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수석(水石)
이 정문
수석(水石)을 채집하는 친구가 한 뼘 길이의 돌을 내밀며 그 속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희끗희끗한 문양이 돌 속에 박혀 있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는 돌 표면을 손바닥으로 쓱 훑더니 다람쥐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아, 하는 나의 감탄과 함께 입을 크게 벌린 채 엎드려 있는 다람쥐의 모양이 시야에 잡혔다. 그 돌은 비로소 생명을 얻은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아지랑이 흥얼대는 남한강 돌밭에 앉아 하릴없이 이 돌 저 돌을 집었다 놨다 했다. 강의 상류에는 모양으로 이미지를 찾는 형상석(形狀石)이 많지만 하류인 이곳에는 각가지 무늬가 박힌 문양석(紋樣石)이 많다고 한다. 수마(水磨)가 잘 되어 겉이 반질반질해 진 돌을 들여다보면 희고 검은 색으로 빗금을 치거나 포물선을 그린 문양이 어찌 보면 산수화 같기에, 제대로 문양이 잡힌 돌은 산수경석(山水景石)이라 하여 수석으로의 가치를 인정받고, 능선처럼 휘어진 포물선 위로 희고 둥근 점이라도 제대로 찍히면 이는 ‘산수를 비치는 고요한 달’의 문양이라서 명석(名石)이 될 수도 있다. 한참 바닥을 훑고 다니다가 손안에 잡히는 조그만 돌을 주웠다. 오석(烏石)이라는 검은 돌이었는데, 길쭉한 모양을 따라서 나이테처럼 겹겹이 두른 하얀 선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가는 물결과 같았다. 여러 각도로 돌의 이미지를 찾다가 세로로 세워보니 이는 부처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허리를 따라 촘촘히 흘러내린 얇은 옷의 주름인데 정작 부처는 없다. 옷만 있을 뿐이다. 문양이 나올 듯 말 듯, 드러날 듯 말 듯, 뭔가 모자라서 올바른 수석으로 인정받기 보다는 그냥 미석(美石)의 일종으로 버려질 돌이지만, 그 검은 바탕의 하얀 선을 쫓아 돌 속 깊이 침전하다보니 어디쯤 부처가 걸어가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듯도 하다. 이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라, 부처는 장난감일까. 재작년부터 노자와 장자의 여행을 하다가 근래에 이르러 선불교의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 벽암록(碧巖錄)에 이르렀다.
사천성에 살던 덕산(德山)스님은 금강경(金剛經)의 대가였다. 스스로 금강경에 주석을 붙인 청룡소초(靑龍疎鈔)를 등에 지고 저 남방의 땡초들을 토벌하러 떠났다. 그의 기세는 맹렬하고 매서웠다.
“진리에 뜻을 둔 자가 출가를 하면 천겁(千劫)이 걸려야 겨우 부처의 뜻을 알 수 있고, 만겁(萬劫)이 걸려야 부처의 조그만 행실을 흉내 낼 터인데, 저 남방의 무례한 땡초들은 공부는커녕 경전을 무시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니,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니, 본성을 깨달으면 단박에 득도한다고? 내가 내려가서 공부를 도외시하고 헛소리만 지껄이는 그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긴 여행 끝에 덕산은 용담사 입구에 도달했고 저녁놀 뉘엿뉘엿한 그 앞에서 빈대떡을 붙여 파는 노파를 만났다. 배가 고팠다. 노파에게 점심(點心) 요깃거리로 빈대떡 하나만 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점심이란 마음에 불을 켠다는 뜻으로 간식을 의미한다. 노파는 물었다.
“점심요? 그런데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뭐요?”
“청룡소초라고, 금강경을 내가 직접 주석한 책이다.”
“그래요? 금강경을 잘 아시겠구려. 그렇다면 제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하시면 빈대떡을 그냥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줄 것이요.”
“금강경에 대해 묻는다고? 어서 묻거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過去心不可得),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現在心不可得),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데(未來心不可得), 그대는 뭔 마음에 불을 붙인다는 말이요?(未審上座 點那個心?)”
금강경의 핵심을 점심(點心)이란 화두로 정확히 지른 것이다.
순간 덕산은 말문이 막혀 머뭇머뭇 했다. 이것을 본 노파는 용담(龍潭)의 암자를 가리키며 잘라 말했다.
“어서 용담에나 가보시오.”
덕산은 노파를 뒤로하여 용담에 올라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대갈일성을 날렸다.
“여기에 용(龍)도 없고 담(潭)도 없구나.”
방안의 병풍 뒤에 서 있던 용담(龍潭)스님이 이를 내다보며 삐끗 말을 던졌다.
“너는 이미 용담 안에 있느니라.”
여기까지의 줄거리로 보아 덕산스님이 노파와 용담스님에게 한 수 밀린 듯하다. 사실 이 대목까지는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선불교란 인도불교의 중국화 현상으로서, 교리위주의 인도불교에 애초부터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는 노자사상이 깊이 침투된 것이다. 노자 서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서,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며 이름을 붙이면 그 실제의 이름이 이미 아니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둠의 게임과 같다. 현현(玄玄)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며 가뭇가뭇하기만 한 어둠의 본질을 밝히려 빛을 들이대면 어둠은 곧 사라진다. 즉 언어와 실제가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일찍 이를 간파한 중국의 선승들은 언어의 대잔치인 대장경을 집어치웠다. 교리(敎理)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틀 안에 평생 가둘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석가모니의 너절하고 구구한 말씀보다도 오늘의 자기 삶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보다도 길섶에 핀 한 떨기 들꽃이 더욱 확연하고, 천년무궁의 높디높은 탑보다도 탑돌이 도는 선남선녀의 옷자락이 훨씬 아름다워, 이는 밤하늘을 갈라 치는 유성의 불꽃이 모든 별빛을 제압하는 격이다.
기상천외하게도 선불교(禪佛敎)는 기존의 인도불교를 뒤엎는 반불교(反佛敎)다. 과거의 경전 찌꺼기에 매달리지 않고 미래의 정토에 기대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초점을 모은다. 그러나 이 또한 애매모호하여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강물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과연 흐름에 따라 길게 흩어지는 그 어느 점이 과거며, 현재며, 미래인가. 단절된 강물은 없다. 영원은 순간의 강물이기에, 그 어느 시점에 부처가 있었고 그 어느 시점에 부처가 없지도 않았다. 옷자락만 펄럭이는 오석(烏石)의 저 깊은 곳으로 누가 걸어가고 있는가.
기세가 반쯤 꺾인 덕산스님은 용담스님 앞에서 넋을 잃는 중이었다. 마음에 불을 당긴다는 점심(點心)의 화두는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잔잔하지만 천근의 무게가 담긴 용담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를 하고 거기에 섰는가. 어서 나가거라.”
이에 문밖을 나서던 덕산스님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밖이 너무 어둡습니다.”
그러자 용담스님이 종이를 말아서 만든 초에 불을 당겨(點) 덕산스님에게 내밀었다. 덕산스님이 타오르는 불꽃에 그림자를 늘이고 초를 받아드는 순간, 용담스님이 돌연 입김을 확 내뿜어 불을 꺼버렸다. 이때 덕산스님이 무너지듯 무릎을 꺾었다. 대오(大悟)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현묘한 말을 다 모아도 우주에 털오라기 하나 놓는 것과 같고, 세상의 이치를 다 갈파해도 거대한 계곡에 튀기는 물 한 방울과 같다.”라는 탄식과 함께 덕산스님은 평생을 짊어지고 다니던 금강경을 불태워 버렸다.
돌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은 곧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 사실화(事實畵)처럼 수석의 모양이나 문양이 또렷하여 그에 따라 이름이 붙기도 하지만, 추상화(抽象畵) 같은 모양과 문양도 적지 않기에, 사색, 연민, 고요함, 창조와 같은 추상적인 이름이 곧잘 붙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이름 없는 수석은 없다. 이름을 빼버리면 그 수석은 즉시 잡석(雜石)으로 전락된다.
수석을 채집하던 사람들과 빙 둘러 앉았다. 그들은 주워온 돌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감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 처음 낀 내 입장에서는 내밀 돌도 없고 감정할만한 식견도 없어서 그들의 대화에만 귀를 내밀 수밖에. 검은 돌 중간에 가는 흰 선이 휘어져 간 돌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햇볕에 비쳐보던 사람이 “이것은 멀리 뻗은 오솔길 같은데, 밤길이라고 이름을 지으면...”하자 곁에 앉았던 사람이 “그런데 돌 위의 이쯤에 점이 찍혀 달 문양이 보이거나, 선의 이쯤에서 사람이 걸어가는 듯 세로로 찍힌 선이 나타나야 그런 맛이 들 텐데,”하며 아쉬워한다. 그 옆의 사람이 다른 돌을 여러 각도로 재보다가 불뚝 세워놓고는 “이렇게 보면 노송나무가 되지 않을까?”하며 동의를 구하듯 주변에 말을 던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돌에 집중되다가 조심스런 말들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너무 무늬가 위에 가 붙었다는 둥, 아래쪽에 휘어진 문양이 보였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둥, 노송으로 보기는 좀 그렇고, 오히려 매화에 가깝지 않느냐는 둥, 돌의 모양이나 문양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름을 붙여 내놓느냐에 따라서 수석의 가치가 결정되기에 말 한마디가 가볍지 않다. 생명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자가 운문(雲門)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일대시교(一代時敎)입니까?
운문스님이 대답했다.
“대일설(對一說)”
석가는 49년간 360여 차례에 걸쳐 가르침을 전했고, 이 가르침을 교설(敎說)이라 하고 구전되어 내려오던 교설이 문자화 되어 대장경(大藏經)을 이루었다. 제자는 분명히 석가의 가르침이 뭐냐고 물었다. 스승인 운문은 간단히 ‘대일설’이라고 답했다. 이 공안(公案)에 송(頌)을 붙인 설두스님은 대일설을 일컬어 “매우 높고도 험하다”고 찬탄했다. 이런 설두의 게송에 또 주석을 붙인 원오스님은 대일설을 풀어 말하기를, “친절한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면 물음으로서 묻지 마라. 물음은 대답하는 곳에 있고 대답은 묻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대일설(對一說)은 “지금 그 말 자체”라는 뜻이기에, 어떤 것이 일대시교(一代時敎)입니까?”라는 제자의 물음 자체가 석가의 일대시교가 된다. 물론 이런 풀이가 타당하다는 검증은 없다. 선문답이란 삶이 삶에게 전하는 삶이기에 문자의 한계를 지닌다. 덕산스님은 밖이 어두워 불을 달라고 했다. 용담스님은 초에 불을 붙여 건네다가 훅 꺼버렸다. 점심은 무슨 점심(點心)? 불을 붙일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느냐? 혼돈을 헤쳐 갈 불이 있다고 책상에 앉아 깜장콩(경전)만 까먹는 그 마음 자체가 혼돈이 아니겠는가.
나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대던 돌을 수석채집가들에게 내밀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들의 말로 미루어 내가 골똘했던 자그마한 돌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잡석에 불과했다. 외따로 돌아앉아 돌을 물에 적셔보니 검은 색이 더욱 깊게 현현(玄玄)해지고 겹겹이 두른 하얀 테가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부처의 어깨를 스쳐 흘러내리며 가슴팍과 배를 덮어 켜켜이 주름진 옷자락은 여전한데, 그의 색신(色身)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면 법신(法身)만 남아 옷자락뿐인가. 고개를 들어 먼 밭을 보니 빨간 옷을 입은 아낙들이 냉이를 캐다가 일어서 허리를 편다. 돌을 강심으로 던지려다가 그만 둔다. 버리려는 마음도 갖으려는 마음 못지않은 분별이라, 나의 삶이란 이렇게 어정쩡한 돌멩이로 내 손안에 이름 없이 들어있느니.
(2009. 삼월 초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