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석도 일획론

미송 2010. 8. 16. 14:56

석도 일획론

太古 때에는 文明이 미개하여 법(화법)이 없었다. 원시적인 상태에는 순박한 자연이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이 순박한 자연이 한번 흩어짐으로써 법이 자연히 세워졌다. 이법이 어디에 어찌하여 세워졌을까. 그것은 일획을 긋는 데서 세워졌고, 일획을 그리는 것은 만획의 근본이고, 만상의 근원이 된다. 이 일획의 신비함은 자연의 경지에서만 보이며, 사람들의 눈에는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

 

고로 일획의 원리와 방법은 태고에 스스로 세워진 것이다. 일획법을 이해한 사람은 한가지를 알면 열 가지를 통한다. 대개 회화란 화가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을 화법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산천인물의 造化, 조수초목의 性情, 연못정자누대의 구도矩度가 그 理致와 形態를 곡진히 알지 못하면, 일획의 폭넓은 의미를 터득 할 수가 없다.

 

멀리 가는 것도 높이 오르는 것도 모두 한걸음에서 시작 된다.  이 일획은 洪朦(천지자연)의 밖에 있는 것 까지 포함하여 모든 필묵선이 이 일획으로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일획법을 잘 파악하여 활용할 따름이다.

화가가 일획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면, 기교가 미약 할지라도, 마음(意景)이 분명하면 용필에 필세를 얻을수 있다. 솜씨가 虛하면 획은 올바르지 아니하며, 획이 올바르지 아니하면, 솜씨가 神靈하지 아니 한다.

 

붓의 움직임이 빠르고, 꾸밈새가 매끄럽고, 자리 잡음이 편하며, 또 붓이 나아감이 끊는듯 하고, 들어옴에 들듯이 하고, 둥글고 모날 수 있으며, 곧고 굽을 수 있으며, 오르고 내릴 수 있으며, 좌우가 균제하고, 요철이 있고, 단절횡사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 가듯하고,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하며, 자연스러움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아니 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용필은 신묘하게 되며, 이치는 통하지 아니 한 것이 없게 되고 형태가 곡진하게 된다. 대개 원시 상태의 순박함이 스스로 흩어지고 나서부터 일획의 법이 세워졌고, 일획의 법이 세워짐으로써 만물의 화법이 밝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도로 모든 도를 통한다"

요약

1. 太古때는 혼돈으로 구체적 물상이 없고, 법도 없었다.

2. 자연의 순박함(太朴)이 흩어지자 자연히 질서(法)가 만들어졌고, 그법을 회화에서는 일획법이라 한다. ”일획은 만상의 기본이기 때문 임.”

3. 일획법은 석도가 발현 했다. 법은 만상이 생산됨에 따라 만들어짐을 터득함. 그리고 각종 구체적 법은 하나의 근본법칙(一劃法)이 있는 것을 알았다.

 

4. 그림은 화가의 마음을 통해 지배된다. 산천인물의 造化, 조수초목의 性情, 연못정자누대의 矩度(構造)가 그 理致와 形態를 곡진히 알지 못하면 일획의 폭넓은 의미를 터득 할 수가 없다.

 

5. 화가는 일획이란 근본 법칙을 장악하고 운용하여야 意明筆透 하고, 創作의 경지에 도달하고, 信手一揮 하여 만물의 運情 摹景 顯露 隱含 하여, 선명한 만물의 圖像을 창조 해 낼수 있다.

 

 

[석도]의 일획론

 

[석도]의 종장에 이르면(355페이-) 그의 일획론이 탄생하는 대목에 이른다.

 

이는 ‘석도’의 화가로서의 근원이며 미학의 기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어록畵語錄’중에 나오는 그의 일획론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남경에서 돌아온 후에 석도는 제법 많은 그림을 그렸다. 시간을 더욱 아끼는 모습이 저물어가는 인생에 대해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묵필매화도축 墨筆梅花圖軸]과 [광산독서도 匡山讀書圖]를 그리고, [산수책]을 엮었다. 그는 한순간에 무수한 깨닮음을 얻었다.

 

“고상아, 내가 아주 사치스런 생각을 했구나.”

고상은 스승을 응시했다. 말을 아끼는 그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쓸데없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책을 한 권 쓰고 싶구나.” 석도는 고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시인에게 시화詩話와 시론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화어록畵語錄’이라 하고 싶다.

아, 열몇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벌써 50여 년이 지났구나. 최근에 나와 그림의 관계는 마치 한 쌍의 원수 같은 연인과 다를 바 없다.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알 수는 없고, 알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연인 말이다.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알 수는 없고, 알지만 함께할 수 없는 연인 말이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늘 엷은 장막이나 희뿌연한 안개가 드리워 있어서 바라 볼 수는 있지만 다가 갈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그녀와 진정으로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된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이는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가까워 질수록 가까운 듯 먼 듯 느껴질뿐이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기왕 이렇게 가까워진 이상,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구나. 단지 후세 사람들에게 그것에 대해 더욱 명확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갈망이다.”

 

“좋은 생각입니다.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왜 없겠느냐? ‘이 속에 참된 의미 있어, 말하고자 하나 문득 말을 잊어버리네’라는 도연명의 시구가 바로 내가 처한 난처함을 잘 설명하는 것 같구나.”

“그러면 스승님은 회화의 가장 기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고상은 스승의 사고에 자극을 주어 영감을 불러일으킬 작정이었다.

 

“일획이다. 어떤 그림이든 모두 일획에서 시작하지. 하지만 이 일획은 천지 밖의 억만 개의 필묵을 수용한다. 이른바 그림이란 필묵을 버리고서 어찌 그 형체를 이를 수 있느냐? 이 일획은 보통 사람이 그린 평범한 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세계와 인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이며, 그리고자 하는 그림 전체에 대한 창조적인 기초이다. 그리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일획이 만들어지고, 작품의 우열과 평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면 일획론에서 시작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말하고 보니 속이 확 뚫리는 것 같구나. 장법의 왜곡과 조화, 필묵의 건조함과 촉촉함, 개성의 평이함과 기이함 등은 모두 이 지점에서 점차 외연을 확대해도 되겠구나.”

“정말로 근사한 일입니다. 스승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붓이 마르면 아름답고, 붓에 물기가 많으면 속되다’, ‘생활의 선’, ‘교양의 영혼’ 등과 같은 것이지요.

스승님께서 이러한 내용을 쓰신다면 그것은 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말씀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벌써 장과 절이 일목요연하게 나누어져 있단다.”

석도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보아라, 일획을 기초로 삼은 연후에 요법了法, 변화, 존수尊受, 인온氤氳, 필묵, 운완運腕, 준법, 경계, 혜경謑經이 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산천, 임목林木, 해도海濤, 사시四時, 원진遠塵, 탈속, 겸자兼字, 자임資任이 있다. 이렇게 한 章씩 써가는 것이다.”

“맞습니다. 매 장마다 스승님만의 독특한 견해를 밝혀 스승님의 화론을 이룩해야 합니다. “

“네 말이 맞다. 내 머리속은 더욱 명확해졌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런 거라면 저는 스승님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화법을 어떻게 귀납하실 겁니까? 회화란 결국 기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지. 나도 알고 있다. 내 그림이 선배 화가들의 격식을 돌파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 중년 이후로 나는 ‘어떤 법도 세우지 않고, 어떤 법도 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나 자신의 기법이 가둔 상투성을 돌파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지금은 말이다, 지금의 사고는 이렇게 개괄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법이던 아니든 나의 법을 이룬다’고 말이다.”

“법이든 아니든 나의 법을 이룬다고요?”

“그렇다.” 석도는 고상에게 이 말의 의미를 설명했다. “나의 법은 법이기도 하고 또한 법이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법도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법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또한 법이 아니다. 법과 비법의 사이에서 화가는 마치 외줄 위를 걷는 곡예사와 같다. 다 걷고 나면 천하의 大美로 걸어갈 수 있다.

더 걷지 못하고 떨어지면 大俗이 된다. 이것이 바로 화가의 고통이 생겨나는 근원이다. 결국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더냐?”

“혹시 알고 계세요? 사람들이 스승님의 아호를 지었다는 사실을요.”

“아호를?”

“예, 스승님을 三絶이라 부르지요. 시. 서. 화 세가지에 모두 뛰어나다고요. 제 생각에는 오늘부터 사절이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論絶을 더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 혹여 三痴라고 부르면 모를까. 시에 미치고, 그림에 미치고, 글씨에 미쳤다고 말이다.”

 

(화어록 359페이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