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오쇼의 강의 <반야심경>

미송 2010. 6. 17. 13:08

오쇼의 강의: 지나친 정상인이 되지 말라

 

다섯 번째 질문

 

정치가와 성직자, 그리고 기득권층인 자본가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당신의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먼저, 나는 이상적인 사회에 관심이 없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이상적인 개인에게도 관심이 없다. 내게 있어서 '이상(理想)'이라는 단어는 아주 더러운 말이다. 내게는 아무 이상도 없다. 이상은 그대를 광적인 상태로 몰아 간다. 이 지구 전체를 거대한 정신 병원으로 만든 주범이 바로 이상이다.

 

이상은 '나는 이러저러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긴장과 불안, 고뇌를 창조한다. 이것이 그대를 분열시키고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든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데 이상은 미래에 가 있다. 이상이란 '먼저 이상적인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어떻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이상은 '먼저 이상적인 존재가 되라.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뜻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사물의 이치상 일어날 수 없다.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상인 것이다. 이상은 그대를 미치광이 상태로 몰아간다. 이상이 있으면 그대 자신에 대한 비난이 떠오른다. 왜냐 하면 그대는 언제나 이상에 못 비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책감이 생겨난다. 실제로 정치가와 성직자들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메커니즘이다. 먼저 이상을 심어주면 죄책감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가령, 내가 그대에게 '두 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세 개의 눈이 필요하다. 롭상 람파 (티벳의 신비한 이야기를 다루는 근대의 저자, <제 3의 눈> 외에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를 읽고 제 삼의 눈을 열어라!' 하고 말한다고 하자. 이 말을 듣고 그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열심히 노력한다. 물구나무를 서는가 하면 주문을 외운다. 그래도 제 삼의 눈은 열리지 않는다. 이제 그대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대는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절망한다. 제 삼의 눈을 열심히 부벼 보지만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다.

 

이런 넌센스를 경계하라. 이 두 눈은 아름답디. 그대에게 하나의 눈 밖에 없다 해도 그것으로 완벽하다. 예수는 '두 눈이 하나가 되면 몸 전체가 빛으로 충만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두 눈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받아들여라. 신은 그대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신은 그대 안에 어느 것 하나 미완성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만일 그대가 미완성된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완벽함의 일부이다. 그대는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신은 그대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오직 불완전 안에서만 성장과 흐름이 있으며, 오직 불완전 안에서만 무슨 일인가 가능하다는 것을 신은 잘 알고 있다. 만일 그대가 완벽한 존재라면 돌처럼 굳어 버렸을 것이다. 그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 일도 가능하지 않다.

 

<중 략>

 

다음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 

 

칼뱅이 중대한 죄를 저지른 것이 엄마에게 발각되었다. 엄마가 즉시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라고 했다. 

칼뱅이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 저는 자위행위를 했습니다."

신부가 소리쳤다.

"왜 그딴 짓을 했어?"

"그보다 더 나은 일이 없었거든요."

"죄의 대가로 '아베마리아'를 다섯 번 암송하거라."

1주일 후, 칼뱅은 다시 엄마에게 발각되었고 또 고해성사를 하러 성당에 가야 했다.

"신부님, 저는 또 자위 행위를 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어?"

"그보다 나은 일이 없었거든요."

"죄의 대가로 '아베마리아'를 열 번 암송하도록 해라."

다음 주에 칼뱅은 다시 죄를 지었다.

엄마가 말했다.

"다시 가서 고해성사를 해라. 그리고 가는 길에 이 초코렛 케이크를 신부님께 갖다 드리거라."

그러나 고해성사를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칼뱅은 기다리다 지쳐서 케이크를 먹어 버렸다.

고해실에 들어간 칼뱅이 말했다. 

"신부님, 엄마가 초콜릿 케이크를 갖다 드리라고 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먹어 버렸습니다. "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보다 나은 일이 없었거든요."

그때, 신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위 행위가 있잖아!"

 

성직자는 그대가 무슨 짓을 하건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 초콜릿 케이크에 관심이 있다. 그는 내심 이렇게 말한다. "네가 지옥에 가든 말든 상관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그런데 내 초콜렛 케이크는 어디 있지?"

 

성직자들은 죄의식을 창조한다. 그러고 나서 신의 이름 아래 그대를 용서한다. 그들은 먼저 그대를 죄인으로 만들고 나서 '이제 그리스도에게 오라. 그분이 구세주이시다.' 하고 소리친다. 그대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시당초 그대는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구원받았다! 이것이 붓다의 메시지이다. 그대는 죄인이 아니므로 구세주가 필요없다.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으며, 고통의 멈춤도 없고, 고통을 없애는 길도 없다.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다. 그대의 본성 자체가 깨달음이다. 나는 어떠한 이상 사회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꿈은 버려라. 이상이 세상을 끔찍한 악몽으로 만든 주범이다. 명심하라. 이제 정치적으로는 아무 일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는 죽었다. 우익에 투표하든 죄익에 투표하든 뭔가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라. 어떤 제도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공산주의, 파시즘, 간디즘 등 어떠한 제도도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어떠한 사회도 이상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 크리슈나, 라마 등의 구세주는 없다. 죄책감과 관계된 모든 넌센스를 버려라.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버려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춤과 축제에 이용하라. 그러면 그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상적인 존재이다. 따로 이상적인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 이데올로기에서 진리는 사라졌다. 사실, 이데올로기 안에는 애초부터 진리가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설득력을 읽었다. 이제 이데올로기를 통해 청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적 장치를 통해 유투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 인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수준이 아니다. 인류는 한층 더 성숙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시대처럼 중요한 삶의 문제들을 묻고 있다. 미래의 이상향이나 완벽함을 구하지 말라. 모든 이상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살아라. 

 

나의 공동체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공동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오늘은 이만.    

 

   

 오쇼라즈니쉬의 강의 <반야심경 245~251쪽>

 

*타이핑 : 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