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의 문학산책로
이 정문
해변에서 약 10분을 걸어 내려와 4차선 도로 입구에 서면 양쪽으로 소나무 묘목이며 감자며 대파며 배추를 심었던 밭이 겨울의 먼지바람 아래 을씨년스럽게 드러나고, 차량통행이 뜸한 맞은편 길을 3백 미터쯤 걷다가, 오른쪽 적송나무 아래로 난 길을 또 5십여 미터쯤 따라 들어가면 조선시대 때 지어진 고가(古家)가 나타나는데, 정확하게 이곳이 허난설헌과 허균이 살았던 집은 아니고 다만 그 집이 지어지기 이전에 그들이 살았던 생가터라고 한다. 왼쪽 저쯤에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보이고 그 앞에 깔린 잔디를 비스듬히 둘러 허씨가문 오문장가, 초당 허엽과 그의 자식인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서 있다. 고가의 솟을대문 앞을 스쳐서 청설모가 뛰노는 솔밭 샛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별안간 앞이 툭 트이며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뵈고, 이 경포 호를 빙 도는 산책로를 만나게 된다.
조선 선조 때에 대사성과 판서, 관찰사까지 두루 지낸 초당(草堂) 허엽선생과 역시 벼슬길이 평탄했던 그의 첫째 아들 허성, 그리고 이율곡을 탄핵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 멀리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당한 후에 금강산에서 방랑하다가 객사한 둘째 아들 허봉, 시대사상과 단절하고 장지문을 닫아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요절한 셋째 딸 허난설헌,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적으로 몰려 명문의 쟁쟁한 허씨가문을 일거에 몰락시킨 막내아들 허균 이후로 수백 년간- 이 거리, 즉 허난설헌 생가터 주위로 강릉시가 이름붙인 “문학산책로”는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짐승도 길을 피하던 역적의 거리였다.
그래서 그런가, 매년 허균 허난설헌 문화제 당일에는 여지없이 비가 내렸다. 이런 기괴한 현상에 언젠가는 문화제를 대신하여 유명한 무당을 불러 진혼굿을 올렸고, 그 다음해에 딱 한 번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부터 또 여전히 가을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9월 20일 제10회 문화제, 해람시낭송 회원들은 내가 써 준 각본대로 연습해왔고 어제 리허설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낭송가 열 명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30분 분량의 테마시낭송이었다. 행사장소인 생가터 솔밭에는 커다란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고 특별출연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가수 장사익 씨가 마이크와 스피커를 점검하는 모습도 보였다. 염려하던 바와는 달리 하늘은 청명했다. 절대로 비가 내릴 날씨가 아니라서 나는 안심했다.
그러나 매년 행사를 준비해왔던 사람들은 기상청의 일기예보나 하늘을 믿지 않고 무대 위에 대형 천막을 치고는 일회용 우비까지 수백 벌을 준비해 놨다. 과연 그 믿음대로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열차가 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듯 행사 서너 시간 전에 날씨가 급변했다. 살랑살랑 대던 갈바람이 급속히 그 결을 두텁고 강하게 하더니 솔밭을 휩쓰는 굵은 선의 잿빛 느낌이 뺨에 끈적끈적 묻어나기 시작했다. 습기에 늘어진 바람이 무겁게 고가를 감아 내리자,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대나무가 내리 꽂히듯 직선으로 퍼붓는 빗줄기속에서 행사는 진행되었고 가수 장사익의 애끓는, 동백아가씨, 찔레꽃, 아버지라는 곡을 마지막으로 끝났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장소에 대해서 전부터 색다른 영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락객들이 오가는 대낮에도 난설헌 생가터나 그 주변의 문학산책로에 서면 음풍의 저승을 돌아 나온 검은 기운이 적송나무 사이사이 자욱이 깔리는 느낌이었고, 정작 이 고가는 어떤 물난리에도 물이 들어차지 않는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秀形)으로 소문이 난 길(吉)터지만, 어둠 속에서 대문과 마주앉아 있으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 몇 백 년 전으로 빨려들 듯, 난설헌이 싸늘한 표정으로 대문 밖을 히뜩 나설 듯, 머슴들의 수런수런 대는 소리가 담벼락 안에서 들려올 듯하여, 뒤죽박죽 범벅이 된 시간에 넋을 놓다가 고개를 털고 일어설 때 한꺼번에 몰려드는 그 답답함과 쓸쓸함이란- 터가 너무 억세다, 뭐라 딱 짚어낼 수 없는 어둠의 혈(穴)이 있다, 시체를 파묻어도 퍼런빛으로 썩지 않을 곳 같다,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지는 큰무당이 열두 마당 시나위 판을 벌려야 구천의 혼을 제대로 달랠 것 같다, 등등의 쓸데없는 잡념까지 합세하면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 장소를 떠나곤 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나는 허난설헌 생가터와 문학산책로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난설헌이 그려낸 87수의 유선사(遊仙詞)만 머릿속에서 무늬로 히뜩 댈 뿐, 발길은 그 장소에서 멀리 겉돌았다. 그러나 생가터의 기괴한 힘은 나를 멀리 내치지도 않았다. 집에 누워 있다가 문득 난설헌이 떠오르면 모골이 송연하여 의식이 생가터쪽으로 퍼뜩대고, 고개를 쳐든 솜털에 파란 광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서, 손이 자꾸 난설헌 시집과 평론집으로 갔다.
난설헌이 죽을 때 자기가 쓴 천여 수의 시를 모두 불태웠고, 후에 동생 허균이 여기저기 남겨진 이백여 수의 시를 모아 엮은 불완전한 시집이라서 난설헌의 시세계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동양에서 가장 장대한 유선사 87수는 도가(道家)문학의 정수를 점하고 있으며, 중국문인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문장이라는 평가처럼 난설헌 문학의 예술성과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난설헌은 중국 송나라 때에 이방(李昉)이 편찬한 엄청난 분량의 소설집 태평광기(太平廣記)를 거의 외우다시피 읽었다. 이는 난설헌의 문학수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텍스트였다. 현대판 환타지소설에 해당하는 이 서적에는 유가(儒家), 불가(佛家), 도가(道家)사상을 밑바닥에 깐 짧고 기이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유가와 불가의 내용이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난설헌은 도가 일변도의 작품에만 몰두했으니, 그녀는 조선시대의 양반들을 사로잡았던 유가사상과 민간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불가사상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배제하고, 독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도가에 전적으로 의탁했다는 판단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 도가사상의 시초는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의 일연스님, 이규보, 이승훈으로 이어지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과 허균으로 그 맥락이 지속되는데, 이들은 모두 도가뿐만 아니라 유가와 불가에도 정통하여 그들의 글은 유, 불, 도를 넘나든다. 이런 도가 사상가나 문학가들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난설헌은 도가에만 천착하여 선을 분명히 그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평론집에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없다. 유가(儒家)를 배제한 이유는 억압된 조선중기사회에 대한 난설헌의 저항의식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해설이지만, 불가(佛家)가 왜 배제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사백 여 년 전에 요절한 허난설헌을 헤아리는 일은 길바닥에 떨어진 신발짝 하나로 그 신을 신었던 사람의 얼굴과 몸매와 생애를 모두 그려내는 일과 같다. 올 봄에 모작가가 난설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었다. 일 년간 심혈을 기울여 썼다는 작가의 말이었지만, 얼토당토않게 난설헌이 가출했다는 줄거리였고 이런 난설헌의 가출사건으로 그 시대에 억압 받았던 여성의 울분을 드러내려 애썼다. 이는 역사왜곡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견문이 짧은 탓인지는 몰라도 조선시대에 사대부집 규수가 가출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출처(出妻)는 있었다. 글자 그대로 소박맞아 쫓겨나는 일이다. 그 외에 허난설헌에 관한 소설은 몇 권이 더 있는 모양인데 어느 소설에선 난설헌을 동성애자로 만들기도 했다니, 역사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치고는 너무도 치졸하고 옛 사람에 대한 몰염치로 보인다.
작년에 모방송국에서 허난설헌 특집을 내보냈었다. 이 프로의 제작진은 처음엔 무척 황당했다고 한다. 난설헌의 생애에 있어서 특히 주목을 끌만한 서사성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였다. 황진이는 유명한 개성 기생이었고 벽계수를 유혹했고 같이 금강산에 놀러갔고 그 후에 이별했으며 문장까지 능했으니,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리저리 서사성을 꾸며 펼칠 수도 있지만, 난설헌에게는 전혀 그런 낭만적 서사성이 잡히지 않았으니, 그녀의 생애가 너무도 평범하여 열다섯 살 안팎에 남들처럼 시집갔고 엄한 시어머니와 밖으로 겉도는 남편 밑에서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이 일찍 죽었고, 그러다가 난설헌도 요절했기에, 시청자를 사로잡을 만한 짜릿한 줄거리가 요원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시간의 대부분을 수박 겉핥는 식의 내용으로 채웠던 기억이다.
나도 이런 점이 큰 고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허씨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언급이 되어있어 그 생애를 대충 종잡을 수가 있지만 여성인 난설헌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난설헌의 아버지나 그 형제들의 기록을 소설에 참조할 수가 있겠지만, 정작 당사자를 서술하고 묘사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남겨진 2백여 수의 작품과 허균이 남겨놓은 난설헌에 대한 몇 줄 기록만을 의지하여 그녀의 세계와 생애를 모두 되살려내야 한다니, 참으로 난감할 뿐이었다. 후대의 문인들이 이렇기에 난설헌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아 생가터가 그런 느낌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만의 느낌이겠지만.
중국 당나라 시대에 이하(李賀, 791~817)라는 불우한 천재 시인이 있었다. 생생하고 기묘하며 색채감이 풍부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어느 날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동행하기를 요구했다. 이하는 노모가 늙고 병들었으니 갈 수 없다고 울먹였다. 이에 저승사자가 웃으며 옥황상제가 광한전백옥루(廣寒殿白玉樓)의 상량문을 짓는데 당신이 필요하니 데려오라는 명령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에 이하는 눈물자국이 마른 얼굴로 죽어 있었다. 그로부터 칠백 여 년 후, 중국문인들은 허난설헌의 문장을 보고 이하가 조선 땅에 환생하여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고 입을 모았다. 난설헌도 이하와 마찬가지로 27세에 요절했고 문장도 역시 생생하며 색채감이 풍부하여 이하의 글을 대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환생(還生)은 달의 행보다. 바다 저 끝에서 떠올라 경포 호를 가로지르는 겨울의 보름달은 유난히 커서 가슴에 품어질 듯하다. 광한전(廣寒殿)은 달 속의 궁전으로서 그곳에는 남편을 버리고 도망친 항아(姮娥)라는 미인이 홀로 살고 있다. 예부터 중국문인들은 전설속의 항아를 비난하여 달을 섬궁(蟾宮), 즉 못 생긴 두꺼비가 사는 궁전이라 일컫는가 하면, 배신하고 도망쳐 봐야 혼자서 쓸쓸하게 살 수뿐이 더 있겠느냐는 등의 핀잔을 시 속에 담아냈지만, 달에 미혹된 시인, 난설헌은 동양 최초로 항아에게 즐거운 밤을 선사하여 항아가 옥계단을 지상에 내려 순국도사라는 남자를 끌어올리게 한다. 난설헌은 새벽닭이 울었는데도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노래하여 지금도 둥실- 저 달 속에서는 항아가 열애중인 게 분명하다.
허균의 노력으로 중국에 전해진 난설헌 시집은 오늘로 치면 한류(韓流)와 마찬가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난설헌을 사모하다 못해 소설헌(小雪軒)이라 스스로 이름 짓고 자기도 27세에 죽을 것을 기대했다는 여류 시인도 생겨났다니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설헌은 정작 조선 땅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했다.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딸이라서 더했는지도 모르지만, 조선말의 유명한 실학자 유득공, 박제가, 이광수에게 방탕한 글이며 사대부집 규수로서는 도가 넘는 글이라고 혹독한 비난을 받았고, 역적 허균의 글이 금서목록이었듯 그녀의 시도 어둠에 묻혀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이 망한 후, 매천 황현의 노력으로 겨우 난설헌의 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후에 허균의 홍길동전도 발간되기에 이르니, 실로 문장이란 때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할 법도 하다.
나는 흔히 말하는 여성들의 끼나 야함을 황진이보다는 난설헌의 시에서 더 많이 느낀다. 황진이는 기발한 시적 장치로 도발적 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난설헌은 남녀의 낭만을 전설에 의탁하여 입가에 꽃을 갖다 대며 뇌쇄적인 미소를 던지는가 하면, 여섯 폭 비단치마를 노을빛에 이끌면서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남성을 유혹한다. 침실의 전주곡이 자못 화려하며 우회적이고 은유적이다. 황진이의 유혹이 단 한 발의 화살의 적중이라면, 난설헌의 유혹은 수없이 날아드는 금침(金針)이기에, 황진이에게 걸렸다 하면 남자가 단번에 고꾸라지지만, 난설헌의 과녁에 들어왔다 하면 미약에 취한 듯, 혼수상태에 빠져든 듯, 아무리 고개를 부르르 흔들어도 제정신이 아닌 듯, 어깨로부터 따끔따끔 황홀한 무너짐이 서서히 아래로 번져나가다가 나중에는 비실비실 무릎이 탁 꺾이며 남자가 바닥에 딱 붙어버리는, 그래서 남자를 죽여도 아주 서서히 음미해 가며 달달 볶아서 즐겁게 죽여 버리는, 그런 리듬이 느껴지는 것이다.
도가의 문학이 거의 그러하듯 난설헌의 시도 대부분 환타지 시에 속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선이나 선녀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산다는 전설 속의 세상이 무대가 되고, 난새를 타고 올라 서왕모가 베푸는 주연에 참석하고, 선녀와 신선이 꽃밭에 몸을 감추니 어느덧 지상에서는 일만 년이 흐르고, 실연당한 선녀가 슬피 퉁소를 불며 돌아가고, 노을빛 아래 또 어느 선녀가 남자를 유혹하려 허리를 비틀고, 이런 여성들의 왕국이 유선사 87수에는 채색도 화려하게 녹아있으니, 이는 한마디로 뼈와 골수와 살이 사랑만으로 건축된 ‘여성본색(女性本色)’인 것이다.
후대의 시비평가들은 이런 난설헌의 시색(詩色)에, 불행한 결혼생활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반작용이라는 둥, 억압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둥, 그 모두가 합쳐져 응결된 한(恨)풀이의 일종이라는 둥, 여러 가지 해석을 갖다 붙이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내가 파악한 난설헌은 태생 자체가 그러한 여자였던 것이다. 즉 시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본색에 충실했다는 판단이다.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가오는 느낌 그대로 내 시를 봐라. 이것이 난설헌의 요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난설헌은 당대의 여성을 그 시대에 적합한 사상이나 시각으로 분장시키고 재단하여 해석해 낸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원초의 여성 그대로를 발가벗겨 도가의 문학을 빌려와 그 속에 드러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 속의 스트립쇼라고나 할까.
그리고 난설헌은 제한된 체험보다는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 많이 의지하여 글을 썼을 것이다. 난설헌의 어린 시절은 늘 공상에 사로잡힌 소녀였을 테고, 어른이 되어서도 환타지 문학이 그녀에게만 유독 풍부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여성이 벼슬을 얻어 궁전을 출입한다든가, 전쟁터를 묘사한다든가, 가난한 시인이나 여자들을 노래한다든가, 남의 서체를 모방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든가 하는, 동원된 다양한 주제와 소재는 동서고금을 통해 그 예를 찾기 힘들어, 중국의 문인들이 그렇게 감탄했을 것이다.
난설헌이 불우한 천재시인 이하의 살풀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썼다 치면, 후대의 누가 불행하게 살다간 난설헌의 살풀이로 무슨 작품을 남길 것인가? 이것이 난설헌의 생가터와 문학산책로에 깔려 내 발길을 무겁게 붙잡는 음울하고도 침울한 기운이고 문화제 때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비의 정체일 수도 있다. 또 몰려드는 답답함과 쓸쓸함- 경포 호를 굽어보는 유독 큰 겨울의 보름달 속에서 난설헌은 지금쯤 누구와 열애중일까? 문득 구름이 달을 가렸다.
그립다. 달의 시인, 그녀의 환생이.
2008년 12월 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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