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의 작품

시인이 내민 세상

미송 2009. 3. 24. 09:09

시인이 내민 세상

 

이 정문


 

시는 삶의 지문이다. 세상의 중심에는 늘 삶이라는 화두가 자리하고 그 주위로는 사물과 관념이 둘러쳐져, 시인은 만만치 않은 화두를 그 사물과 관념에 기탁하여 풀어내게 마련이다. 바람도 없고 먼 산에 눈도 쌓이지 않았지만 공기가 사뭇 차가워 하얀 입김이 호호 불어나는 1월 초순, 시내를 빠져나와서 치악산 줄기를 타고 오른 좁은 도로를 꼬불꼬불 따라 올라가니 양쪽으로 늘비하게 들어선 카페촌이다. 산줄기 저 아래 원주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묵장수 시인’으로 잘 알려진 황동남 시인을 좇아 카페촌 꼭대기에 놓여 진 커피자판기 앞에 섰다. 달그락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찌잉 하며 커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400원자리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앞에 놓인 탁자에 마주앉았다. 바로 이곳이 황동남 시인이 아내와 함께 자주 들리는 ‘야외카페’라고나 할까, 주변에는 그럴듯한 모양과 인테리어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고급카페가 널렸고, 우체국 옆에 조그만 포장마차를 치고 어묵이며 떡볶이며 감자나 오징어 튀김을 팔아 사는 처지로서 한 잔에 몇 천 원씩이나 나가는 원두커피를 사 마실 엄두가 나지 않을 황시인이겠지만, 그가 굳이 커피자판기만 애용하는 이유는 그런 속된 계산이 아닌, 그만의 가난하지만 여유롭고 오뚝하지만 소박한 인생철학이 따로 있어서일 것이다.


새벽시장을 나가

만 원 한 장을 가지고

무 두 개를 사 가지고

파 한 단을 사 가지고

콩 한 종지를 사 가지고

계란 한 줄을 사 가지고

배추 한 포기를 사 가지고

한라산 한 갑을 사 가지고

탁 주 한 사발 해장을 하고도

전혀 한 푼도 에누리 안 하고도

라면 두 봉을 살 돈이 남았으니

아, 풍성한 가을이 이 마음만 하리...... (황동남의 <여유> 전문)


구체적 글쓰기 기법으로 성공을 거둔 위의 시는 탐욕의 역설로 보인다.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과연 만 원 자리 한 장으로 에누리 하나 없이 7개 품목의 매입이 가능하며 그러고도 돈이 남아돌아서 또 라면 두 봉지를 살 수 있을 것인지, 이 시는 2006년 봄에 출판된 <달맞이꽃 손깍지>라는 그의 시집에 실려 있는데 그 당시의 물가로서는 충분히 가능했다는 판단이었다. 이 작품은 세상을 비판적 성격으로 밀고나가 짓이겨버리는 탐욕의 역설이 아닌, 순리에 충실하여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자라는 ‘가난의 역설’로 보인다. 여기서 역설기법을 사용한 내 수필을 잠시 소개한다. 남의 시를 논하면서 얼토당토않게 자기의 수필을 올리면 분명 실례가 되는 일이나, 서로가 말을 터놓고 지내는 갑장지간이기에 황시인이 양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아래의 내용은 황시인의 작품과는 달리 ‘탐욕의 역설’이다.


“썰렁한 거리에 한파까지 겹친 연말, 누구는 희망을 품고 출발하는 내년이겠고 누구는 올해와 같은 절망의 연장선이 내년일 것이다. 또한 누구는 세월에 닳고 닳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제야를 넘길 것이다. 올해도 사람들은 돈 때문에 아우성이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뉴타운을 건설하여 아파트 값을 올리겠다는 국회의원에게 표를 던졌고, 춤추는 주식시장의 그래프에 웃고 울었고, 구조조정이라는 으름장에 움츠렸다. 빚만 산더미처럼 껴안고 닫아버린 가게문 앞에 쭈그린 자영업자들, 최저생계비 88만원에 목줄을 맨 자리마저도 퇴직금 없이 쫓겨난 비정규직 노무자들, 그리고 졸업장이 아닌 실업장을 달랑 받아들고 거리로 내몰린 젊은이들- 과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시들어, 인생은 그야말로 고해(苦海)였다고,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천당만이 희망이었다고 임종의 자리에서 질끈 눈감아 버릴 일인가, 아니면 역시 로또복권만이 역전의 찬스요 결론이란 말인가.

올 겨울에도 쪽방의 냉골에서, 빌딩계단의 어느 구석에서, 얼음판 깔린 밤거리에서 몇 명이나 나자빠져 하얗게 얼어 죽을지 모른다. 작년에도 얼어 죽었고 재작년에도 그랬다든가, 그리하여 나이 많은 동장군은 날이 바짝 선 쇠갈퀴라서, 얼어 죽은 자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스르고 신석기, 구석기, 그 이전의 이전까지 거침없이 뛰어올랐다가 오늘로 또 흘러내려 짱짱한 겨울하늘을 향해 쳐든 두 눈은 먹장구름 뿌연 두려움, 바람 세찬 바닷가에서 가리비며 양미리며 새우를 구워 파는 초로의 남자 무릎 앞에 타오르는 갈탄의 불꽃이 생명이라서, 실감나는 생존이라서, 나는 나처럼 가난한 여인을 끼고 검댕이 묻은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여름을 먹듯 목숨을 삼키듯 새우를 까먹는다.

정말 나는 가난한가,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혹시 나만이 이렇게 허덕이는가, 돌부리에 채여 발톱을 움켜쥘 때마다, 당장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금방 죽어지지 않아 언제까지 살아야 다 사는지 인생종착역이 가뭇가뭇 멀게만 느껴질 때마다, 그렇다,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잘 사는 놈 못 사는 놈이 따로 정해졌다는 신(神)에 대한 절망감이 앞설 때에도, 마음을 다잡아 최소한도 희망까지는 안 가드래도 원망까지는 떨어지지 않아, “내일은 꽃이 핀다.”라든가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뜬다.”라고는 말을 못해도- “내일도 꽃이야 피지. 그 꽃이 그 꽃이지만.”하고는 픽 웃던가, “내일도 맨날 보는 태양이야 뜨죠.”하는 삶이라서, 나는 곱게 곱게 가난하다 못해 어느덧 가난을 잊어버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잃어버린 가난’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가, 내 눈에는 온통 나보다도 더 고달픈 가난뱅이들뿐이다.

13억 나가던 아파트값이 7억으로 덜컹 떨어졌으니 가난하고, 3억 퇴직금 받고 모가지 잘렸으니 째지게 가난하고, 백억 자리 계를 들었다가 20억 날렸으니 더 가난하고, 8기통이 아닌 겨우 6기통만 달린 벤츠승용차를 마련했으니 더더욱 가난하고, 하다못해 미국 경제 판이 엉망이라서 그에 휘둘리는 현대재벌도, 한화재벌도, 삼성재벌도 다 가난하기가 그지없어, 추위를 등판에 얹고 주머니 속의 천원 자리 몇 장을 만지작거리면서 검댕이 묻은 새우 한 마리 입속에 집어넣는 맛이 너무도 짜릿하고 행복해 죽겠어서, 나는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절로 미안해지는 것이다.“ (이의양의 <가난의 구조>전문)


역설을 넘어 순리에 이르는 황시인의 <여유>로 돌아가자. 이 시에 젖어있노라면 이상하게도 천만금 거부(巨富)의 미소보다는 동전 한 닢에 빛나는 거지의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표정 속에는 안도와 다행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갖가지 색조를 띠어 한꺼번에 감돌고, 단 한 번의 쓰임으로 동전이 거덜나버리는 찰나의 안타까움이, 곧 쓰러질 듯한 위태로움이, 어떤 사람이라도 피하지 못할 삶의 저변에 깔린 운명을 심상치 않게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유유자적한 서정과 냉철한 철학을 교묘하게 교차시켜 우리들이 흔히 잊고 사는 삶의 저변 깊숙한 곳에 잠긴 ‘보편적 삶의 성질’을 수면 위로 걷어 올려, 누구나 다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다 알거지 운명이라는, 그래서 세상에는 따로 가난이 존재하지 않아 다 부자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의 미학을 만 원 자리 한 장을 통하여 유감없이 발휘한다. 내가 황시인의 시 중에서 주목한 몇 작품은 역설의 프리즘이었다. 아래의 시도 마냥 자유롭기만 한 자유가 아닌, 억제와 인내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역설을 노래한다.


바람 끝에 매달렸다 툭 떨어지는

상기된 나뭇잎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들에겐 저들의 뜻대로 할 수 있는

통제되지 않은 자유가 얼마인가를 생각하며


나에게 부여된 자유도

내가 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초침의 여유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긴 한숨의 아픔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슬기를 배웠지 (황동남의 <진정한 자유>에서)


황동남 시인은 서슴없이 나를 갑장으로 칭한다. 같은 또래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동시대의 고락을 함께 해 왔다는 동료로서의 친근감이 더욱 절실해서일 것이다. 황시인의 말처럼 오십대 후반은 옛날로 치면 몇 천 년의 변화를 한꺼번에 겪어버린 파랑의 세대다. 1950년대에 지긋지긋했던 가난을 텃밭으로 삼아 태어나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발전 드라이브정책에 휩쓸려, 수출업체의 공장으로, 모래바람 드센 중동의 사막으로,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종놈처럼 내몰리고 독재정권에 숨죽여 살다가 청천의 벼락처럼 떨어진 외환경제위기로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노숙자 제1기생으로서의 모멸스런 발자국을 찍었으니, 이 모두의 안타까움이 함축되어 갑장이라는 말 한 마디에 담겨 있는 셈이고, 잘 살려던 노력이 못 사는 길만 골라서 간, 고생 끝에 낙보다는 고달픔만 겹치는, 그러다가 못 사는 줄로만 알았더니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욕심을 버리니깐 욕심이 채워지는 신비의 아이러니가 황동남 시세계의 밑바닥을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이다.

 

시인을 손쉽게 파악하려면 그의 아내를 봐라. 우체국 옆길의 포장마차 안에 앉았다가 어둠을 들추고 얼굴을 들이민 나를 대뜸 알아본 황시인의 아내는 글자 그대로 황시인이 쓴 모든 시의 판박이로 느껴졌다. 세월과 파란이 남기고 지난 주름살 한켠 한켠에 황시인의 시가 오밀조밀 붙어있어, 한 권의 시집과 같았다. 후후 불어가며 마시는 어묵국물, 한 점 찍어 입에 넣는 매콤한 떡볶이, 남편이 금방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는 다정함, 이런 모든 것들이 정겨운 풍속도의 한 단면으로 단순하게 비쳐질지는 몰라도 그 뒤에는 죽어도 죽어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준령의 고비가 적지 않았을 듯, 울다울다 이제는 그 울음도 싱거워져 더 울 것도 없다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초탈한 경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듯, 포장마차 안에서 오가는 덕담과 웃음의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아 마땅한 일이었다.


 아내와 난

내동댕이쳐진 것들을

주우며 치우며 정신이 없고

사람들은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중략)

어둠 한가운데 마주보고 둘이서

북받치는 서러움에 눈물을 글썽이다

그래도 세상살이 재미있지 않느냐

두 손을 꼬-옥 잡아 마음 모으고

파고드는 서글픔을 미소로 달랬지요 (황동남의 <잊을 수가 있을까>에서)


시인은 신(神)이 머물다 간 자리에 퐁당 빠져 헤매는 사람들이다. 신기(神氣)에 사로잡혀 무병(巫病)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요동하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기에 늘 균열 일보직전에 처해 있고, 남들처럼 바로 서서 걷기보다는 두 손으로 땅을 딛고 물구나무 자세로 걷는, 그래야만 금방 터질 것 같았던 뇌 속의 실핏줄이 안정을 취해 혈압이 떨어져 시원한, 혼자서 뭐를 중얼중얼 대다가 마는, 그래서 오죽하면 시란 하다가 만 소리라는, 그런 이상한 족속들이 바로 시인들이고 각도기와 자로 측정되지 않는 불명확한 사람들인 것이다. 신이 머물렀던 자리에 서면 다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세상에는 시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어느 시인의 마음이

폭발하려는 지진같이

꿈틀거리지 않으면

어찌 시든 풀잎 하나까지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으리 (황동남의 <그대의 길>에서)


그래서 황동남 시인은 자기도 참 괴롭다고, 그런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냐고 장탄식을 내뿜는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이가

어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의

내 그토록 존경하는 윤동주 시인뿐이리 (황동남의 <서시에 비추어>에서)


2006년 두 번째 펴낸 황동남의 시집 <달맞이 손깍지>에는 158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당사자의 말대로 이 모두가 생활체험에서 우러나온, 시를 쓰기 위해서 시를 쓰기 보다는 살다보니 그냥 시가 흘러나와서 어묵 하나를 팔며, 떡볶이나 튀김 한 접시를 손님에게 내밀며 끄적끄적 받아썼고, 이나마 받아쓰는 일도 얼어버린 땅을 맨손으로 갈아엎듯 손쉽지 않다며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 안 가득 쌓인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연들이


어느 날 문득문득

두개골을 스치고 지날 때

행여 놓칠세라 필을 들면

치매환자가 되어 버린다


능력 안의 것들이

능력 밖이 되었을 때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허탈함 (황동남의 <건망증>에서)


황시인은 주변의 문인들에게 문자를 잘 보낸다. 첨단문명의 핸드폰은 시인들이 좋아할 함축적이고 짧은 글을 보내기에 알맞다. 아마 시적 표현이 그 주를 이루지 않을까 한다. 가끔은 삐진 척 퉁명스럽게 문자를 황시인이 보내온다며 K여류시인이 웃었다. 내가 유독 이 말에 민감해진 이유는, 이처럼 시인이란 존재를 잘 설명하는 말도 드물어서일 것이다. 시의 본질은 그런 ‘삐짐’이 아닐까. 미세한 기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마음의 물결이 천길 벼랑으로 굽이쳐 휘몰아드는, 대낮에도 깊고 깊은 어둠에 잘 떨어져 한 순간에 몇 번씩이나 다시 태어나는 그런 기분이 아니라면 시도 시인도 불가능할 것이다. 남들은 한 번씩만 맛보고 가는 세상이라는 희로애락의 수레바퀴지만 시인은 열 바퀴라도 백 바퀴라도 희로애락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돌려, 한 번의 생(生)을 통하여 수십 생(生)을 맛봐, 삐지지 않을 수가 절대로 없기에 평소에도 난데없이 새초롬 삐진 눈빛으로, 앞으로 쑥 빼낸 목으로, 뭔가 입 속에 가득 담아 우물우물 튀어나온 입술로, 억지로 침을 삼키고 삼켜 세상에 빗금을 그어대는 것이다. 이는 신(神)이 머물던 자리에 뛰어든 호기심 많은 자들에게 내려진 형벌이 아닐까마는, 시인에게 있어서 ‘삐짐’은 좋기만 하다.

치악산 줄기에 둥지를 튼 원주시가 멀리 내려다 보였다. 황시인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손에 들린 두툼한 파일 속에서 책을 한 권 꺼내었다. <달맞이꽃 손깍지>라는 표제가 선명했다. 일부러 자신의 시집을 전해주려고 연락을 받자마자 산중턱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의 친절에 고개가 숙여졌고 나는 정중히 그의 싸인을 부탁했다. 그리고 책을 받아드는 순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골방 샌님 같은 내 손 위로 비바람과 설한에 거칠어진 그의 손이 겹쳤다. 그날 밤 새벽 2시경, 나는 그의 시집을 읽다가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인이 내민 세상에 깃든 역설- 이 아름다운 역설. 그러면서도 역설이 아닌 절대 순리.


매정에도 꽃은 피고 / 황동남


차압에 경매에

쓸 만한 것은 다 가져 가고

돈 안 되는

고물만 오롱조롱 남았는데

그 가운데

솥단지와 양재기 수저는

가져가지 않아 남아 있으니

아, 참으로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래, 복 받을 끼다 복 받을 끼야


 (2009. 1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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