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미송 2010. 10. 29. 17:00

『설법』- 도서출판 솔바람 2004년 6월호 원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때 코살라국의 왕 파세익왕은 자기 자신을 가만히 생각한 뒤 왕비 말리부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자기 이상으로 더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있다고 여깁니까?”
“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저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말리부인! 나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왕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부처님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 이야기를 전하고 

‘그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다. 부처님께서 ‘옳은 말이다’라고 답한 것을 사신이 왕에게 아뢰자, 왕은 자신이 직접 묻겠다고 부처님이 머무시던 기원정사로 찾아왔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전과 다름없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셨다.

 

 

마음 속,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내가 이러하듯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기에 제 몸을 아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남을 해쳐서는 않된다.         

『우다나(無問自說經)』

 

 

오래 전, TV 사극에서 후백제 견훤이 자신의 아들 금강태자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아파하며 애통해 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 사극을 보면서 불교의 귀자모(鬼子母)이야기가 떠올랐다. 부처님 재세시 ‘귀자모’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포악한 야차(夜叉;귀신의 일종)녀로 동네의 많은 아기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야차녀에게 아들을 잃은 여인들은 비통해 하며 부처님께 와서 하소연을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귀자모여인의 고약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귀자모의 자식 중 한명을 몰래 감추었다. 귀자모 여인이 집에 돌아와 자식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정신이 반 나간 채 아기 이름을 부르며 찾아 다녔다. 마침 길에서 부처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야차녀는 자신의 악행은 까마득히 잊고 부처님께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달라고 하소연을 한다. 이 때 부처님께서 야차녀에게 아기를 되돌려 주며 말씀하셨다.

 

 

“너의 많고 많은 자식 중에 
겨우 한명을 잃었다고 몹시도 슬퍼하는구나. 
너에게 자식을 잡아먹힌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너의 아기가 그렇게 소중하듯이 
다른 여인들의 아기도 소중한 것이다.
네가 그 점을 알고, 절대 남의 자식을 해쳐서는 안된다.”

 

 

라고 하며 야차녀를 제도하셨다. 이후 귀자모여인은 다른 여인들의 자식들을 사랑하였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옹호하고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신장이 되었다. 사극을 통해, 백제의 견훤이 아버지로써 자식 잃은 슬픔에 서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애석하고 어리석은 것이 중생이구나!’를 절감했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와 고구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의 귀한 자식을 전쟁터로 내몰았던가? 후백제의 견훤처럼 나라를 세운다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명예와 탐욕을 채우며 자기 자식 귀한 줄은 알아도 남의 자식 소중한 줄을 모르는 것이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작년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과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전쟁을 치루면서(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이지만) 자기 자식을 전쟁터의 군인으로 내보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이들의 모습에 딱 들어맞는 가르침이 『법구경』(129)에 있다.

 

모든 생명은 폭력을 무서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러한 이치를 자신에게 견주어서 

모든 생명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거나 죽이지 말라.  
    

앞의 『우다나』게송에서 부처님이 설한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타인도 그럴 것이고,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은 타인도 하기 싫어함을 내포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은 자기 잘난 줄만 알지 타인이 잘난 줄은 알지 못하며 자신의 아픔이 큰 줄만 알지 남의 고통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다.

 

 

인도인들의 인사법 가운데 ‘나마스테’, 혹 ‘나마스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신 가슴 속에 담긴 소중한 영혼에 절을 합니다.’라는 의미이다. 상대방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두 손을 정성스럽게 모아 상대방에게 합장하며 인사하는 것이 당연한 제스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전철 안에서나 길가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포교나 설교하는 것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승복을 입고 있는 승려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필자에게 다가와 ‘불교를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면서 개종해야 한다고 거품을 내품으며 역설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왜 그들은 자신의 종교가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안다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고 최고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지?, 바로 이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렇게도 강조하는 아만심, 즉 아상(我相)을 무너뜨린다면 바로 그 자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자신을 주축으로 하는 중심사고에서 벗어나고 아집이 깨어지는 그 순간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밉고 고운 분별심이 사라지며 번뇌가 곧 보리인 불이(不二)의 자리, 즉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대승경전의 꽃이라 하는 『법화경』「상불경보살품」에 등장하는 상불경常不輕보살은 스님들을 만나거나 일반재가불자 누구든 만나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그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나니 그대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합장 공경하였다. 이런 말을 한다고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예를 갖추었다. 실은 바로 이것이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외쳤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독불장군처럼 자기만을 내세우거나 최고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한 존재라고 여긴다면 타인도 귀한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고 인식하라’는 것이다.

 

 

내 목숨이 귀하면 타인의 목숨도 귀한 것이며, 
내 물건이 소중하면 타인의 물건도 소중하다.  
내 자식이 잘났으면 남의 자식도 잘났고, 

내 종교가 최고라면 타인이 믿고 있는 종교도 최고인 것이다.      
    

 

주) 『불설귀자모경佛說鬼子母經』에 수록되어 있으며, 『법화경』「다라니품」에 귀자모와 그 권속들이 부처님께 ‘법화행자를 옹호하고 수호하겠다’고 서원을 세우는 부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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