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농협달력 뒷장의 자서전

미송 2009. 3. 29. 23:55

 

농협달력 뒷장의 자서전 / 이정문 

 

제법 큰 플라스틱통에 담긴 열 포기쯤의 김장김치가 가운데 자리를 크게 차지했다. 그리고 직접 농사지어서 짜낸 들기름과 곱게 빻은 고춧가루, 절구로 콩콩 쪄서 한 덩어리씩 비닐봉지에 집어넣어 냉동시킨 마늘이 택배로 도착한 과자박스 속 여기저기 구석에 찔러져 있었다. 그 사이 깊숙이 껴 있는 신문지로 둘둘 말은 또 하나의 뭉치가 보였다. 꺼내어 펼치자 여자의 손지갑이 드러났고 그 안에는 누님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구입한 앰피쓰리가 귀한 보물인양 담겨 있었다. 김치통을 덮고 있는 철지난 몇 장의 농협달력을 갸웃하며 뒤집었다.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자로 줄을 쳐가며 만든 촘촘한 칸 안이 가수와 곡명으로 가득 찼으니 누님의 말로는 천곡이 넘는다나, 왈 “내가 반년 동안 모아놓은 노래인데 꼭 녹음해서 보내라. 알았지?”

 

사촌지간인 누님과 나는 12년 터울의 같은 용띠이다. 벌써 누님은 칠순에 접어들었다. 어렸을 때에 댕기머리 두 갈래 따 내린 누님의 반질반질한 등에 업혔던 희미한 기억부터, 가난에 내몰려 한 사람의 먹을 입이라도 덜려고 일찍 객지를 전전하던 애처로운 모습, 보따리를 날라주려 먼지 날리는 버스를 타고 멀리 찾아가던 일, 선뜻 내준 용돈이 늘 비어있던 내 손에 따끈따끈한 찐빵처럼 쥐어지던 일, 많은 사촌형제들 중에서도 누님만이 유독 나와 가깝게 지냈으니, 친형제가 없이 외톨이로 자라던 내가 누님의 눈에 자못 안타깝게 비쳐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누님이 시집가고, 남편의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자식도 없이 홀로 되어 생활전선에 다시 뛰어들고, 그 후 재혼도 여의치 않아서 뚜렷하게 내세울 남편도 없이 이런저런 일을 하릴없이 전전하다가 몇 년 전에 농사나 짓겠다고 두메산골로 내려갔었다. 그때 나에게 던진 말이 “마음을 비우니 모든 게 편하다.”였다.

 

말대가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봉황 같은 눈, 뱀처럼 긴 몸통에 얼토당토않게 달린 닭발 모양의 네 다리, 징그럽게 온 몸을 뒤덮은 파충류의 두터운 비늘, 또한 거처도 불분명하여 물속에 사는가 하면 그늘진 산속에 엎드려 있기도 하고, 별안간 구름을 휘몰아 승천하기도 하는 용(龍)은, 그 생김생김이 모순의 결합이고 이모저모 가려야 할 것도 많으며 천지에 편히 쉴만한 거처도 하나 없어 늘 불완전과 불안정의 널판에 삐걱삐걱 몸을 실어, 일찌감치 제 주제를 찾아 제 모습 뒤집어쓰고 탄탄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소나, 개나, 쥐나, 토끼에게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거기에다가 입에는 신비스런 여의주를 물었다나, 뭔 요술마술을 부려서 얼마나 잘나겠다고 그러는지 용띠란 이렇게 잡힐 듯 말 듯, 될 듯 말 듯, 튀어 오를 듯 고꾸라질 듯, 그 팔자의 뿌리가 반쯤 뽑힌 벼랑위의 나무처럼 위태롭기가 그지없어 예부터 반듯하게 승천한 용보다는 어중간하여 용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지렁이도 아니라서, 온통 추상성의 안개로 돌돌 뭉쳐진 슬프디 슬픈 짐승(?)인 것이다. 오죽하면 십자가에 콩콩 못 박혀 꼼짝도 못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신이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피를 토해 하늘에 외쳤던 예수가 용띠였을까.

 

음악사이트를 검색하고 농협달력 뒷장을 펼쳤다. 등장하는 가수만 해도 거의 삼백 명 정도를 헤아렸다. 일정시대의 가수인 고복수, 황금심, 남인수의 ‘타향살이’, ‘알뜰한 당신’, ‘애수의 소야곡’부터 시작하여,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사람만 모여 살았다는 목포항의 파도 앞에서 울음 섞인 목청을 내질렀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과 ‘비 내리는 호남선’으로 흘러내리다가 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한국동란의 비극을 저주한 ‘가거라 삼팔선’으로 발길을 돌리더니, 피난길의 흥남부두에서 잃어버린 여동생을 목이 메여 찾아 헤매는 ‘굳세어라 금순아’로 올려붙여 ‘눈물 젖은 두만강’까지 이르고, 다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울고 넘는 박달재’로 ‘번지 없는 주막’으로 ‘모녀기타’는 밤마다 ‘고향만리’를 떠돌아 ‘해운대 엘레지’처럼 ‘방랑 삼천리’하다가,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누님의 연분홍 청춘이 흐드러지게 개화를 이뤄 나른했던 곳이 어딜까. 한명숙의 ‘노란샤츠 입은 사나이’일까 아니면 김상희가 출퇴근길에 마주친다는 ‘대머리 총각’일까. 아마 그때쯤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먼 구름 아래 누가 살고 있는지 박재란이 그토록 궁금해 했던 ‘산 너머 남촌’이어서, 해마다 봄바람이 남에서 온다고 했을 것이다.

 

눈물인지 가물거림인지 눈이 껌쩍거려진다. 이때쯤이면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던 중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때 객지를 떠돌던 누님이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으니 누님은 늘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머리맡에 켠 채 잠이 들었고 잔잔한 노래가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에 실려 방안에 떠돌곤 했다. 그렇게 노래를 좋아하던 누님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서랍까지 달린 나무목재로 된 전축을 들여놨으니, 울렁울렁 넘어가는 전축 바늘에 간간이 찍찍 잡음소리 뒤섞였던 영원한 트롯트의 명가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고, ‘섬마을 선생님’이었으며, ‘여자의 일생’이었고, ‘황포돛대’였다.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과 ‘노랫가락 차차차’도 있었으며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영시의 이별’ ‘안개 낀 장춘당공원’도 있었다. 배호라는 가수는 한숨처럼 턱턱 늘어지던 목소리가 일품이었다나, 그것이 치유불능의 폐병때문이었다나, 열광했던 여성팬들은 노래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한 그를 기어이 보고야 말았으니, 배호는 진정 무대 위의 ‘마지막 잎새’였던 셈이다.

 

누님이 사다 모은 엘피판에는 간간이 외국가수의 노래도 섞여 있었다. 목 아래로 깊게 파인 옷 위로 금방이라도 불쑥 넘쳐 나올 것만 같은 금발머리의 칸츄리 여가수 달리 파튼, 카우보이모자를 멋지게 눌러쓴 알란 잭슨, 또한 패티 페이지, 폴 앵카, 엘비스 프레슬리, 머리를 곱게 뒤로 빗어 넘긴 파란 눈의 프랑스 배우 알랑 드롱이 새겨진 판에는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주제곡도 있었다. 이때가 누님이 이십대 후반이었던가, 아마 그럴 것이다. 누님의 음악 자서전은 넘어가는 농협달력 뒷장에서 계속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노래도 흘러 바야흐로 소울과 통기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70년대로 접어들어, 온몸으로 노래하는 가수 김추자가 ‘거짓말이야’하며 일성을 내지르고, 비록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지만, ‘님은 먼 곳에’있었는지, ‘무인도’에 장현의 ‘석양’이 늘어졌고, 송창식의 ‘왜 불러’하고 외치고 간 산길에 아침이 찾아와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영롱했다. 그러다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 뛰어들더니, ‘일편단심 민들레’와 ‘창밖의 여자’도 한몫을 거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가요 반세기가 넘어갈 즈음, 김장훈이 ‘사노라면’이라고 노래하자 이무송이 ‘사는 게 뭔지’라고 대꾸해 들어와 누님은 어언 오십을 넘어서는 나이였던 것이다. 자서전은 그 이후의 인생도 기록되어, 안치환과 박강성이 유명세를 날리고 얄밉도록 맨질맨질하고 영악스럽게만 보이던 신세대의 음악 알앤비까지 자서전에 가세하여, 이때쯤의 누님의 나이가 육십을 넘겼을 것이다. 아니 이 양반이? 도대체 지칠 줄 모르네. 하며 가수를 자세히 살피니, 빅마마? 코요테? 틴틴 파이브? 가비 엔제이? 요상한 이름까지 등장하여 어느덧 누님은 12살 아래인 내 의식을 훌쩍 뛰어넘어 저 앞에 내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긴 한숨소리 같은 세월이다. 컴퓨터에 속속 다운 받아지는 작은 글씨의 노래제목 속에 내 인생도 가물가물하여, 누님이 잃어버린 여의주를 찾아 그렇듯 헤매는가, 용띠는 추상성이 강하기에 있는 힘을 몰아 이리저리 쉼 없이 극과 극을 흔들어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그 뜻을 잃지 않는 모양이다. 밭에서 흰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들깨를 심으며 콩과 고추를 따며, 앰피쓰리를 귀에 꽂고 흥얼흥얼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눈에 안약을 넣어주던 아내가 말했다.

“누님은 정말 시인 같아.”

 

(2009. 2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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