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희선 <견해 1>

미송 2009. 3. 7. 09:06

[시마을 안희선 시인의 짧은 시평]

 

꽃사슴/ 오정자 


비는 사슴의 눈빛

먼 곳의 타전소리와 

가까이서 줍는 동전 한 닢

모든 것은 환영

그러므로 모든 것을 가게하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오게 한다

외토라 지지 않은 시간의 화해

갓 볶아낸 원두 향 짙은 아침은

열망에 지고 있는 그 여자의 한숨처럼 가볍고

하늘은 3월의 쪽지들을 날리는 중

돋을새김으로  일어난

전체 속의 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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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의 이미지를 참, 극명하게 그려내셨군요.
읽기에 따라서는 다소 추상적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시제에서 미리 시의 틀(프레임)을 제시하셨기에,
추상적 어휘가 오히려 생생한 현실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답지만, 왠지 슬프기도 한 꽃사슴의 모습...

환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그 모습에서 삶이 잉태하는 근원적 외로움도
엿보고 갑니다.

 

늑대와 여우 /오정자


 대체로 고요해 저 들꽃처럼

 

 붉은 해 파도 누구의 것이냐

 묻는 이 없다

 바라봄으로 채워지는 원리

 원근법 익혀 온 우리가

 거리가 구원을 준다는 데야

 가볍게 웃지

 별안간 찾아든 바람에

 호명되지 않은 자는 행복하다

 진군하는 생에 눈멀고

 파열되거나 해체되는 한 순간

 서로의 이름 부를 수 있다는 건

 나를 발견한 이후 최초의 기적

 

 흩어질 점

 한 곳 향해 앉을 수 있다면

 허울의 길 더 묻지 않으리

 둥지를 틀자 무명 숲에

 슬프나 담담한 짐승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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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에 설령, 관념처럼 읽혀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관념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에 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의 이 시에서 그것의 전형典型을 만나는 느낌이 드네요.

늑대와 여우에서 얼핏 연상되는 건 남자와 여자인데요.
그런 즉흥적 상상력을 배제排除하고서라도,
우선은 독자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게 한다는 점에서
시인 특유의 테크닉이 돋보입니다.

글쎄요...

들꽃, 붉은 해, 파도, 遠近法과 구원의 관계, 바람의 呼名,
진군해 오는 生, 파열과 해체의 순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최초의 기적, 흩어질 길과 허울의 길, 무명 숲의 둥지,
슬프나 담담한 짐승으로 숨가쁘게 전개되는 일련의
상징적 이미지들에서 삶이 엮어가는 그 어떤 파노라마를
보는 듯도 합니다.
어쩌면, 삶이 규정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픔으로서의
[서러운 순응順應]이라는 [한 의식意識]도 읽혀지구요.

그래요...

늑대와 여우는 그렇게 서로 상대를 통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영혼의 밑그림을 그려가는지도 모르겠어요.

 

 

 

江은/오정자


 

굽이쳐 들어도

좋다

 

새와 돌과 바람 찾아와

늘어놓는 이야기들

무던한 속살로 보듬어 갖고

오오랜 시간

지켜내는 고집이라

좋다 


빛바랜 치맛단에 담아놓은

먼 기억

잊지 않고 찾아온

구름과 별의

살아 있는 전설


높은 토운으로 소리치는 지금은

해빙기

 

갈라지고 녹아드는 하늘

어찌해도 어찌해도 사랑인 것을

긴 머리 풀고 누워

역사처럼 만남을 채우고

굽이마다 이름을 낳는

시작이며 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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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흘러가는 고집은 江만한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 고집이 좋다는 시인의 진술에서
결국 우리네 삶의 모습도 어쩔 수 없이 그 강의 흐름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낍니다.
(굽이쳐 들어도 좋다)

그 강에는 전설과도 같은 추억과,
매 순간 높은 톤으로
매듭을 풀어가는 해빙기 같은 현실과,
그 흐름의 끝에서 비로소 침묵처럼 만나게 되는
고요한 사랑이 있으니 말이죠.

정말...굽이마다 (역사의)이름을 낳는 시작이요,
끝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관조觀照가 江의 흐름을 통해,
삶의 의미를 현상現象케 하는
사유思惟의 힘이 탄탄합니다.

 

 

오래된 거짓말 / 오정자


들뜨지 않은 

은회색 하늘이 좋아요

희미한

들꽃 미소도 

 

아슴한 둔덕 

까치들

밤나무 향기들 

날아갑니다

 

추억은

당신 얼굴 같아

어깨 위 새들 노래하지요

 

강둑에 올라

이중경계에 굽히지 않을

새처럼 날아 볼까요

하늘이 흐리다고

운다 하지 마세요

 

국경 없는 비상은  

회색지대를 통과하는 것이라는

오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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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짓말은 신선한 거짓말이기도 해요.
항상, 새로움은 오래된 낡음에서 비롯되기에...

삶이 불현듯, 던지는 허망함은 그 자체를 의미하는
또 다른 허수아비로서의 작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의외로 가슴 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진실된 말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는
요즘의 이 까탈스런 시대에는 더욱 더...

 

사랑을 위한 감정평가/오정자


사소한 것으로도 잘 웃고 우는 우리가 최대 목적이 사랑이라면 말이지 사랑도 천국도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지 용감한 여자가 눈먼 여자가 빛과 어둠의 경계선을 확 무너뜨리는 건 솔직히 관능이 아니라 정신력이란 말이지 무기력한 화기애애나 분리된 이상향이 아니라 배신과 미움의 정글 숲을 뚫고 나가는 용기가 사랑의 힘이란 말이지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희망은 아니라 해도 자기만의 빛깔로 보이는 세계를 골똘히 침묵하며 생명처럼 지키는 힘이 사랑이란 말이지 그 보물을 발견한 여자는 말이지 요염하게 궁싯거린다는 말이지 시시 때때 밤낮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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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살아가며, '사랑'이라는 명분名分 아래
자신을 비롯해 남들에게 까지 아픔과 절망을
줄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 누구인들...
불행해지기 위해 하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다만, 사랑도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그런 뜻하지 아니 한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지기도
하곤 그러는 거겠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들의 가벼운 영혼이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해선 또, 그 '사랑'을
희망처럼 바라볼 수 밖에요...

그러하기에, 우리 각자에는 스스로에 알맞는 '사랑'을
위한 [감정평가]가 정말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최소한, 그 '사랑'을 원망하는 일은 없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살짝 비켜간 감도 있으나,
시를 읽고 나름대로 떠 오르는 생각의 단편斷片들이 있어
사설辭說을 늘어 놓고 갑니다.

어쨌던, '사랑'은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생명처럼 지키는 힘'이란 메세지에 고개를 끄덕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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