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부르디외를 읽는 다른 방법 / 이경묵
-관계․ 전략․ 시간 그리고 반역
1. 소위 ‘비판적’ 부르디외
서점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온갖 ‘post’들의 열풍이 지나갔다. 아직도 그런 책들 많이 나와요!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여겨 보면 이론의 토착화라고 하기엔 이르나 각 이론의 눈으로 현실을 조망하거나, 현재의 지적 풍토에 대해 비판하는 시도들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에서의 프랑스 담론의 수용양상에 대한 비판의 소리들, 문화적 담론이 쏟아지고 넘쳐나는 상황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들이다. 탈주․욕망․해체 등의 단어를 창백한 쁘띠 부르주아의 속성과 연결시키거나, 텍스트 속에선 이성, 국가, 가족까지 척척 해체하면서 현실정치의 기획에는 왜 그리도 무기력한가를 쏘아붙이는 논조들. 이러한 反프랑스 담론의 목소리 사이에서 ‘프랑스 사회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P. Bourdieu)가 눈에 뜨인다.
포스트사조가 한 걸음 물러서는 시기와 맞물려 부르디외가 번역되고 읽히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일까. 혹은 그의 저작들이 지니는 깊이나 의의가 최근 들어 판명된 것일까. 아니다. 모든 것은 사회적이다. 부르디외 자신이 문화생산의 장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주었듯, ‘유행’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들 사이에서 특정한 이익을 획득하려는 전략들이 만나서 만들어진다. 부르디외 소개는, 이를 통해 얻어지는 차별적 이득과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의 저작에선 해체․담론․욕망 등의 낱말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그의 분석 작업 속에서 사용되는 오인(misrecognition),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등의 개념은 얼핏 보기에도 지극히 ‘정치적’이요 ‘비판적’이다. 포스트주의자들이 제기했던 여러 논지들을 소화한, 정치․사회이론을 꿈꾸어 왔던 독자들에게, ‘문화’에 주목하면서도 충분히 ‘비판적’인 그의 이론은 시장성을 지니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에 걸맞게, 현재까지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부르디외 소개는, 아비투스(habitus),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등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지배구조의 재생산 과정을 고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부르디외의 분석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토대로부터 어느 정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문화적 도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과, 지배계급이 상징폭력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에게 주입시킨다는 사실 등을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더 나아가 그의 계급분석은 ‘경제자본이 급격하게 문화자본으로 전환되어 계급사회가 정착되기도 전에 신분사회로 정착되는’ 한국사회의 굳건한 보수화를 비판하는 근거로, 그리고 ‘아직 일반적으로 경제자본이나 기타 문화/상징자본으로 전환되거나 은폐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며, 단순한 교환에 머물러 있는 그래서 경제자본의 과시가 매우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소비재 이외의 문화적 재화로의 전환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의 후진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물론 위와 같은 소개와 기획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계급투쟁의 일상으로까지의 확장, 지배의 재생산 방식에 대한 분석, 그리고 타 사회의 이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유행’으로서의 부르디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유행이 지난 몇 년 후의 독백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계급적 차이가 먹고, 마시고, 듣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이에 ‘문화’가 계급투쟁의 초점이 된다는 것이나 각각의 계급이 상이한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을 지니고 있기에 상이한 생활양식을 지닌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기성찰적인 독자라 할지라도 잠시 동안의 씁쓸한 자책이나 반성―예를 들어 내가 * *한 유형의 영화(異性, 음악, 스포츠 등등)를 좋아하는 것도 쁘띠 부르조아적 아비투스를 가졌다는 말이군, 역시 난 계급상승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서 멈추어 설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강제적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상징’폭력을 폭로하는 것이, 지배자들의 놀라운 정치감각에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민중 생존권 박탈이란 외침도 시큰둥해진 분위기에서 상징폭력 분석이 지니는 힘은 얼마나 초라한가.
위의 독백은 부르디외의 이론을 계급개념의 확장, 일상에서의 계급투쟁, 아비투스의 사회학, 문화재생산이론 등의 방식으로 이해했을 때 닿게 되는 종착역이다. 그 명명이 ‘비판적’이라는 호의적인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명백히 오독인데, 부르디외를 이미 낡아 버린 이전의 도식과 기준에 끼워 맞추고 있기 때문이요, 현실분석에 현실옹호라는 멍에를 씌우는 ‘마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 마술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씩 짚어보자. ①부르디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사회학을 연결시켰다. 또한 사회적인 것을 강조하는 뒤르껭 전통 위에 서 있기도 하다. 경제, 문화, 사회, 상징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협소했던 계급개념이 확장되었다. ②그의 작업은 사회 계급의 상황과 연관된 ‘문화’에 집중된다. 계급투쟁이 경제부문 이외에 문화, 예술, 학문의 장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확장됨을 밝힘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③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개인과 구조 사이를 매개하는 개념이다. 이를 통해 각 개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구조’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일부분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④그러나 현재까지의 그의 작업은, 지배구조가 재생산되고, 지배가 보다 교묘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는 반면, 행위자들이 진정 새로운 장, 구조를 만들어내는 역동성을 긍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독해는 부르디외를 기존의 쟁점들―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갈라지는 계급, 계급 양극화, 결정론과 자유의 대립, 지배구조를 뒤엎는 계기로서의 혁명―에 의지하여 이해하고 평가한다. 이런 구도라면 그의 분석에서 재생산을 넘어서는 역동성을 발견할 수 없음이 당연하며, 교묘한 경제결정론자라는 비난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특정 사상은 그 자체의 문제의식과 시각에 의거했을 때에만 이해되고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얼핏 보기에 어색하지 않은 위의 독해방식에 반대하여,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새로운 잣대로서 시간, 관계 그리고 전략 개념을 제시할 것이다.
2. 도구와 분석들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은 아비투스, 장(場), 그리고 자본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Habitus><Capital>) + Field = Practice. 여기서 괄호 안에 묶여 있는 것은 과거의 조건하에서 형성되어 있는 주관적 성향체계와, 축적되어 있는 자본의 상태이다. 즉 성향과 자본을 지닌 행위자가 현재의 조건과 만나는 것이 현재의 실천이다. 행위자들의 실천은 그것을 산출하는 원리(아비투스)를 만들어내었던 과거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과거의 실천들의 결과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석은 실재를 둘러싸고 그것을 규정지으려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투쟁의 대상이요, 지배와 피지배가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 상징권력이 작동함을 밝혀낸다. 행위자들은 장에 편입되어 게임에 임하는 순간, 오인(misrecognition)함으로써 인식(recognition)하는데 이는 지배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2-1. 도구들 : 아비투스(habitus), 자본(capital), 장(field)
아비투스(habitus)는 ‘구조화하는 구조이면서 구조화된 구조이며, 행동과 인지 판단의 성향체계’이다. 아래 표에서 이전의 생활조건에 의해 구조화되며, 생성도식․지각도식․평가도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실천을 구조화하는 아비투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각 행위자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바꾸려고 하는 전략에 ‘전환전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자본의 전환율은 해당 장의 논리, 지배의 방식, 행위자의 전략을 변화시킨다. 특정 장에서 특정한 자본은 현저히 높은 혹은 낮은 전환율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학위의 과잉은 학력자본(문화자본의 일종)의 경제적 자본으로의 전환율을 떨어뜨려 ‘학력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고학력 실업자가 생기고, 노동분업이 증대하며, 기존 직업에 대한 정의가 변화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갑작스레 경제자본을 얻은 졸부는 어딘가 모르게 점잖은 부르조아지와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는 골프를 배울 수는 있어도 필드에서 이동하는 동안 나누는 고상한 이야기에는 끼지 못할 것이며, 음악회에 가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취향(문화자본의 일종)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식견 있는 부르조아는 그가 떼돈 벌어 갑자기 끼어든 신참자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문화귀족’들(문화자본의 총량이 큰 부르조아지들)은 갑작스레 땅부자가 된 졸부들―이들은 자본의 총량 면에선 문화귀족들과 필적하지만 자본의 구성과 사회적 궤도 면에서 상이하다―에게 ‘교양없는 것들’이라 욕함으로써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데, 이는 쉽게 배울 수 없는 예법, 관습, 품위있는 매너, 말씨, 상식 등의 문화자본이 상징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보다 바로 위에 위치한 계급(분파)을 따라잡으려는, 그리고 바로 아래의 계급(분파)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는 싸움에서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상징자본이다. 이는 그것이 통용되고 인정되고 있는 장 밖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부인된(denied), 오인된(misreconized) 자본이다. 물질적인 특성은 그것이 다른 것들과 관계맺음으로써 상징적 혹은 구별적 특성을 획득하는 바, 이러한 상징투쟁 과정에서 승리하여 권위를 획득하는 자본이 상징자본이 된다.
이와 같은 네가지 유형의 자본의 분배와 관계가 사회내의 객관적 계급 구조를 결정한다. 사회의 전체적인 계급 구조는 다양한 집단들이 소유하는 자본의 총량을 반영한다. 지배계급은 가장 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징적 자본을 소유할 것이다. 중간계급은 이러한 형태의 자본을 보다 덜 소유할 것이고 하층계급은 이러한 자본을 가장 적게 가진다. 그러나, 계급구조는 단순히 총량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데, 각각의 계급 안에는 (1)자본의 구성과 배열 (2)자본을 소유하게 된 사회적 기원과 시간의 양에 의해 구별되는 분파가 있다. 각 계급 내에는 지배분파와 피지배분파가 존재한다.
아비투스가 지각․평가․행동이라는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구조의 형태로 개인들의 육체 속에 각인된 역사적 관계들의 총체라면, 장(Field)은 어떤 권력(혹은 자본)의 형태들 속에 뿌리박힌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객관적 관계로 이루어진다. 장은 특정한 방식의 게임이 벌어지는, 그리고 그 안에서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룰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행위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자본을 확대 혹은 유지시키려 경쟁하는 공간이다. 부르디외는 장을 일종의 ‘자본의 분배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마다, 분배구조의 위치에 놓여지는 자본은 상이하다. 예를 들면 권위, 지식인의 위세, 정치권력, 물리적 힘과 같은 자본들의 가치는 하나하나의 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자리매김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술의 장에서의 자본은 뒤집혀진 경제자본’이다.
모든 장은 신참자에 대해 ‘검열’을 행한다. 장에 들어간 사람은 즉시 어떤 구조, 즉 자본의 분배구조 하에 놓인다. 신참자는 언제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특정한 행동을 해도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이 비판의 소리이든, 혹은 장의 논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든지 간에 특정한 장 내에서의 실천은 곧 게임의 규칙을 익히는 것이 된다. 결국 행위자는 스스로가 말하는 것, 특정 순간 적절한 것, 말로 표현해서는 안되는 것을 학습한다. 그러나 장은 ‘검열’임과 동시에 ‘공모’이기도 하다. 장에 참여한 모든 행위자는 기본적인 이해관계, 다시 말해 그 장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유한다. 비록 장 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적대관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공모가 있다. 검열과 공모는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데, 장의 신참자가 장 내부에서 객관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실천적 감각을 갖추는 순간 검열은 눈에 띄지 않는 가장 완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자는 이전에 자신의 말과 실천을 검열했던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 내면화된 게임의 룰은 그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영원히 제한할 것이다. 이제 검열은 공모되고, 공모는 영원한 검열 하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장 내에서 검열과 공모가 연결되었다고 하는 파악― 장의 안정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즉 검열과 공모에 의한 장에의 편입이, 피지배자의 고통과 지배자의 한가로움을 가져온다는 언급은 거짓이다.
모든 행위자들이 검열에 응하고 공모하는 것은 단지 투쟁하기 위해서이다. 실천을 통해 감각을 쌓아 가는 행위자들은 자신이 지니는 이해에 의하여 자본을 확장하려는 투쟁을 벌인다. 이 투쟁은 어떠한 자본, 어떠한 실천이 구별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장이 유지되는 가장 기본적인 규정을 둘러싸고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끊임없는 상징투쟁이 벌어진다. 경제적 생산의 장, 문학의 장, 예술의 장, 철학의 장, 정치의 장 등 모든 장은 항시 투쟁의 공간이다. 각기 다른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 속에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의 전략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평형상태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2-2. 분석들: 오인(misrecognition) 그리고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
오인은 일견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말하는 듯 보인다. 부르디외를 비판하는 여러 논자들은 오인, 상징폭력 개념의 애매모호함, 혹은 불완전성에 대해 지적한다. 이러한 시각에 의하면 오인은 이데올로기와 같으며 이는 허위의식이다. 과학적 인식, 다시 말해 올바른 인식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인들의 인식은 오염된 허위의식이다. 이러했을 때 각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 주체이기에 수동적이며, 이에 부르디외의 이론은 재생산 혹은 지배를 설명할 뿐 생산 혹은 저항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알지만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오인을 올바른 인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부르디외의 설명을 따르자면,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 그 게임에 참가하는 순간 오인한다. 내깃돈이 되는 자본을 확장하기 위한 실천은,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마찬가지로 오인에 의한다. 만일 오인하지 않는다면 인식할 수 없다. 오인없는 인식은 없으며 모든 인식은 오인이라는 명제는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가장 힘겨운 부분이다. 여기서 오인에 ‘mis-’ 가 붙는 것은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이라는 구분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식이 행위자가 속해 있는 장의 상태 그리고 그가 보유한 자본과 아비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장, 자본, 아비투스는 실천을 도출하는데 그 실천들은 순수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 즉 실천감각에 의한 것이다. 인식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고정되며 현존하는 질서의 승인에 다름 아니다. 행위자는 실천하기 위해 오인하며, 승인한다.
모든 형태의 메커니즘에 맞서 사회세계의 일상적 경험은 인식이라는 점을 재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듯이, 수많은 계급의식화 이론이 제시하는 최종 결론, 즉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생한다는 환상과는 정반대로 시초의 인식은 오인(misrecognition)인 동시에 머리 속에서 성립되는 질서의 승인(recognition)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하다.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82.
고정된 인식인 오인은 권력관계에 대한 승인에 의지한다. 상세히 설명해 보자. 먼저 장 내에는 지배와 피지배관계에 따라 자본이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여러 자본들은 그 분배상태와 타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각각 구별적 이득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위치를 유지 혹은 상승시키려는 행위자는 장의 상태, 자신이 보유한 자본에 따라 실천한다. 즉 불평등이 상존하며 그에 따른 상이한 전략들이 계속된다. 만
일 행위자가 이러한 불평등한 힘의 관계가 없는 곳에서 실천한다면 그때엔 오인을 인식으로 (혹은 상호인지로) 고쳐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는 없다. 사회전체의 오인에서 벗어나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행위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추방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의 인식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뒤집어서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대의 사회공간은 상이한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들의 집합이요 행위자는 장에 따라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모두는 그가 활동하는 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인식한다. 이 상이한 인식이 오인이다. 장마다 검열과 공모의 방식이 각각임을 떠올린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오인은 강제나 억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인을 통하여, 행위자들은 그가 보유한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오인은 행위자로 하여금 장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주며,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장의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질서를 승인하고 오인한 결과, 장 내에서 특정한 구별짓기의 방식이 존속된다. 오인하는 자는 지배당하는 자뿐만이 아니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모두가 오인한다. 이처럼 게임에 참가하면서부터 그 순간 오인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오인에 대비되는 인식, 허구에 대립되는 진실, 이데올로기에 대립되는 실재라는 대립을 무너뜨린다. 특정한 장의 구조적 효과로서 빚어지는 룰은 항상 그 이외의 가능성을 닫아놓으려 한다. 지배자들조차 이미 닫혀진 가능성을 제 스스로 열 수 없다. 제멋대로인 것은 없다. 상징권력이 자의적(arbitrary)인 것이라는 설명에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제멋대로가 아니요, 여러 가능성 중에 고정되어진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 오인된 자본인 상징자본 또한 그 장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즉 모두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 게임하며 그 관계는 누군가의 것으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상징권력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다. 상징폭력의 행사는 통상적인 폭력―특정한 대상에게 가하는 물리력―과는 상이하다. 상징폭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작동하며, 특정한 오인을 만들어내는 형식에 의지하여 작동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사회가 물리적 폭력, 강제에 의해서 뿐 아니라, 동의와 공모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오인이나 상징폭력은, 집권자의 악랄함이나 비윤리성에 대한 폭로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피지배 계급은 기만당하고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속고 있다.
이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권력에 의한 지배는 스스로 기꺼이 지배당하기를 갈망하는 지배이다. 즉 상징폭력, 상징 권력에 의한 지배는 이제 더이상 지배가 아닌 지배이다. 피지배자 또한 지배하며 지배자 또한 지배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이 사회 내에 모든 불평등이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설명의 의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깨끗이 갈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있다. 상징폭력은 분명 폭력이며 상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상징체계는 단순히 중립적인 인식의 도구에서 멈추어 서지 않는다. 행위자가 말하기의 기술을 익히고 사용하게 되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지는 상징폭력에 의해서이다. 상징폭력은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는 잡담을 나눌 때는 지도부와 조합, 그리고 지부들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분석하던 그 화자들이, 내가 그들에게 여론조사에서 제기하는 유형의 문제를 제시하자마자 완전히 당황하여, 실제로 상투적인 대답 외에는 아무 말도 못한다는 사실에 부딪히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질문들은 그들에게 참 거짓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게끔 말하는 방식을 채택하도록 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교 제도는 언어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존재와의 관계, 완전히 비현실화된 세계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언어와의 관계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하기의 의미>,『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126.
이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에게 부과하기 위해 상징폭력이 사용된다는 표현은 기각되어야 한다. 상징권력은 직접적인 행동이나 굴종을 지시하고 명시하는 것이 아니요, 권력자의 한없는 부정축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합법적인 것은, 지배적이면서도 그 자체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며 다만 암묵적으로만 인정받는 제도나 행위 또는 관습 속에 있다. 상징권력은 명확히 가시적이고 명확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묵적인 것이며 숨겨진 곳에서 나온다. 즉 상징권력은 뚜렷하게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특정한 자본의 분배상태로부터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혹은 역전)시키려는 전략들로부터 나온다. 권력이 말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자들로 하여금 보고 말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 즉 상징투쟁은 각 계급별로 상이한 생활조건에 따른 괴리감에서 시작되는 싸움이 아니다. 언제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역시 돈만 많은 인간들이란....” 이라는 질시 이외에 “역시 저 사람들은 다르긴 달라”라는 감탄사 또한 이끌어내려 해왔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이데올로기를 통한 은폐나 속임수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지배/피지배 관계의 존속은 특정한 장 내에서 행위자들 모두가 참가하도록 하는 그럴듯한 게임이 지속되는가에 달려 있다. 즉 상징투쟁은 끊임없이 계급이라는 빈자리가 만들어지고 행위자들 모두가 그 자리를 획득하려 하는 투쟁을 의미한다.
지배는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행위를 용인하는 식이 아니라, 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룰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장 내부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인정하는 상징자본이 있어서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그것을 손에 넣기를 원한다면 하나의 질서가 유지될 것이다. 물론 평온한 경주가 계속된다고 해도 변화는 피할 수 없다. 특정한 자본이 널리 퍼져, 분배구조가 변화하고 더 이상 구별적 이득을 가져오지 못하게 될 때 새로운 상징자본이 등장하고 장의 논리가 변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할 경우 현재의 지배계급이 가장 유리하다. 그는 현재 상징자본으로 오인되고 있는 자본을 이미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전환전략을 구사함이 용이할 것이다. 물론 지배계급 또한 변화하는 장의 논리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계급탈락한다.
피지배자는 장의 참가자 모두가 가져야 할 것들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지배당한다. 즉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에 뒤처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징권력은 무엇인가 획득하기를, 공부하기를, 열심히 하기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그 지배는 아주 세련된, 피지배자가 열심히 자신을 지배당하게 해달라고 기꺼이 안달하는 지배이다. 이렇게 해서 상징폭력은 교묘함이나 보다 더 허구적이라는 형용사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지배상태의 유지를 설명한다.
3. 재생산에서 생산으로: 관계 그리고 시간
부르디외가 새로운 장 혹은 구조가 만들어지는 진정한 변혁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시각은, 부르디외의 도구들과 분석 결과가 날카롭다는 사실은 수긍하지만 변화나 생산에 대해선 미흡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제 각 행위자들이 자율성의 발현, 변혁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또 다른 이론의 출현을 기다려야 한다. 부르디외는 아래와 같은 고민과 함께 폐기처분되는 것이다.
실천이 아비투스가 구성된 과거의 사회적 조건들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면, 행위자들이 기꺼이 지배받기를 원한다면 변화 혹은 변혁의 가능성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또한 행위자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징폭력에 의해 오인하고 무의식적으로 지배의 논리에 맞추어 실천한다면 구조가 아비투스를 만들고 그 아비투스가 또 구조를 만드는 순환은 어디서 끊어질 것인가.
그러나 그의 모든 개념과 분석이 관계와 시간을 도입하고 있음에 주목한다면 재생산은 생산과 다르지 않다. 아니 재생산:생산, 정태적:역동적이라는 식의 대립항은 허구이다. 이 대립항은 진정한 새로움을 희구하며 새로움을 바람직한 것으로 추켜 세운다. 그러나 새로움이나 변화란 바람직한 것일까? 혹은 지배자들에게 위협적일까? 아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롭게 모습을 바꾼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항상 이전의 것들과 뒤섞이고 포섭된다는 점에 있다. 부르디외는 장의 상태에 따라 상징자본이 변하며, 전환전략의 성패에 따라 지배자가 교체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또한 순수한 피해자 혹은 가해자는 없으며, 항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지배/피지배 관계 안에서의 자리바꿈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다. 마찬가지로 가치체계의 전도는, 과거를 현재로 그리고 현재를 미래로 연결시키는 방식, 즉 말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다는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해방의 도래가 아닌 것이다.
가치체계의 전도 후에도 상징권력은 장 안에서의 행위자들을 길들이고 기꺼이 지배당하게 할 것이요, 아비투스는 실천의 방향을 결정지을 것이다.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운명은 기계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이 아니기에 배제나 차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레 갈라진다. 그러나 이는 선별의 과정이다. 아비투스나 오인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들이 타협과 희망, 저항과 승인이 뒤섞여 있는 과정임을 밝혀낸다. 궤적은 반복된다. 모든 것은 새롭지만 영원히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3-1. 관계로서의 계급, 사회공간
부르디외에 의하면 계급은 실체가 아니다. 계급이 실체가 아니라는 지적은 그것이 관계적임을 의미한다. 즉 계급은 사회공간에서의 ‘위치’를 의미할 뿐, 어느 특정한 개인을 명명할 수 있는 정형화된 특징이나 속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문화’로까지 이어졌다는 지적은 애매하다. 부르디외의 계급분석은 지배계급이 자신의 부를 은폐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는 사치품을 사들이는 일을 폭로하는 작업이 아니다. 즉 그의 분석을 특정한 계급 성원들에게 특징적으로 관찰되는 실천의 양상을 규정 내리고 a라는 실천=A라는 계급이라는 공식을 도출하는 작업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구별짓기는 계급이나 실천들에 하나씩의 속성을 부여하고 낙인을 찍는 작업이 아니다. 위와 같은 독해는 어떠한 상황에서 왜 그러한 효과들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분석을 선언으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한다. 실천은 행위자들이 전개하는 전략이요, 그 위치는 항상 유동적이다. 마찬가지로 계급은 실재하지 않는다. 계급은 사회공간 위에서의 위치요, 빈자리로 남아 있어서 주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사회계급은 단 하나의 특징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으며 여러 특성들(성별, 나이, 출신계급이나 출신종족 등)의 총합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으며, 인과관계 즉 조건지우고 조건지워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기본 속성(생산관계상의 위치)을 중심으로 짜여진 일련의 속성들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모든 관여적 속성들간의 관계구조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구조가 각각의 속성과 각 속성이 실천에 행사하는 효과들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p.183~184.
물론 모든 것이 관계적이라는 말은, 사회적 위치들 그리고 실천들의 속성의 가변성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지만 상대성이나 불확실성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각 행위자들의 실천은 특정한 장 내에서 일정한 속성을 획득한다. 이 속성들 간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구별적 가치가 생겨나며, 이 구별적 가치에 의해, 사회공간 내에서의 위치가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또한 관계적 성격은 상동성(homology)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사회가 상이한 장들의 집합이요, 각 장이 각기 다른 게임의 룰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들 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계급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상동성 덕택이다. 사회공간은 ‘장들의 열려진 집합으로서의 다차원 공간’이다. 자율적인 룰에 의지하는 장들 간의 상동성은,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본주의하에서 존재하는 특정한 장이 돈과 상관없는 완전히 자율적인 공간이라는 환상에 맞선다.
분명 장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 간에는 위계가 있다. 경제적 생산의 장은 분명 다른 장들을 종속시킨다. 부르조아지 혹은 쁘티 부르조아지, 프롤레타리아트 각각의 실천 또한 그들이 사회공간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의해 상동성을 지닌다. 다양한 실천들 속에 존재하는 상동성에 의해 특정 계급 아비투스를 지닌 행위자들은 장을 달리하고 있다 해도 자기편을 구분해낼 수 있다. 이들은 똑같은 ‘물건’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이러한 해석은 관계로서의 계급을 망각한 것이다― 실천의 ‘생성원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 계급의 성원과 자기 편을 분류해낼 수 있는 것이다.
상이한 장의 고유한 논리에 따른 재해석을 거쳐 구조화하는 구조(modus operandi)가 생산한 구조화된 산물(opus operatum)로서 나타나는 특정한 행위자의 모든 실천과 작품은 의식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서로 객관적 조화를 이루며, 의식적인 협정 없이도 같은 계급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으로 화음을 낼 수 있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282
이제 각기 다른 장 속의 행위자들은 상이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각 장에서의 특정한 룰과 이해관계에 따라 실천하는 행위자들은 장들 간의 상동성에 의해 장의 경계를 넘어 적과 동지를 식별할 수 있다. 즉 계급동맹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동성을 동일성(Identity)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혼동은 돈 많은 자가 정치의 장에서도 학문의 장에서도 예술의 장에서도 지배자라는 파악으로 이어질 것이요, 다차원 공간으로서의 사회를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들 간의 싸움터로 환원시킬 것이다. x라는 행위자와 y라는 행위자는 언제나 바리케이트의 같은 쪽에 있다는 식의 계급동맹은 논리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된다. 會者定離.
상동성 개념에 의해 특수한 상황하에서 상이한 장을 가로지르는 계급투쟁이 항상적인 원칙에 따르지 않고도 즉각적이며 일시적이지만 객관적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상동성을 동일성과 구분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계급투쟁이 일상생활까지 확장되었다는 이론상의 발전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본래 상징투쟁이었다. 관계로서의 계급간의 투쟁은 상징투쟁이다. 계급 양극화 모델의 폐기에 이은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확산, 직업의 세분화니 정보사회니 하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나, 화합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은 모두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된다.
누구나 계급간의 불평등이 상존함을 알고 있고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계급지배가 지속된다. 권력구조의 유지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모두가 지배계급이 되고자 하는 전투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악의 원천이 한 줌의 자본가들이라면 계급투쟁은 동일성의 문제이리라. 그러나 상동성에 의지한 계급투쟁은 사닥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모든 행위자들 간의 공모에 의해 진행된다. 계급투쟁의 전선은 어떤 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리고 행위자들의 어느 정도의 안정된 이익 확장을 위해 그어졌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편가르기는 끝나지 않으며 전투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상징투쟁을 둘러싼 두 가지의 함정을 피해가자. 먼저, 상징투쟁은 ‘가치관들의 싸움’이 아니다. 만일 사회가 그 물적 토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맞추어 위험하기도 하고 혹은 안정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면, 사회공간을 단지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파악하는, 자유주의적 환상에 빠지는 셈이다. 각 행위자가 보유하고 있는 자본의 분포는 불평등하기 때문에 상징투쟁은 가치관과 의견의 차이 등의 점잖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치열한 투쟁이다. 동시에, 상징투쟁을 진짜 투쟁이 비경제적인 문화 혹은 상징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된다.
만일 사회공간은 소위 객관적이라서 상징, 담론 등은 경제구조와 비교했을 때 부차적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사실과 사건을 ‘물상화’시키는 셈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 혹은 남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력을 획득하려는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 오히려 모든 투쟁들은 상징투쟁이다. 행위자들이 방어하고자 하는 동시에 탈취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위치’이다. 부르조아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담지자로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 이외의 이들로부터 (비단 프롤레타리아트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계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에게도) 인정받아야 한다. 상징투쟁은 ‘물질’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질성’을 지닌다.
3-2. 전략 그리고 자율성
부르디외의 ‘전략’은 주체를 부정한다. 합리적 선택이론을 비롯한, 주관주의적 입장과 객관주의적 입장 양자 모두에 반대하는 부르디외는 주체(subject) 대신에 행위자(agent) 개념을 사용한다. 각 행위자는 계산된 목표를 계획적 혹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실천적 감각을 통해 즉각적인 실천을 행한다. 실천은 특정한 아비투스를 지닌 행위자에 의해 채택되는 전략이다. 전략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의 상태와 자신이 속한 장의 상태에 의해 방향지워진 일종의 노선이 전개되는 것인데, 먼저 재생산할 자본의 크기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고, 재생산도구들의 상태―상속에 관한 관습과 법의 상태, 노동시장의 상태, 학교제도의 상태 등―에도 좌우된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주체 없는 전략을 설명하는 명확한 예가 될 것이다. 누구도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 의해 부과된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눈을 가리고 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행위자들은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고 실천한다. 부르디외는 ‘학력인플레이션’에 의한 여러 현상들을 분석하면서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이미 가치하락된 학위의 소유자들이 공모하여 학위를 그들 스스로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즉 가치하락된 학력자격에다 객관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한다. 학력의 가치하락이 행위자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리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학위를 취득한 행위자는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그 위에 더 많은 것을 덧붙이고 신비화하기도 한다. 대학졸업장 만으로 취직하기 힘들 때, 그는 그 위에다 영어회화, 어학연수, 심지어 창의력, 비판정신, 패기, 운 등의 조건을 쌓아올릴 망정 자신이 획득한 ‘문화자본’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혹자 曰, “요즘 아무리 대학 나와도 취직하기 힘들다고 해도, 대학 물먹은 사람과 아닌 사람들 뭐가 달라도 달라.” “대학시절은 나에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는 시각을 주었다.” 등등, 이러한 모든 개인적집단적 오인의 효과들은 환상이 아니라 실질적인데, 개인적집단적 전략들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 속에 이미 각인된 아비투스를 지니는 개인들은 각각 자신의 상태―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 그들이 속한 장―에 따라 실제상황을 재조직하며, 이에 기꺼이 상황을 오인한다. 물론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에 의한 오인을 잘못된 인식 혹은 오류라 주장하지 않는다.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모든 개인들이 오인하며, 그것이 자신의 성향과 자신이 보유한 자본에 따라 고정된 면에서 다른 모든 이들의 오인과 다를 것이 없다. 오인이 올바름과 대비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 고정된 혹은 승인하는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수많은 오인이 있을 수 있으며 실천은 예측 불가능하다. 행위자는 자신이 지니는 자본, 자신이 속한 장의 상황에 따라 오인한다.
이처럼 이미 정해진 객관적인 노선들의 전개로서의 전략개념은 각 행위자의 실천이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기회 사이의 불확실하고 불균형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행위자는 구조의 담지자 혹은 특정한 본질의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예측하며, 투자한다. 이러한 예측과 투자가 실천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부분이요, 이 때문에 행위자는 실천감각에 의해―하나의 본질로는 해명될 수 없는 ―실천을 계속한다.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은 전략을 이용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본을 보존하거나 증대시키며, 자신의 사회공간 위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거나 개선하려 한다. 아비투스는 자신을 생성시킨 과거의 조건을 현재 상황과 연결시키는데, 이 작업은 변화에 대해 방어하려는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과 현재 상황에 따라 놀라운 변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물론 그 놀라운 변신조차도 정해진 노선들의 전개이다.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탈바꿈하지만 정해진 궤도를 겪는 사회, 아비투스에 의한 자동적인 조정이 이루어지는 장, 각 행위자들이 모두 노력하고 변화하려 열심인 모습이 부르디외가 주체없는 전략을 통해 설명하는 현대이다. 변화와 진보, 안정과 보수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주체없는 전략이라는 표현도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주체의 부정은 인간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키는 것일까? 부르디외는, 주체를 부정하고 즉각적인 실천감각에 의한 전략 개념에 의지한 분석이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지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한다.
사회의 법칙에 대한 지식의 발전이 지각된 필연성의 정도를 고양시킨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사회과학이 진척되면 될수록 그 만큼 더 ‘결정론’이라는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략) 알려지지 않은 법칙은 하나의 자연이고 운명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법칙은 자유의 가능성으로 나타납니다. 「문제의 대상이 된 사회학자」,『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p.59~60.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떠올려보자. 무슨 일을 해도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움이다. 반대로 모든 것이 비결정 상태라고 하면 행위자들은 무엇이든 결정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정은 ‘자유’와, ‘비결정’은 ‘조바심 혹은 기존가치에의 종속’과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결정과 비결정에 대한 새로운 정의내리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통해 자유의지 대 결정이라는 대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항에 의지해 이루어지는 작업은 얼마나 많은가. 그 대표적인 예로, 아주 중립적이며 점잖은 말투로 억압되고 눌려 있는 주체들 속에 자율성이 살아 있다는 충고의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본래 자율성을 지닌 존재들이니 자유로우라고? 결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세계 내에서 말 그대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곳에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결정론은 자유를 위한 조건으로 변모한다. 아비투스는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자유롭기도 한 주체를 설명하기 위한 매개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행위자가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가를 말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한다.
3-3. 시간 그리고 가치체계의 전도
재생산. 사회가 개선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구미에 맞는 개인들을 찍어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면 그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전술했듯, 지배구조가 재생산된다는 것은 변화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의 오인이 계속되고 행위자들이 같은 궤적을 따름을 의미한다. 즉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의 유지와 그의 재생산은 행위자들이 특정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가치체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선행자가 이미 지나간 자리를 뒤쫓는 후발자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마치 제논의 역설과도 같이 두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고, 한 걸음 다가서면 반 걸음 물러나고. 그렇다면 영원히 반복될 이 저주받은 게임을 멈추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다시 말해 가치체계의 전도가 필요하게 된다. 부르디외는 변혁을 위해서는 객관적 기회에 묶여 있는 주관적 기대를 풀어내야 함을 지적한다.
주관적 기대와 관련한 객관적 기회의 갑작스런 감퇴는 이전에 피지배계급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지배계급의 목표에 대한 동의의 단절을 초래해 그 결과 진정한 의미의 가치체계의 전복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 267.
이 알쏭달쏭한 말을 풀어보자. 부르디외는 주관과 객관을 넘나드는 작업을 계속해서 진행해 왔다. 먼저 주관적인 기대는 객관적이기도 하다. 이는 자신의 몸 안에 각인되어 있는 아비투스가 구조화된 구조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아비투스는 이전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주관적 기대가 변화한다는 말은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존재하며 작동하는 객관적인 것을 조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한 객관적 기회는 주관적이기도 한데―아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각 행위자들이 자신의 주관적 기대와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실천의 결과물인 객관적 기회들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주관적이라는 구분은 사회적:개인적이라는 대립항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쇠는 아비투스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간격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아비투스는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이다. 몸에 각인되어 있는 생성도식을 만들어낸 과거의 생활조건과 무의식적인 실천적 감각이 펼치는 실천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의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개인과 구조라는 식의 공허한 간격이 아니라 ‘시간’인 것이다. 행위자들은 과거를 현재 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 또한 품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행위자가 기억하는 부분만이 남아 있으며, 미래는 현재의 실천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을 만큼만 존재할 것이다. 전략을 통해 행위자는 현재 속에 뒤엉켜져 있는 과거와 미래를 재구성한다. 앞에서 설명했던 아비투스의 지체현상은 과거를 그대로 현재와 미래에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비투스가 과거․현재․미래를 조정하는 한 예이다. 특정 장에서의 행위자의 실천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순간 결정하는 행위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이용 가능한 과거와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 연결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행위자의 실천은 기계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
그러나 이 실천의 발명이 행위자의 판단에 비교적 안정적인 전략―자본의 상태와 장의 상태에 의해 이미 방향지워진 노선―에 의지하여 그 테두리내에서 반복될때 지배는 고착화된다. 가치체계의 전도, 새로운 장의 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미래와 연결시키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음을 말한다. 오인의 극복은 은폐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꿈꾸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구상하는 (그에게 구상하도록 하는) 특정한 미래를 버릴 때, 불확실성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오인에 뒤를 이은 또 다른 오인의 출현이다. 그것이 혁명이든, 생활공동체의 건설이든, 창업이든 간에, 이는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전도의 과정은 힘겨울 것이다. 사회내에 온존하는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구조, 장의 논리를 바꾸는 작업의 지난함은 지배자들의 방해뿐 만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가치체계의 전도’를, 이미 익숙해진 모든 것들이 혐오(嫌惡)로 변하고, 자명한 것들은 모두 불확실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개연적인 관계들에 대한 인식이 이들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에의 애착을 중단해야 한다. 이리하여 운명애는 오디움 파티 즉 자신의 운명에 대한 증오로 전변된다.『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p.396.
여기서 앞에서의 언급, 행위자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들을 폭로하는 것이 자유의 조건으로 변모한다는 ‘결정과 자유의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결정되어 있음을 알 때 자유는 가능하다. 또한 자유는 결정된 것에서 벗어난 비결정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남으로써, 이미 있었으되 보지 않았던 것을 봄으로써 미래를 다른 모습으로 결정하려는 시도이다.
변혁은 특정한 하나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계급관계의 본질이나 특정한 계급적 실천의 속성은 없다. 모든 것은 관계적이며 기존의 모든 것들은 파괴되고 다시금 세워진다. 이렇게 끊임없는 생산을 재생산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발명한 새로운 실천을 기존의 것들(사물화된 역사인 장, 자신이 보유한 자본을 안정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전략 등)에 포섭시키는 행위자의 성향이다. 아비투스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변혁은 사건의 해결이나 모순의 종결이 아니라 어긋남을 통한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4. 진리와 반역
부르디외는 소위 말해지는 비판적 분석가가 아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 부르디외에게 붙여진 소위 ‘비판적’이라는 형용사가, 이론이 비판적일 수 있는 조건을 몇 가지로 정의내리고, 특정한 방법론이나 관점에 대해 A는 현실옹호이고 B는 비판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방식에 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묘해지는 지배방식에 대한 폭로, 인간 자율성의 복구, 재생산 이론가로서의 한계 등의 평가는 부르디외의 작업과 연결되기 힘든 기준을 사용한 것이다. 둘째, 부르디외는 소위 비판적 학문들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사실 ‘부르디외는 무엇을 위해 작업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소위 비판적 이론이 갖추고 있는 폭로―비판―개선으로 이어지는 미래에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 자신의 분석에 비판 혹은 진리라는 낱말을 붙이기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이여야 한다는 것은 요즈음 학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이제 이론은 균형 외에도 변화를, 안정뿐 아니라 저항도 설명해야 한다. 사회과학이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만들어가려는 사회공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여전히 사회과학은 사회를 올바르게 만들어갈 수 있는 도구로서의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질책하는 것은 모든 지식인․학자의 꿈이요, 이를 위한 도구로서 사회분석을 사고하는 것도 뿌리깊은 바램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속에서 비판은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이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약간은 비판적이여야 하며, 비판력은 하나의 덕목으로 타락했다. 부르디외는 비판할 수 있는 그리고 비판해야만 하는 사람으로서의 학자․지식인이라는 위상을 문제로 삼는다. 특정한 실천은 비판적일 수 있으나, 비판적 지식인․비판적 관점․비판적 이론은 없다. 자칭 타칭의 비판적 지식인은, 특히 학문함을 사회변혁과 연결시키려는 지향을 지녔다면 더욱 더,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공해주거나 투쟁을 (객관적 정세에 따라선 침묵을) 선동하고 조직하기를 기대한다.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대신 말해주거나―이를 위해 특정 구조나 사회의 희생자들을 상정한다―혹은 억압의 상황 속에서도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이들을 고무한다―이를 위해 각 주체들을 자율성과 창의성을 지닌 주체들로 규정한다.
부르디외는, 현실을 보다 잘 설명해줄 수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에서 도출되었던 모델들을 거부한다. 이러한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 대신에 실천논리(practical logic)가 등장한다.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의 테두리내에서 사회과학자는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행위자들의 실천을 설명해 왔으며 자신이 연구대상과 맺는 관계에서 나오는 특수한 원칙을 연구대상인 행위자들의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론적 논리(logical logic)는 세계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 불과한 것, 엄밀히 말해 연구자 자신의 시선에 비추어진 세계를 그 ‘세계 자체’인 것처럼 속여 왔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작업의 도구이자 결과인 이론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실천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사회내에 관철되는 규칙이 있어서 행위를 예측할 수 있다거나 행위자들의 자율적인 행위들의 총합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식의 설명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그 연구작업 자체가 현 상황을 고정화시키고 중립시키는 이론화 효과를 발휘한다. 올바른 방법론 혹은 모델이란 학계에서의 구별적 이익을 낳는 상징자본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비판적 혹은 엄밀한 방법론이라는 구별적 이익을 획득한 이론은 학계의 상황에서 결정되며, 학문함은 학문의 장에서 특정한 학계의 관행(게임의 룰)에 따라 정해진 전략을 구사하는 실천에 다름아니다. 학자들 또한 오인한다. 물론 그는 특정한 이념에 기댐을 통해서, 때때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혹은 개인들의 능동성이나 소외된 자들의 역사를 대신 써줌을 통해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입밖에 내는 것이 허락된 진리를 말하고 그것에 기대어 서는 승인일 뿐이다. 한때 비판적이었던 입장들이 어느덧 대학 내의 학과나 수업이라는 진열장 속에 얌전히 들어앉는 쇠락의 과정을 보라. 어느 순간 반역의 역할을 담당했던 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징폭력이 행사되는 수단으로 복무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의 발언권이 그가 비판했던 부조리한 상황이 그에게 부여해준 위임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에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사유의 독점을 열망하는 사람들(지식인)은 사회학적으로 사유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 게임(사회를 말하는 적절하고도 정당하며 합법적인 방식을 강제하기 위해 투쟁하는 영역 즉 학문의 영역)에서 무엇이 행해지는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이로운 사람들, 다시 말해 지식인들과 대변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옹호 해달라고 위임한 사람들은 질문을 제기할 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위임으로부터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합니다. 지식인들이 사실상의 위임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지식인들은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가」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80.
학자는 승인함으로써 오인하고 그래서 인정한다. 이제 학계는 그 자체로 분석되어야 하며, 학자는 특정한 사상을 전파함을 멈추고 끊임없이 자신의 오인을 또 다른 오인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 자신이 발언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오인. 이 과정에서 오인을 올바른 인식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학문의 장에서 유행이 바뀌고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는 것은 특정한 오인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그 견딜만한 속도의 사이클을 가속화시키는 일뿐이다. 지금은 온당한 것으로 보이는 가치체계를 전도시키는 일. 위임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 자연스러운 변화나 바람직한 발전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물론 한번의 제대로 된 일탈이 그를 계속 비판의 땅에 머무르게 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바램이다.
사회내에 상존하는 억압과 불평등은 항상적인 투쟁과 저항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러나 모든 투쟁과 저항이 봉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행위자는 이미 객관적 현실과 공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분석은 이러한 양 측면 모두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석자는 사회의 특정한 부분을 고치고 개선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 또는 이념에 의해 해방될 수는 없을 것이요, 지식인들은 누군가를 해방시킬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저항이라는 개념이 일회적인 혁명으로 모든 분야에서 일시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면, 학자의 현실 분석 또한 하나의 저항으로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석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이는 또 다른 모습의 지배를 유지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쳇바퀴 돌기와도 같은 반복 속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작업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각자에게 고유의 수사학을 수립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진정한 대변인이 될 수 있는 방법,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 모든 대변인들의 야망일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자신은 사라지기 위해 일한다는 계획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면, 아마 그들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번만은 정말 꿈꿀 수 있습니다. 「말에 저항하는 방법」,『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p.27.
지식인은 사라지기 위해 일해야 한다. 해방이 스스로의 과업이듯 지식인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해방시킬 수 없다. 그 대신 현존하는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임권을 파괴하기 위해 일하기, 사라지기 위해서 일한다는 지향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확정지우며 상징폭력을 생산하는 지식인의 위상을 떨쳐내기 위한 기획, 변혁을 위한 기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식인은 특정한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그 속에서 자리매김된 자신의 위치를 변화시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에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다. 모든 분석은 누군가에 의해 저항을 위한 도구로 채택될 수 있을 망정, 따라야만 하는 교시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이론이나 분석은 다른 모든 이들의 실천과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실천에 불과하다.
이제 서두에서 밝혔던, 소위 ‘비판적’ 부르디외에 대한 반론을 정리해보자. 부르디외는 계급개념을 확장하여 일상생활이 계급투쟁의 전장임을 천명한 것이 아니다. 계급분석은 문화 혹은 일상생활에서 갈라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상이한 취향과 그 취향에 따라 나타나는 전형적인 실천을 구분하여 일람표를 만들어내는데에 멈추지 않는다. 물론 그는 문화를 권력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가 확장되어 문화를 포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치를 바라보던 시각, 다시 말해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권력이나 지배의 수단만을 문제로 삼는 시각으로 일상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지배자들의 생활양식을 폭로하는 일, 즉 A라는 음악 = 부르조아지, B라는 음악 =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공식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지배의 도구가 폭로되어 스스로를 구별시켜주지 못할 때가 되면, 지배계급은 이미 또 다른 도구를 마련할 것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지배의 비밀을 쫓는 숨바꼭질 대신에 부르디외의 분석은 상징투쟁이 벌어지는 양상을 분석한다.
계급투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투쟁 즉 상징투쟁의 과정이다. 이 상징투쟁은 경제․정치․문화 등의 칸막이쳐진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실천이 일어나는 장 속에서 자신의 자본을 확장하고 상징자본을 규정내리며 획득하려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는 고정된 계급 행위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엇’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쫓고 쫓기는 급박한 경주는, 누가 앞에 있으며 그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폭로하여 끝나지 않는다.
행위자들은 이미 불평등함을 알고 있다. 특정 장 내에서만 인정받는 자본인 상징자본과, 모든 행위자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장을 유지시키는 게임의 룰이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지배/피지배를 설명할 수 있다. 지배자의 억압과 피지배자의 고통이라는 대비로 계급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거나 고수하려는 각각의 실천과 전략들의 결과로 지배는 계속된다. 눌린 자를 자각시켜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노력, 적극성이 어떻게 굴절되고 있는가, 그의 불만, 분노를 포함하는 인식이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구조와 개인 사이를 매개한다는 설명을 고집한다면, 아비투스는 절충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결정론의 시각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시각에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아비투스는 자유와 결정론이 대립하는 틀내에서는 자리매김될 수 없다.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는, 미래와 이어지는 현재의 과거로서, 끊임없는 변화가 질서 속에 포섭되는 과정을 고찰하기 위한 도구이다. 행위자가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조건을 연결하고 불확실함에 투자하는 순간에 실천감각이 작동한다. 실천감각의 작동은 즉각적이다. 아비투스에 의한 실천의 조정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없이 자유롭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듯한 곳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는 지속된다. 이와 같은 분석은 아비투스의 자연스러움을 거북하게 한다. 이 불쾌한 분석, 아비투스의 결정론은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밝혀냄으로써 지배의 순환을 끊고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찰되는 변혁이 흔히 말하는 진정한 변혁이나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밝혀두어야 겠다. 변혁은 단지 새로운 룰에 의한 게임의 시작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엄청난 격동조차 삼켜버리며 그 지배는 영원하다. 행위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각인된 과거의 조건을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연결시킨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변혁은 끊임없는 이어져야할 어긋남, 항상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탈 이상이 아니다.
오인, 상징권력 개념은 이데올로기나 지배의 교묘한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지배상태가 사회내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다면 올바른 인식을 위한 방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옳음과 그름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올 수 있는 올바른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오인이나 상징권력은 관계 속에서 나오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행위자 모두가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마주하는 상황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승인하며 그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식은 오인이다. 상징권력은 가시적인 형태로 명령내리고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고 암묵적이기에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파악을 통해 완벽한 수혜자나 완벽한 피해자란 없으며 모두의 공모에 의해 장 안에서의 게임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불평등한 자본의 분배상태, 지배/피지배 상황 등에 대한 암묵적 승인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행위자의 실천을 지배상태에 대한 일관되고 완벽한 저항이나 옹호 중 하나로 깨끗이 갈라놓을 수 없다.
모든 인식이 오인이며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변혁(저항)이 고착화된 하나의 지배상태의 한 측면 대한 반대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새로운 지배를 용인하고 공고히 하는 상징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오인에 이어 나타나는 또 다른 오인은 장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략들의 결과이며 이미 현실 속에 배태되어 있다. 또한 전략의 결과로 변화된 또 하나의 현재 속에서 과거의 비판은 상징폭력의 기반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디외의 분석 속에서 진정한 변화, 변혁을 위한 조언을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그가 말하는 반역은 그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과 스스로가 꿈꾸는 특정한 미래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움을 의미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과 그 이후 도달하게 될 저쪽 편, 그리고 그 이행의 방법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비판하고자 하는 그리고 반역을 꿈꾸는 기존의 바램을 반역한다. 오히려 그의 분석은 숨가쁘게 도착한 종착점에 다시 출발선을 그어놓는다. 비판 혹은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이 점이 그의 분석에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 힘겨운 이유이자, 그에 대한 독해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P. Bourdieu, 1994,『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문경자 역, 솔.
― , 1995,『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편역, 새물결.
― , 1995,『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역, 새물결.
― , 1990, In Other Words : Essay toward a Reflexive Sociology,
Stanford Univ. Polity Press.
― , 1990, The Logic of Practice, Stanford Univ. Polity Press.
R. Jenkins, 1992, Pierre Bourdieu , London; New York: Routledge.
'철학과 신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e 게바라 (0) | 2009.03.31 |
---|---|
부르디외, 구별짓기 (0) | 2009.03.29 |
로렌쪼<타고난 공격성> (0) | 2009.03.28 |
라즈니쉬 (0) | 2009.03.27 |
삐에르 부르디외 <실천이성> (0) | 2009.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