라져 인간에게 인간이라고 말할 무엇도 세상에는 남지 않는다. 오백 명의 호위병을 대동한 미린다왕은 8만 수행자들이 앉아있는 정원을 방문하여 황색 집단의 우두머리 앞에 우뚝 섰다. 황색 가사로 몸을 감싼 우두머리는 조용히 앉아 미린다왕의 의중을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당신은 나에게 토론을 원하고 있습니다. 현자의 권위로 마주한다면 토론에 응하겠지만 제왕의 권위라면 그만 두겠습니다.”

진리는 칼이 아니라 치열한 논박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뜻에 미린다왕은 웃음으로 허락 했다. 그러나 통성명을 나누는 논박의 첫머리부터 날카로운 혀의 칼날이 무지개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왕이시여, 저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동료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우리 부모는 나를 나가세나, 수라세나, 비라세나, 또는 싱하세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관념과 습관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나가세나라고 부를 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왕의 첫 질문부터 단호하게 부러뜨리고 들어가는 이 말에 오백 호위병과 8만 수행자들은 숨을 죽였다. 미린다왕의 눈빛이 번쩍했다. 말을 분명히 토해내고 있는 지금 내 앞의 당신이 없다는 말인가. 미린다왕의 논설이 격류처럼 나가세나의 면전을 뒤덮으며 쏟아졌다.

“존자여, 지금 당신은 이름으로 불릴 만한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좌구와 약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며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다면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입니까? 당신들이 주장하는 공덕과 죄는 누가 지을 것이며 선행의 과보는 누가 받는다는 말입니까? 존자여, 당신 자신이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자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존자여, 머리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근육, 힘줄, 뼈, 뼈즙, 관절액, 오줌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 모든 것들 중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촉이 인식하는 감각작용, 또는 그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이 당신이란 말입니까? 이 모든 자료들을 합쳐 놓은 것이 당신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었습니다. 당신은 모두 다 나가세나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오백 호위병, 그리고 8만 수행자 앞에 빤히 앉아있는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가세나라는 말은 다 헛소리입니까?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고 이야기도 이렇게 나누는 그대가, 그대 자신인 나가세나가 없다고 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가세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듯한 질문이 끝나자 왕의 오백 호위병들은 기세를 올렸고 8만 수행자들은 침묵하여 나가세나의 입만 쳐다봤다. 잠시 후 좌선을 한 채 코앞만 응시하던 나가세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이여, 그대는 무엇을 이용하여 여기에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수레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굴대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퀴나 차틀이 수레입니까? 멍에나 마부가 수레입니까? 채찍이나 포장이 수레입니까? 이 잡다한 모든 것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이 수레입니까?”

“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왕이시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물었습니다만 수레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왕이시여, 그대는 내 질문에 수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수레를 타고 왔다고 말씀하시니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에 8만 수행자들이 찬탄을 했고 오백 호위병들은 침묵하여 미린다왕의 입만 쳐다봤다. 미린다왕은 손을 내밀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수레채, 굴대, 바퀴 바큇살, 멍에, 채찍, 차틀, 포장, 마부 등이 서로 얽히고 반연(絆緣)하여 일어나는 명칭이나 통칭입니다.”

“그렇습니다. 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인체의 33가지 물질과 감각기관의 구성요소가 서로 얽혀서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습관이 생기고 이것은 하나의 기능이고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세나라고 불릴만한 아무런 고유의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 그리하여, 그리하여, 인연에 의해 뭉치고 흩어져가는 육신에 그림자만 깃들어 우주를 떠돌고, 새해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일으키니 마음의 그림자가 또 다시 펼쳐지고, 그림자는 의지로 의지는 언어로 언어는 행동으로 쳇바퀴를 돌아 업장이 또 다시 쌓이고 두터워지는 날이기에, 인연이 인연을 낳는 연기와 고통의 길을 거슬러 인연이 인연을 없애고 또 그 인연이 인연을 없애는 환멸연기(還滅緣起), 공(空)의 세계를 연다. ‘열림’의 세계를 연다. 공공(空空)의 세계에 들어선다. ‘열림’의 문을 넘어 그 뒤의 '열림‘으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바다가 펼쳐져, “전체 바다는 하나의 파도 속에 구현된다. 바다는 수축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은 파도가 전체 바다를 포용한다. 바다는 확장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장애가 없다.” <두순(杜順)>

 

2010. 2. 15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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