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 이상수의 동서횡단 ] 올바름에 충성하라!

미송 2011. 7. 6. 07:59


[이상수의 동서횡단]


올바름에 충성하라


어느 제후가 묵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에 충신이란, ‘엎어져!’ 하면 엎어지고 ‘자빠져!’ 하면 자빠지며 평상시에는 찍소리 않고 조용히 있다가 임금이 부르면 즉각 응하는(令之俯則俯, 令之仰則仰, 處則靜, 呼則應.) 신하라 했습니다. 이와 같다면 충신이라 할 만합니까?”

참으로 덜 떨어진 인생의 덜 떨어진 질문이다. 군주가 신하들 데리고 조정에서 유격훈련하는 것도 아닐 텐데, 엎어지라면 엎어지고 자빠지라면 자빠지는 게 충신이라니! 저잣거리 말로, 까라면 까고 빡빡 기라면 기는 게 충신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묵자는 이렇게 답했다.

“엎어지란다고 엎어지고 자빠지란다고 자빠진다면 그건 그림자와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찍소리 않고 조용히 있다가 임금이 부르는 즉시 응한다면 그건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대체 그림자와 메아리들로부터 뭘 기대하십니까?”(君將何得於景與響哉? <魯問>)

 

그림자와 메아리에 기대할 것은 없다

 

며칠 전, 고위 공직에 오르는 일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할 일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입신양명 차원에서 “가문의 영광”이라고만 여기던 이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흉내낸 게 틀림없는 충성서약 메모 때문에 불운하게도 “태산 같은 성은”에 “목숨 바쳐” 보답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초고속으로 장관직에서 하차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사사로운 의식수준이 결국 ‘가문의 치욕’을 낳은 셈이다. 노자 할아버지의 번뜩이는 예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해프닝이다. “사랑을 받으나 미움을 사나 늘 놀란 듯하라.”(寵辱若驚) ‘태산 같은 성은’을 입거든 꿈인지 생시인지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고 질퍽거릴 일이 아니라,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그릇인지 아닌지 먼저 삼가 돌아보고 나서 안팎의 조건이 부득이할 경우에만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벨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을 받아들일 일이다. 김 대통령이 충성 메모를 요구한 건 아니로되, 장관 되는 일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인물을 국가 최고 요직의 하나에 임명했다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허물이란 사실은 비켜갈 수 없다. 아마도 지하의 묵자가 김 대통령을 만난다면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을 것이다. “김 대통령께서는 대체 그림자와 메아리들로부터 뭘 기대하십니까?”

 

우리 주제로 돌아가자. 묵자는 맹목적 충성을 강요당하는 군주제 치하에서 활동한 인물이면서도 사람이나 국가에 충성하는 대신 ‘올바름’(義)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다. 제자백가 시대에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군주에게 쓰임을 입어야 자기 사상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도 맹자도 소진도 장의도 자신의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군주를 찾아 평생 천하를 떠돌았던 인물들이다. 묵자 또한 군주들에게 자기 사상을 유세하고 다녔다. 그러나 묵자는 일개 나라의 재상 자리에 앉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문>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다.

 

묵자가 제자인 공상과를 월나라로 파견했다. 공상과는 월나라 왕에게 묵가의 반전·평화·평등·박애사상을 열심히 설파했다. 월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상과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진실로 묵자를 월나라로 모셔와 과인을 가르치도록 하실 수 있다면, 옛 오나라의 땅 사방 오백리를 묵자에게 봉지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상과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월왕은 노나라로부터 묵자를 모셔오도록 공상과에게 수레 50대를 마련해 주었다. 공상과는 그 길로 묵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 그러자 묵자가 물었다. “그대가 월왕의 뜻을 살펴볼 때 어떻던가? 만약 월왕이 나의 말을 듣고 나의 길을 실천한다면 나는 월나라로 가겠다. 그러나 가더라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고 몸을 가릴 만큼만 입을 것이며 스스로 뭇 신하들과 똑같이 어울릴 것이다. 어찌 봉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월왕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길을 실천하지 않는데도 내가 월나라로 간다면 그건 나의 올바름을 팔아먹는 짓이다. 올바름을 고루 팔고자 한다면 나라 한가운데서 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월나라까지 갈 일이 있겠는가?”(<魯問>)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는 삶을 위해

 

묵자가 벼슬을 하고 봉지를 받아 제후의 가신이 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대의가 세상에서 실천되는가 실천되지 않는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화는 <여씨춘추·고의>편에도 실려 있는데 <묵자>와 약간 차이가 있다. <여씨춘추>에는 묵자가 공상과에게 월왕이 묵가의 사상을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공상과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월왕만 묵적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게 아니라, 그대 또한 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만약 월왕이 내 말을 듣고 내 길을 실천한다면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 월왕이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내 길을 실천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비록 월나라를 몽땅 내게 준다 해도 나는 그걸 쓸 데가 없다. 월왕이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내 길을 실천하지도 않는데 그 나라 땅을 받는다는 건 올바름을 팔아먹는 짓이다. 올바름을 파는 일이라면 어째서 반드시 월나라에서 해야 하겠는가. 나라 한가운데서도 가능한 일인걸.”(<高義>)

 

<여씨춘추>에 인용된 묵자의 말이 그의 뜻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일화에서도 우리는 묵자가 평소에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고 몸을 가릴 만큼만 입으며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월왕이 땅을 떼어주며 귀족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데도 그걸 거부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 제자 공상과를 함께 나무라고 있다. 묵자는 올바름을 실천하는 대신 땅을 받는 행위를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치욕’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는 설사 자신의 이상을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는 군주를 만나더라도 땅을 받거나 가신이 되는 대신 평민 또는 그보다도 훨씬 못한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단 재상 자리에 오른 뒤 왕을 설득해 개혁을 실천하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가 나올 수 있겠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일단 높은 자리에 오른 뒤 개혁을 철저하게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흔히 듣고 있다. 가령 “3김 청산”을 외치던 젊은 정치 지망생이 3김의 후광에 힘입어 의원 배지를 달면서도 이런 다짐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그렇게 정치에 입문한 이들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펴길 바라 마지않지만, 많은 이들이 높은 자리에 오른 뒤 그냥 ‘가문의 영광’으로 치부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게 보아왔다. 2500년 전의 좌파 정치가 묵자는 그렇다면 뭘 믿고 봉지도 벼슬자리도 마다하며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 했을까. 그가 믿은 건 묵가의 조직이었다.

 

노동자의 긍지와 법도를 실천하는 조직

 

묵자의 제자는 3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또한 묵자처럼 수공업 노동자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수공업 노동자란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묵가 집단에 들어온 뒤에도 계속 수공업 등 생산노동에 종사하며, ‘거자’(巨者)라 불린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을 갖추었다. 거자의 ‘거’(巨)자에는 오늘날 ‘크다’·‘많다’는 뜻밖에 없지만, 이 글자는 본디 ‘구’(矩)자와 통하며 ‘컴퍼스와 자’(規矩), 다시 말해 ‘노동도구’라는 뜻이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거(巨)는 컴퍼스와 자를 말하며 ‘솜씨 있게 꾸민다’는 뜻의 공(工)자에서 왔다. 손에 노동도구를 쥐고 있는 형상이다”(巨, 規巨也. 從工. 象手持之.)라고 한다. 컴퍼스와 자는 원과 직선을 그릴 때 어겨서는 안 될 기준이다. 그래서 이로부터 거(巨), 구(矩), 규(規)에는 ‘법도’·‘표준’이란 뜻이 파생되었다.

 

묵가 조직의 지도자인 ‘거자’는 이처럼 노동도구를 들고 있는 노동자의 형상이다. 그것은 낫과 망치를 그려 넣은 소비에트의 깃발처럼 노동하는 사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깃발이 ‘직접생산자’의 정권임을 강조하는 데 그친 것에 비해, 묵가 조직의 ‘거자’란 이름에는 노동하는 사람의 긍지뿐 아니라 당시 과학기술 발전의 담당자이던 노동자들이 어떤 ‘법도’에 따라 노동을 하고 실천을 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묵가 집단이 지도자를 ‘거자’라고 부른 사실은, 이들이 시비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표준’을 중시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묵가의 조직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었으며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보더라도 이들의 조직이 매우 튼튼하고 단결이 잘되었으며 규율이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꾸지에깡은 다른 제자백가와 달리 묵가의 조직은 ‘정당’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조직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려 한 묵자였기에 일개 제후국의 귀족이 되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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