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일기

희선 <견해 4>

미송 2009. 9. 16. 10:41

낚는다는 것 / 오정자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목장갑 낀 손으로
쓰레기를 줍고
거리의 성자가 된
집게 든 손으로
신화의 숲을 더듬는다
그의 봉지에 든 하얀 이야기들마다
창백한 얼굴

그 어떤이가 가장 아끼는 한 아이
하릴없는 시를 주울 때
여름에서 가을로 갈 사랑처럼
비껴가는 아침이  
낚시줄에 걸려든 물고기로
아수라다

저, 갈빛 강가나
아찔찔한 바닷가에 서면
나는 왜 잡혀 온
시어가 생각날까

2009. 9. 15

 

 

少時적에 낚시를 한 적이 있었어요.
(민물낚시 + 바다낚시 약간)

지금은 접었지요.
언제나, 물고기들에게 내 얄팍한 속내를
들키곤 해서.

시어(詩漁? 詩語?)도 그런 것 같아요.

阿修羅 같은 잔챙이 말고 정말 대어를 낚으려면,
우선 시어 앞에서 무조건 겸허해 질 것.
내가 낚시꾼입네 하며... 시어 앞에서 거들먹대지 말 것.

 

 

 

허공의 산책 / 오정자

바람 묻은 창이 가을이다  
바람 냄새 발칙한
바람과 오래전부터 나는
바람과 화해하고 싶었다 신파를 몰고 온
바람과 내가 원래 하나였을 거라고
바람을 일으키려다 툭 떨어지던 잎들이
바람에 대한 경고를 던질 때마다 신소리처럼
바람이 웃는다
바람이 우는지 달싹인다
바람이 천박하거나 비참한 것에 대하여
바람이 고뇌이거나 쓸쓸한 것에 대하여
바람이 선지자처럼 달싹일 때
바람의 목소리가 가을이다
바람따라 도주하려던 머리를 돌려
바람을 쓰고 있다
바람과 나
바람을 쓰고 있는 나와
바람이었던 나
바람은 사치스럽고 벌레같고 절벽같고 외롭고
바람은 또한 나와 같아서  

 

 2009. 9. 13

 

 

바람 묻은 창이 가을이다
바람의 목소리가 가을이다
바람이었던 나
바람은 또한 나와 같아서

가을이 <바람의 목소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또, <내가 바람>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내가 가을>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래두, 시인이 그렇다면...
일단 귀를 기울여야겠지요.

다른 건 모르겠어요.
암튼, 시인이라면... 자기만의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

사실, 너무 그만 그만한 닮은 꼴의 글들을 많이 접하는데요. (제 글을 포함해서)
그런 면에서, 시인님은 확실히 福 받은 분 같기도 하구.

시의 全行을 '바람'의 初韻으로 펼치는,
思惟의 흐름이 좋으네요.

일찌기, 콜럼부스의 '달걀 세우기'에서도
깨닫게 되는 거지만...
남들이 못하는 거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브라만의 가을 / 오정자

 

고전의 우체통 닮은 자전거

위에만 올라타려는 여자의 뒷 엉덩이 살

토실한 것인지 껍데기만 남은 것인지

가을 뒷모습을 보다가 생각한다 마신다

잔은 비었고 블랙 톤 목소리 들린다 구월

어느 가을쯤 걸었을까 레이 찰스 (그는 검다 얼굴이 검다)

건반 나누기 식으로 생각했다면

시간의 철길은 없었을 것

가을은 지나가고 돌아온다

레이 찰스의 마지막 목소리 돌아간다

먼 것과 잊혀진 것 가까이에서 에머슨이 지금 말할 때

그 혹은 가을이 풀벌레가 되어 돌아왔다

날개가 되어 돌아온 벌레가

바람 등허리를 타고 쉬쉬 다가섰을 때 가을이 옷깃을 여민다

나는 의심하였고 의심이라서 의심 받아도 도리가 없지만

깨진 침묵에게 미안해 부르지 않았다

선선할리 없는 회의주의자의 계절이여

항변 없는 아침의 조용한 법도여

그렇게 가만히

탓할 이 없는 세계와 한모서리 봉합된 입술이 종알댈 때

행운은 깨어나 누구의 노래를 불렀을까 생각한다

헛되이 동경하는 신의 노래들이여

숲의 언어처럼 하늘마저 등 돌려 찾으려는 허망의 빛이여

완전한 수학으로도 월력의 계산으로도 불가능한 장애의 달에서

또 한 별 가을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곳에 살던 너 분명 나 일 것이나

글자들과 노래와 웃음의 날갯죽지와 손 움직임 외 나는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을이었고 가을은 없었다

 

2009. 10.1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을...

 

하지만, 그 가을에 환원還元될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우리들의 심경心境을

심도深度있게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시에서 말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한 생각 접어보자면...

 

우리들이 매일 짓는 詩라는 것도

허망한 삶이 품고 있는 심경에서 오는

신기루 같은 한 現象일까요.

(아, 그건 아니라구요? --- 네, 그래야 되겠지요)

 

암튼, 시인님...

굳이, 시인들의 비유적인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두

지금은 우리들에겐 명백한 가을인 거죠.

(이 우주가 제 아무리 말하길... 가을 같은 건 없다고 해두)

또, 대한민국엔 <가을의 꽃> 같은 추석도 가까와 오잖아요.

 

즐거운 일 하나 없는, 세상이지만... (아, 저만 그런가요? --- 웃음)

어쨌던, 마음만은 푸근한 한가위가 되시길요.

 


 

당신이거나 혹, 새 소리 / 오정자 

남해 띠푸리 네 마리와 샘표 국간장을 넣어
미역국을 끓이다 아침 이성복시인의
아, 입이 없는 것들이란 시를 읽은 난
밥상머리에 시를 놓았다
그 남자 그 순간 왜 방귀를 뀌었을까
그 소리 하도 희한 요란해 난
그 조악(錯愕)한 얼굴 죄다 가리고 웃었다

회음부로 앉아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지는 저 꽃, 했을 때
청양고추 목에 걸린 냥 그 남자 형이하학 소리가
부루루루룽 붕붕붕 날아가는 소리가
왜 그리 컸을까
길었을까

아, 입이 없는 것들이란
민감한 아주 민감한 침묵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침부터 그렇게 요란한 방귀소리는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의
따가워 맞기 힘겨운 최음제인가
벽 허무는 굉음의 역성(逆成)인가

그래도 낫다
당신 우렁찬 방귀소리가
나, 꽉 막힌 똥 같은 시보다

2009. 10. 6  오정자

그러게요,

가끔, 입이 없는 것들이 내는 소리들은
그 중의 한 마디도 바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發音되고 동시에, 모든 잡음의 방해를 받기도 하는...
불가사의한 말(言)들로 感知되기도 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성복의 시보담
오늘의 이 시가 더 다가오네요.
생생한 생활 속에서 낚아올린,
시 한편 같아서.

저두, 시에 관한 한
지독한 변비이지만...

그래두 시인님은 이렇게 시로
풀어내시니, 부럽기도 하구.

잘, 감상하고 갑니다. 
 


물꽃 / 오정자

 

 

어제 본 겨울 바다
대금 소리 얼얼하니
홀로 앉은 저녁 강
붉게 타오르네

베일 것 같은 정절로
그리움과 만난다는 것,
먼 우주의 별 하나가
다른 우주의 별 하나와
강물로 빠져드는 일이라서
꽃은 눈썹을 그리지 않네

해갈된 길 사이로
피어난 물꽃,

 

그 언제인가...이 맘때에
김포 쪽의 한강 하구河口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노을빛 江길을 본 적이 있었죠.

강이 그리는, 그 붉은 물꽃 길에서...

정말, 오직 한 길로
그리움과 만난다는 건
꼭 저러 하리라고 생각되었구요.

그리움의 꽃은
그 깊은 눈망울만으로도 충분하지요.
눈썹이 없어도, 모든 걸 다 말해주니까.

잘, 감상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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