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의 금칠 법당
얼마 전 신문기사를 보니 강남의 모 교회에서 무려 2000억 원을 들여서 서초동 법원청사 부근에 대형교회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 높이높이 지으려는 계획이지만 법원청사와 비례를 맞추기 위해 바벨탑까지는 못 가고 4만 5천 명의 신도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규모라나. 2000억의 돈과, 두 개의 높은 건물이 우뚝한 조감도, 벌써 천억 가까이 모금액이 모였다는 내용, 등등 이런 것들도 대단했지만, 한꺼번에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주 마다 모여든다는 사실에 입이 쩍 벌어졌다.
메가처치, 나는 메가처치라고 해서 뭐를 처치하자는 말인가 선뜻 감이 안 잡혔는데, 메가톤급 폭탄과 같은 메가톤급 교회를 영어로 메가처지라고 표현한다니. 이놈의 영어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데 명수라서, 사과보다는 애플이, 유행보다는 패션이, 머리 깎자 보다는 헤어커트라는 말이 더욱 깔끔하고 그럴듯하여, 진작 눈꼴사납기 그지없던 대형교회를 메가처치라고 하는 순간, 뭔가 대단한 말인 모양인데... 했다가는 염병.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절도 역시 마찬가지.
산 계곡 하나를 빽빽이 차지하여 줄줄이 들어찬 몇 층짜리 건물하며, 기원정사를 흉내 냈는지 온통 금칠을 한 법당도 있다는 소문이고,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지만 어느 큰 절에서는 사월초파일에 돈을 걷어 들이는 불전함이 몇 백 미터를 늘어서 있어, 세상 돈이 여기에 다 몰려드는가, 밤에는 은행 직원이 직접 나와서 돈을 자루에 넣어 즈려밟는다나, 그래서 그런지 스님들의 얼굴이 온통 통통하고 번들번들하기 말할 수 없어, 물론 득도하여 신수가 폈겠지만 너무 득도한 스님들이 많아서, 언젠가 봤던 배원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그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나는 그 영화를 잊지 못한다. 삶의 무상에 비척거리던 청년이 찾아든 깊은 산골의 암자에 큰스님이 있어 머리를 깎고, 공부에 집중하고 참선에 몰두하여 “달빛이 물밑에서 차오르는데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느냐?”라는 큰스님이 내린 화두를 깨치려 몸부림치다가, 어느 날 좌선한 채 열반하신 큰스님을 그 유언에 따라 관도 아닌 궤짝에 넣어 다비를 한 새벽, 그 잿더미 속에서, 뼛조각만 돌아다니는 그 잿더미 속에서 “달빛이 물밑에서 차오르는데 나의 주인공이 어디로 가는지 깨우쳤는가,” 소를 찾았고 소가 없고, 그렇게 홀로 암자를 떠나는 장면으로 그 영화는 끝난다. 시종일관 큰스님이건 작은 스님이건 사미승이건 자기와 사투를 벌이는 내면의 고뇌와 몸부림 일색이었다는 소감이었다.
그런 것이다. 금으로 도배한 법당은 제 속에 짓는 것이다. 2000억 짜리 메가처치도 신앙인 각자의 가슴속에 짓는 것이다. 깨달음도 각자에게 각기 오는 것이요, 구원도 각자의 몫인 즉, 몰려다닌다고 다 깨닫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4만 명이 아니라 400만 명이 몰려서 하늘에 두 손 벌려 시위를 하듯이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인간들이 꾸민 하나의 퍼포먼스고 해프닝에 불과할 뿐, 부처가 무지개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주선 타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정말 답답하다. 미치도록 답답하다. 왜 우리는 자꾸 큰 절에 집착하고 큰 교회에 매달려, 두려움의 겨울을 보내는 춥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가. 깨달음과 구원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있어 몇 천 억이라는 그 돈을 퍼포먼스나 해프닝에 퍼붓기 보다는, 88만 원짜리 일거리도 없는 사람들, 뜨거운 국밥 한 그릇에 배부를 노숙자들, 폐품을 줍는 꼬부라진 노인들, 두터운 외투 하나 없이 학교 가는 아이들, 그런 이들에게 퍼붓는다면, 가난하고 외로운 그들은 우리들의 가슴에 몇 천 억짜리 이상의 절이나 교회를 지어 줄 텐데, 고마움과 외롭지 않다는 자신감에 찬 그들의 눈빛이 우리들 마음의 사원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줄 텐데,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부처가 어쩌고 공덕이 어쩌고, 하나님이 어쩌고 고아나 과부가 어쩌고 하며 입술에 침이 마르게 떠들어대는 성직자들, 그들은 도둑놈인가? 세상 좋은 소리란 소리는 온통 도둑질하여 제 입에 처넣는 도둑들인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안 그런 사람도 많다. 조그만 암자에 만족하여 공부에 열중하는 스님도 많고 뒷골목 지하의 개척교회에서 고군분투하는 목사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금칠한 법당이나 메가처치라는 데서 떵떵 거리는 스님과 목사들의 눈으로 보면 한갓 떨거지들인 것도 같다. 너는 영험하지 못해서 그 모양 그 꼴이고, 나는 영험하여 부처나 하늘이 나를 도와 이런 것인 즉, 삶에는 빈부가 분명히 존재하고 여기 신앙의 세계에도 귀함과 천함이 갈라져 있어, 나는 나무 관세음보살, 살아서는 행복- 또 나는 나무 아미타불, 죽어서는 천당- 다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부처님도 하나님도 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다..... 가가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말이다. 아- 이천만 불교도여, 이천만 기독교들이여, 개개인이 하나하나가 부처님이여,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눈을 진리로 돌려라. 귀를 부처님과 하나님의 원래의 목소리로 기울이면 어떤가. 고행 끝에 죽어가는 석가모니를 구한 아름다운 처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브라만 신에게 바치려고 짠 성스런 우유를 성전에 가는 길에서 발견한 한낱 노숙자와 같은 사람에게 바친 처녀의 손길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석가모니를 부처로 만든 처녀를 떠올려 보자.
금칠한 절이나 짓자고, 메가처치나 올리자고 돈을 바치고 바치는 오늘의 신앙인들은 성직자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질책해야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재물이 풍요로움으로 넘치고 넘치는 금칠한 절이나 대형교회까지 올라가는가, 성전으로 가는 길에 늘비한 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당장 몇 천원이 없어서 밥을 사먹지 못하는 사람들, 용기가 될 따듯한 말 한 마디가 그리운 사람들, 그들이 보이지 않는가. 주구장창 수천 년을 외쳐온 진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말이다.
법당의 금칠을 벗겨내자, 자꾸 올라가는 대형교회를 허물어 버리자. 금가루나 벽돌 한 장 그것이 가야 할 길, 제 갈 길로 제대로 보내는 것이다. 우리도 피골이 상접한 걸인에게 성스런 우유를 바친 처녀가 되어 보는 것이다.. 이 일을 더 이상 성직자에게 맡기지 말고 신앙인 각자 각자가 직접 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내 가슴 깊은 곳에 금칠 법당을 화려하게 짓고, 메가처지를 으리으리하게 올려 보는 것이다.
/ 이정문 (소설가)
'정문의 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뜬 아침의 열림 (0) | 2010.02.15 |
---|---|
습작에세이 (0) | 2010.01.30 |
추운 겨울의 어느 날 (0) | 2009.12.18 |
배움의 강 (0) | 2009.10.25 |
오감(五感)에 호소하는 수필 (0) | 2009.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