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에세이 1] 즐거운 습작
문학 습작이란 기법이나 작법을 익히기 위해서 작품을 연습 삼아 지어보는 것이다. 이는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향하는 창작의 전단계이겠지만, 나는 그런 단계를 무시하고 그냥 글 쓰는 즐거움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넉넉함을 주제로 삼고 싶다. 굳이 표현하자면 독서와 사고가 넘치면 쓰고 아니면 펜을 놓고 그러다가 또 뭔가가 머릿속에서 넘치면 써보는 일로서 ‘느긋하고 여유로운 문학’인 것이다.
가끔은 솔로몬의 탄식처럼 창작, 즉 새로운 것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에 젖어보기도 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구상의 모든 문학작품은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기존의 작품을 재구성, 짜깁기, 패러디했을 뿐이 아닐까, 그래서 문학창작을 문학변형이란 말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티비 드라마는 몇 가지의 주제에서 계속 맴돌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녀의 불륜과 삼각관계,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알력 또는 대가족제도의 갈등, 숨겨진 배우자의 비밀, 등등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일리아드,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단독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세간에서 전해지던 조그만 영웅담이 많은 이야기꾼들을 통하여 덧붙여지고 정리되어져 일관된 줄기를 형성했고 그 중심에 호메로스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일 뿐 근거가 정확하지는 않다. 중국의 대표문학 작품 <삼국지>는 원래 정사로 기록된 사건이 많은 이야기꾼을 만나서 천여 년 간 각색되어 내려오다가 나관중이라는 문인에 의해 정리된 내용이다. 이는 한 사람의 작가가 불멸의 작품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 주고, 오늘의 창작도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누보로망 작가들은 말하기를 소설의 주인공과 사건들은 이미 나올 대로 다 나왔고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기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기꺼해야 창작이란 남의 책을 읽고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그에 덧붙여 어떤 틈을 메우는 의미로 쓰는 것이라고 한다.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보다는 새롭게 표현된, 즉 언어를 ‘낯설게 하기’ 또는 ‘사장된 언어 살리기’ 정도여서 완벽한 창작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새로운 작품을 볼 때마다 작품의 모태를 찾게 된다. 곰곰이 따지며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다 했던 소리가 그 소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인들은 왜 문학에 집착하게 되는가. 이는 언어의 신비한 기능 때문일 것이다. 인도의 영화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작품 <블랙 Black>은 이러한 언어의 기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선천적으로 앞을 못 보는 장님소녀와 가정교사와의 이야기인데, 소녀는 움직이다가 책상이나 벽에 부딪치면 절망감에 빠져들어 신경증환자처럼 되어 버린다. 뭔가가 자꾸 자기를 가로막고 별안간 발이 허공을 디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음식은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있는데 도대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를 못한다. 답답함에 소리치고 발광을 하면 누군가가 자기를 제어하고 붙잡고 가두는데 소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교사는 장님소녀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리의 알파벳은 A,B.C.D가 아니라 B,L,A,C,K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너의 빛의 첫걸음이다.” 어느 날 가정교사는 발광하는 소녀를 분수대의 물속에 던져 버린다. 풍덩하며 허우적대던 소녀에게 가정교사는 그 물의 실체를 가르친다. “네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감각은 바로 물이다. 따라 해봐라. Water, W,a,t,e,r” 그때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의아해 하고 있던 소녀에게 교사는 “비, 부드럽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비다. 따라 해라, RAIN, R,A,I,N” 이때 비로소 소녀는 물이나 비의 정체를 알게 된다. 언어의 빛을 통해서 우주를 보게 된 순간이었다.
바로 이 맛이 아닐까, 인간은 언어의 유희를 즐길 줄 아는 동물이다.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 언어소통 수단을 뛰어넘어 그 언어의 유희를 통하여 우주를 새로 창조해 나가는, 즉 우주의 줄거리를 만드는 즐거움과 능력이 우리를 언어에 사로잡히게 하지는 않을까, 언어가 장님소녀에게 빛으로 작용했던 <불랙, Black>에서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습작을 하는 순간 나는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속>
[습작에세이 2] 언어의 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창세기 구절은 종교적 의미와 관계없이 인간 인식론의 첫 장을 연다. 우리는 사물을 눈이 아닌 언어로 보는 것이고 이것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경계의 하나일 것이다. 원시인이 그린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면서 인간에게 소리가 먼저였을까 그림이 먼저였을까, 그런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그림이란 종교제식 행위나 예술 활동으로 보이고 언어는 눈빛 표정 몸짓 등의 구체적 소리의 발성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통할 수 있기에 인간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일 듯도 하다. 이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갓난아기는 자기와 엄마를 구분하지 못한다. 엄마의 젓꼭지가 제 몸에 달려있고 그 품도 제 몸의 일부분으로 느끼다가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자기와 엄마를 구분하게 된다. 아기에게 이는 대단히 두렵고 화급한 일로서 분리공포감이 엄습하면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정보전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단순한 울음이 어떤 간절한 의미를 가진 울음으로 변하고 그 울음소리도 원하는 종류와 농도에 따라 섬세한 차이를 보인다. 배가 고팠을 때 높은 음으로 으앙 하는 울음을 반복하였다면 그 소리가 바로 양식의 발견이고, 분리감을 극복하려고 앙앙 하는 소리를 반복하였다면 그것은 엄마 품의 발견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의사전달 방법인 언어 내지 소리로 세상을 구성 짓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평생을 지속한다.
문학은 기억의 재구성이고 새로운 작품은 과거의 현재화다. 작가는 아는 것만을 쓸 뿐이고 문득 머리를 치는 영감(靈感)도 내부에서 우러난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옥따비아 빠스는 “가장 완벽한 시는 나의 내면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의 내면이란 무슨 말인가? 그것은 과거의 경험이 쌓인 기억의 도서관이다. 과학적으로 기억의 대부분은 뇌에 저장되지만 몸을 구성하는 근육이나 신경세포에도 저장된다고 한다. 햄버거를 잘 먹던 아이의 심장을 이식 받은 어른이 별안간 햄버거를 즐겨먹게 되는 현상이 근육세포 기억의 일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온 몸은 기억의 저장고인 셈이다.
유아기 때에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기에 느낌으로 경험을 저장한다. 언어화 되지 못한 느낌은 이름표 없이 평생을 기억도서관 속에서 배회하므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된다. 실제 있었던 일이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여성이 애인과 잘 사귀다가도 결혼할 때가 되면 이유 없이 꼭 헤어지곤 했다. 이 여성이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그 이유를 캐기 시작했는데 어렸을 때의 경험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여성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외할머니의 집에서 지냈었다.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주말에 아이를 보러 왔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떠나면 계속 엄마를 찾고 울고 하였지만 막상 주말에 엄마가 오면 획 토라져 등을 돌리고 혼자 놀곤 하였던 것이다. 즉 다시 떠나야 할 엄마에 대한 방어본능이 작동하였던 것인데, 이런 방어본능의 발동이 반복되면서 느낌으로 기억되어 있다가 어른이 된 후 이성관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언어가 붙여지지 못한 느낌이라는 경험은 어둠 속의 조종간으로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여성은 자기를 분석한 결과에 힘입어 ‘이유 없는 이별’이라는 곡예에서 탈출하였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가 없는 느낌은 우리에게 종종 곤란을 초래한다. 즉 무엇에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게 만든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기 경험을 더듬어서 어둠의 조종간이 무엇인지를 언어로 밝혀 치료를 달성한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언어에 더욱 의지하게 된다. 땅바닥의 단순한 무늬가 횡단보도라고 어린아이에게 주입되면 거기에는 하나의 우주적 개념이 펼쳐진다. 빨강 등은 자동차의 것으로서 자기가 침범하지 말아야 하고 파란 등은 자기 영역으로서 건너도 되며, 선 안으로 걷는 동안은 안전하다는 의식이다. 아이는 비로소 횡단보도라는 언어를 통하여 안전지대를 발견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언어의 우주 창조기능을 설파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너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속에는 언어로 창조된 우주가 수없이 많이 들어있다. 달에게 달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달이고, 산은 산, 물은 물, 하늘은 하늘이라는 이름이 붙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 사물에서 이름을 싹 벗겨내면 과연 달이 달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아마도 하나의 백지 상태로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광대한 우주 속에 인간이 존재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떠난 우주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언어의 눈은 우주를 창조하고 다닌다. 습작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으랴!
[습작에세이 3] 낭인들
칠년 전 내가 조그만 문예지를 통해 등단할 때에 시인이 약 8천 명이고 수필가가 그의 반이고 소설가가 이천 명 가량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중에서 글로 밥을 먹고 사는 문인은 손꼽을 정도라나, 그러니깐 재능이나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글로 밥을 먹고 살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편집장의 말이었다. 애초부터 글밥을 기대하지 않았던 나였기에 씩 웃고 말았지만 씁쓸한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군소문예지의 난립으로 문인들이 급격히 증가했고 법석댔지만 어찌된 일인지 출판사는 독자에게 책을 팔아서 회사를 경영하기 보다는 몰려든 신인들에게 자비출판을 권유함으로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시를 한두 편 문예지에 실어주는 댓가로 책을 이삼십 권씩 팔아달라는 주문도 했으니, 우리나라 문예지의 열악한 실정을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유명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 되도 반짝 유명세만 탈 뿐 사정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글밥을 먹고 살며 몇 명이나 글로 생활을 한단 말인가,
떠오르는 대로 손꼽자면 일간지의 연재작가나 방송작가, 가끔 뜨는 대중소설 작가와 문학을 등에 업은 동네에서 나라의 지원금을 타내거나 독지가들이 세운 문학재단에서 일하는 소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 외에 어쩌다가 문운이 터져서 대박이 나고 그 세를 이어서 대학교의 교수자리나 하나 얻으면 성공한 셈이다. 내가 등단하여 작가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글에 대하여 문외한이던 누님이 말씀하였다. “대박이나 나서 대한민국을 홀딱 뒤집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평생 가난한 작가야.”
사실 나는 내일도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해야 한다. 이런 저런 일에 부딪치다보면 저녁에 녹초가 되기 일쑤고 매달 들어오는 문학잡지도 거들떠 볼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휴일에 겨우 책이나 자판에 매달리는 형편이니 인터넷에 이 정도 써서 올리는 일도 대견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 문학판의 현주소고 높은 기상과 열정은 가득하지만 연기 자욱한 골방의 낭인으로 전락되는 이유다.
얼마 전에 출판사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출판사의 편집장을 전전하던 친구는 자비출판을 없애고 전적인 기획출판을 꿈꾸었는데, 문학서적의 손익분기점은 동일 언어권의 인구가 1억이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그의 반 정도니 책을 팔아서 돈 벌 수는 없고 현상유지만 되면 성공이라는 그의 말이었다. 나는 1억의 인구라 할지라도 책을 사보는데 인색한 우리의 형편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사실 급격히 불어난 문인들의 숫자가 몇 만 명이라고 한다. 문인들이 많아지면 책도 당연히 많이 팔려야 하겠지만 너도 나도 자비출판에 뛰어들어 서로 책을 내는 형편이니 천 권의 시집을 출판하여 29권만 딱 팔린 사람도 있다나, 나머지는 옛날처럼 변소의 휴지로 쓰거나 어린애들이 딱지를 만들어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라서 짐으로 쌓이고 그러다가 폐지수집상에게 넘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그렇다고 치자. 자기 돈으로 그러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마는 작품의 완성도가 낮은 글들이 서점에 대거 몰려들어서 작가로서의 함량이 튼실한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출판한 작품들이 쓰레기에 묻히듯 매몰되어 독자의 눈에 띄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신인작가들뿐만 아니라 출판사의 책임도 크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출판사의 명성이 작가의 명성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작품의 서두에 붙이는 출판사의 서문은 작가와 출판사의 명성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기에 서문 하나로 독자는 작품의 질을 보장받는 셈이 된다. D시에 사는 어느 시인은 독자들에게 미안해서 책을 출판하지 않는다고 한다. 품질 나쁜 상품에 소비자들이 휘둘리고 있으며 얼마 안 가서 문학서적은 외면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일본 에도막부 시대의 칼잡이들처럼 우리의 문학계에도 낭인들만 늘어간다. 한 집 건너 시인 한 명, 두 집 건너 작가 한 명, 이런 추세라면 상대를 호칭하는 일반명사로서 노가다 판에서 들통을 지는 사람들에게도 어이, 박작가, 어이 김시인, 빨리 빨리 움직여, 하는 시대가 도래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설프더라도 문인들이 많다는 사실이 꼭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라도 글을 쓸 수 있고 작품을 생산할 수 있으며, 자기의 글을 앞세우기보다는 남의 글을 먼저 읽고 사유하는 문학적 풍토와 우리글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를 창조하는 도구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언어는 소수민족의 언어권에 속하기에 세계를 주름잡는 영어나 중국어 또는 유럽어에 의해서 쉽게 침탈당할 수 있고, 언어학자에 의하면 지금도 일 년에 수백 개의 소수민족 언어가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거의 전멸이 되었고 적도지방에 분포된 소수부족의 언어, 아마존 밀림 속의 언어들도 멸망의 시기를 눈앞에 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학자들이 소멸되어 가는 언어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유는 언어의 소멸만큼 다양한 인간의 사고와 정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거대한 언어권에 의한 획일화된 정신만 괴물처럼 남아서 판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우주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과 같이 많은 문학의 낭인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정절을 위하여 칼을 놓지 않았던 에도막부의 무사들처럼 말이다.
외롭지만 자기의 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 문학의 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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