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질 들뢰즈의 감각론과 의미의 논리

미송 2010. 7. 27. 23:13

◎ 들뢰즈의 감각론

 

고대의 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aisthesis)를 이데아 세계에 비해 존재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겼다. 이어 근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아이스테시스를이성의 반대편에 두고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학적으로 폄하하고 배제했다. 18세기에 이르러 바움가르텐에 의해 아이스테시스가 구제되나, 이때조차 여전히 합리적 이성 아래에 놓인 저급한 인식에 불과했다.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는아이스테시스에 대한 이성의 우위라는 이 수천 년 묵은 도식을 뒤집는 극적 반전이다.

 

들뢰즈가 말하는감각(sensation)'이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의미의지각(perception)'과 구별된다.지각이 감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정신으로 퍼올리는 인식론적 현상이라면, 감각은 감관에서 직접 몸으로 내려가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감각론

 

들뢰즈의 근대 미학에 대한 해체 작업은 곧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이자 해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자신의 감각론을 위해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선택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끔찍하고 충격적이다. 주목할 것은, 그 효과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의 기괴한 형상들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로써 우리에게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매개해준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적 효과가 아니라 존재론적 효과이다.

 

 

◎ 재현의 파괴, ‘형상트랙

 

재현성을 파괴하기 위해 베이컨이 선택한 방식은 구상과 비구상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는 정형도 비정형도 아닌 기괴한 형상(le figural)의 창조를 통해 구상성(le figuratif)을 파괴하려 한다. 가령 베이컨의 작품 속에는 동물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무정형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 결과 화폭에는 충격적 형상들이 발생하고, 이 형상들은 두뇌를 통과하지 않고 우리의 신경 시스템에 직접 작용한다.

베이컨은 동그라미, 입방체 혹은 트랙을 이용해 형상을 고립시키고, 이로써 형상이 그림 속의 다른 요소들과 서사적 연관을 맺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의 작품 안에는 종종 둘 이상의 형상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때조차 작품 속의 형상들은 서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 이로써 전통적인 재현의 방식,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 즉 유사성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는 서사적 관계가 베이컨에게서는 파괴된다.

 

 

◎ 감각의 폭력

 

재현을 포기하고 베이컨이 그리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감각이다. 그의 그림 속의 기괴한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 형상, 즉 충격적인 형태와 색채의 효과로 우리를 감각의 체험 속으로 몰아넣는 어떤 모양일 뿐이다.베이컨의 회화는 폭력적이지만, 그것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회화를 통해 비롯되는 폭력이다. 회화의 폭력’, ‘감각의 폭력이다. 감각은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가 되는 현상이다. 베이컨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끔찍한 신체는 충격 효과로써 내 감각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그런 감각을 느끼는 순간의 내 신체의 상태이기도 하다.

 

 

◎ 기관 없는 신체

 

들뢰즈는기관 없는 신체를 막 부화하고 있는 달걀의 내부 상태에 비유한다. 감각의 주체로서의 신체는 바로 이 부화 중인 달걀과 같다. 우리의 몸은 기관을 갖추고 있으나 감각하는 순간 우리 몸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베이컨은기관 없는 신체가 등장하는 작품과 그 충격을 통해 인간의 밑바탕에 잠재한 원초적인 감각을 다시 보게 하는 효과를 준다.

 

◎ 베이컨의 회화 기법과 작품 세계

 

베이컨의 그림에서 동물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베이컨이 표현하는 인간의 동물 되기는 단순한 짐승에 대한 연민도, 화해도, 닮음도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동일화며, 모든 감정적인 동화보다 훨씬 깊은 비구분의 영역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동물-되기는 단순한 외적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닮기, 미메시스이다. 이때동물-되기는 동물의 수준으로 돌아가는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이다. 베이컨은 신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얼굴을 형상에서 지움으로써 또 한번 탈영토화를 시도한다. ‘얼굴의 해체는 소위주체의 해체이다. 오감이 모여 있는 거대한 안테나인 얼굴을 지움으로써 그 밑에 숨어있던 원초적인 신체의 감각 기관이 통째로 올라오는 것이다.

 

베이컨은 윤곽이 아니라 색채로 작업을 한다. 전통적 데생의 방법에서 벗어나 손으로 물감을 뿌리거나 문질러 우연의 효과를 도입하지만 전부 우연에 맡겨버리는 것은 아니다. 즉 눈도, 손도 아닌, 만지는 눈, 눈의 만지는 시각이라는 독특한 길을 개척한다. 베이컨의 작품은 도상/상징/지표라는 전통적 분류에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 속한다. 바로 이 기호적 특이성에서 그가 구상과 추상 사이의 줄타기에서 얼마나 독창적인 회화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다.

 

◎ 유물론적 숭고 미학

 

들뢰즈에게 회화는 단순히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회화는 감각의 폭력을 통해신체의 변형을 이룬다. 즉 그에게 미학은예술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변화시키는 삶의 예술로서의 감각론이다. 베이컨의 작품과 감각론은 작품이 관람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영향 미학이라 할 수도 있다. 또 이것은신체의 존재 체험으로서의 숭고 미학이다.

 

진중권 <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 강의 노트 중

 

 

[새로읽는 고전]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서강대 철학과 교수〉

 

우리는 흔히 사물을 실체와 성질로 나누어 본다.사과는 실체이고 그 모양,색깔, 맛 등은 성질이다.그러나 실체도 성질도 아닌 것,이 세상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것,그리고 반복되는 것,이런 존재가 있다.들뢰즈는 바로 이런 존재,즉 「사건」을 사유하고자 한다.

 

 

사건

우리의 사유를 좌절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다.세계는 존재할 수도 있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그런데 존재하게 되었다.그런데 이 존재하게 됨'은 하나의 실체도,또 성질도 아니다.그것은 사건(事件)이다.

 

사건의 특성

보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있었다.우리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대관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화려한 궁전 안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주교의 손에는 왕관이 들려 있었다.즉,사물들이 존재했다.사람들의 옷 색깔은 화려했고,주교의 모자는 독특한 모양새를 띠었고,왕관은 환하게 빛났다.즉,사물들의 다양한 성질이 존재했다.왕관이 나폴레옹의 머리에 얹힌다.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왕관이 얹히는 순간 사람들의 수가 증가했는가.특정한 의자가 사라졌는가.아니면,사람들의 옷 색깔이 변했는가.주교의 모자 모양이 바뀌었는가.왕관의 빛이 사라졌는가.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모든 사물,모든 성질은 그대로다.그럼에도 왕관이 나폴레옹의 머리에 얹힌 그 순간적 운동,즉 순간적으로 발생했다가 사라진 그 행위 자체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형성한다.그 사건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사건은 왕관이 나폴레옹의 머리에 얹히는 바로 그 순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그럼에도 그 모든 일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다.사건은 순간적인 것이다.그럼에도 우리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사건들이다.이 점에서 전통철학이 사건을 충분히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유감이다.

 

사건과 반복

사건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장종훈이 홈런을 칠 때의 「딱」소리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홈런을 치는 상황 자체도 마찬가지다.사물(타자 공 심판 등)도 성질(장종훈의 생김새,공의 모양,심판의 옷 색깔 등)도 변하지 않았다.단지 순간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가 사라진 것이다.그러나 사건은 반복된다.세 경기 뒤에 장종훈이 다시 홈런을 쳤다면,「딱」소리와 홈런을 치는 상황은 재현(再現)된다.수십년 전에 루 게릭과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쳤을 때,오늘날 장종훈과 이승엽이 홈런을 칠 때 똑같은 사건들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사건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어디에서인가 다시 나타난다.들뢰즈의 「의미의 논리」(1969)는 바로 이 사건 개념을 탐구한다.

 

사건과 의미

사건은 또한 의미이기도 하다.물론 사건은 일차적으로 물질적 과정이다.

나폴레옹의 머리에 왕관이라는 금속이 얹히는 것, 야구방망이가 공과 부딪쳐 「딱」 소리가 나고 공이 멀리 날아가는 것은 물질적 과정이다. 그러나 사건은 동시에 의미이기도 하다.나폴레옹의 머리에 왕관이 얹힌 것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유럽에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종훈의 방망이가 공과 부딪쳐 공이 멀리 날아간 것은 `장종훈이 올해의 홈런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물질의 차원과 의미의 차원은 이렇게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물질을 관념의 차원에,관념을 물질의 차원에 환원시키려는 시도들은 빗나간 사유들이다.물질의 운동이 의미를 동반하며,또 의미를 통해서만 물질의 운동은 이해되는 것이다.이 점이 「의미의 논리」가 전개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유다.

역동적 구조주의로서의 사건의 존재론 사건의 존재론은 칸트 이래 전개되어 온 주체의 철학,내면의 철학을 비판한다.세계는 사건으로 구성된다.그리고 이 사건들은 계열화(系列化)된다

 

예컨대 한 반체제 인사가 어떤 건물 아래를 지나다 위에서 떨어진 벽돌을 맞았을 때,

그 사건 자체는 물리적 사건이다.그러나 이 사건이 한달 전에 있었던 사건 즉 그 반체제 인사가 정부의 한 고위관리를 비판했던 사건과 계열화될 때,그리고 한달 뒤의 사건 즉 민주혁명이라는 사건과 계열화될 때 그 사건의 의미는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다시 말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계열화됨으로써 의미체계를 형성하며,인간·주체는 이렇게 형성된 계열들의 그물 안에서만 행위하고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이 점에서 들뢰즈의 사유는 주체가 의미를 `구성한다'보는 주체·내면의 철학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구조주의적 사유에 근접한다.그러나 들뢰즈는 고전적 형태의 구조주의가 시간,우연,특수성 등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사유할 수 없다고 보고,보다 역동적인 형태의 구조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사유는 푸코의 계보학,셰르의 인식론,

`아비투스'의 사회학,르네 봄의 카타스트로피 이론,프티로의 언어학 등과

더불어 후기 구조주의,역동적 구조주의를 대변한다.특히 이들 중에서도

 들뢰즈의 사유는 후기 구조주의의 가장 깊은 차원,즉 존재론의 차원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건의 존재론에서 욕망의 세계사로

「의미의 논리」는 68년에 발표된 「차이와 반복」과 더불어 들뢰즈의 대표적인 주저를 이룬다.들뢰즈가 이 저작들에서 전개한 논리는 흔히 「사건의 존재론」또는 「차이의 존재론」이라고 불리며,이 존재론은 오늘날의 철학을 대표하는 핵심적 사유다

 

그리고 이 사건·차이 개념은 후에 「욕망」의 개념으로 변환된다.들뢰즈는 가타리와 더불어 저술한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이 욕망 개념을 토대로 해 세계사를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는 존재론이라고 하는 순수철학 분야와 역사의 사유라고 하는 보다 실천적이고 시사적(時事的)인 분야에 동시에 공헌한 보기 드문 예를 남기게 되었다.

 

 

 

미메시스 - 플라톤에서 이데아와 개물()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모방()·흉내와 함께 예술적 표현도 의미하는 수사학()·미학 용어다. BC 5세기경 피타고라스파()에 따르면 음악은 수()의 미메세스(모방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플라톤은 여러 가지 개체()는 개체가 되도록 한 형상(: idea)을 흉내낸다고 하여, 이에 의해서 현상계()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이유로 삼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계는 원형의 모방이다. 그는 주요저서 《국가론()》에서 목수나 화가나 작가가 모두가 집을 짓지만, 목수의 집에 비교해서 화가나 작가의 집은 허구()이며, 이것을 가상()이라 하여 예술을 소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을 플라톤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시학()》에서 오히려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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