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자시인의 시세계
시도 나무처럼 자란다. 무슨 나무가 될지 싹만 봐서는 모른다.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며 비바람에 시달리고 어둠에 떨기도 하면서 자꾸 자라야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노송이 아름다운 이유는 풍상에 다듬어진 몸매 때문이고, 바위를 뚫는 억센 뿌리의 인내로 기어이 견디어낸 세월 때문이다. 가지에 달을 걸고 산하를 굽어보는 노송의 자태는 신비롭고 경건하다. 시의 참 모습이다.
문학바탕 사이트에 2005년 1월 초부터 올려지기 시작한 미송의 시는 총 102편이다. 전체 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그것은 “갈증”이다. 어떤 문학작품이든지 작품 속에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시에서의 주인공은 “시적주체”다. 미송의 시적주체는 “갈증을 느끼는 중년여인”이다.
그대 나를 알게 하소서 / 미송 오정자
물을 얻기 위해 샘에 가면
샘물을 길어 올립니다.
그때
샘물만 길어 올리지 말고
향기도 같이 길어 올리도록 하소서.
(이하 생략)
미송의 시의 특징은 시어의 담대함이다. 일상 언어를 아주 대담하게 시어로 삽입하는데, 현란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런 시어의 대담성은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과감성과 갈증이 느껴진다.
더위를 피하여 / 미송 오정자
다닥 익어가는 불볕 더위에
불면의 하루가 흐무러지더이다
작년 이맘때던가?
황급히 떨던 고빗사위 기억을
대둔산 운주계곡에 첨벙 발 담그며
열기의 고행으로 식혀 본다.
한여름 쪼여오는 태양 중심에
쉽사리 가시지 않는 돌무덤 혼령이
차디찬 냉기 일랑 삼켜 먹어
더위에 구비치는 계곡물마저
열기 묻어 있어, 온 몸 시위하여
첨벙 뛰어들어 식혀보고 싶을 뿐이다.
얼른얼른 무리지은
송사리의 몸놀림이 들숲가 맴돌고
지난날 쉼 없이 빠져버린 낙엽의 속삭임이
거치른 유속에 흩어져 종알종알
오페라 음계로 화하더이다.
태양아! 멈추어 줄 것인가?
아름들이 나무 밑은 모두의 안식처일까?
겹겹이 무리지은 젊음의 벌거숭이
물위로 그악하여 더위 묻어보자꾸나.
이 시는 2005년 8월 5일에 올려졌다. 비로소 싹에 불과했던 미송의 시가 본연의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미송의 시는 도약하여 처절한 갈증의 세계를 달리기 시작한다. 천 개, 만 개의 시어를 다 동원해도 풀리지 않는 갈증, 샘에서 물은 길어 올려지는데 향기가 올라오지 않아 입술은 타 들어간다. 그래서 더욱 과감하고 대범하게 갈기듯 시를 써 내려간다. 근래에 올라오는 시도 역시 “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중년여인의 바싹 마른 입술”이다.
어찌 보면 미송은 대담하고 현란한 시어의 구사를 통한 문학적 실험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가 자라는 시나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바람 앞에 손을 내놓기도 하고, 내리는 비에 손바닥에 적셔보기도 할 것이다. 비바람이 없다면 스스로 비바람을 일으켜 몸을 떨어보기도 할 것이다. 미송의 시의 저변에 깔린 문학적 열정을 보면 충분히 그렇다.
시를 하나 더 소개하며 짧은 미송의 시세계의 여행을 마치려한다. 몇 년 후의 시는 어떻게 달라질까, 과연 어떤 모습으로 미송의 시나무가 자랐을까, 궁금해질 뿐이다.
사랑해야 할 이유 / 미송 오정자
난 알고 있다.
착하디 착한 사람들을
자신의 살을 베어 먹이면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아프다고 말도 하지 못한 채
소멸되어 가는 것과
마른 장작처럼 타들어가는
속태움속에서
흐르다 지쳐 말라버린
빛이 된 눈물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극도의 겸허함과
떨림의 평온함으로
생을 살아내는 그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유가
그들의 존재 안에 있다.
(미송의 열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20060409 글 / 이의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