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부르디외, 구별짓기

미송 2009. 3. 29. 10:52

요즘의 많은 광고는 당신(혹은 당신의 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함을 요구한다. 화려한 선물 상자나 단지 돈만으로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품격을 강조하는 광고문구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광고는 과연 무엇에 호소하는 것일까? 이것은 당신이 더 특별해지려면 돈이나 경제력 이외의 다른 가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70년대에 출판된, 60년대 프랑스 사회를 분석한 책이긴 하지만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당신의 혈통이나 당신의 교육 정도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신이 즐겨 듣는 음악, 당신이 즐기는 스포츠, 당신이 즐겨 먹는 음식, 당신이 즐겨 입는 옷에서도 당신의 품격이 묻어난다고 말한다. 당신의 품격 속에는 단지 돈과 경제력만으로 잴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수많은 광고는 당신의 품격에 호소한다. 물론 이 속에는 경제력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품격이란 돈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교육이다. 물론 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아이에게 훌륭한 교육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고, 앞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고귀한 취향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이 부르디외가 교육을 단지 교육이라 부르지 않고, 교육 자본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교육은 단순히 지식 획득의 수단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학벌, 유수 대학의 졸업장, 이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증 수표이며, 부르디외가 말하는 사회관계 자본(소위 말하는 인맥)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많은 사람이 골프장에 가는 이유는 단지 골프만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정치인이 조찬모임을 갖는 것은 집에서 더 질 좋은 아침을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며, 김영삼 정권 시절의 산악회 역시 단지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의 모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단순히 재화로서의 돈으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자본이 단지 재화로서의 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듯하다. 그리고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교육 자본과 사회관계 자본이 세계화의 물결을 타면서 보다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당신의 품격을 보다 높이려면 서울에 있는 유수 대학의 졸업장만으로는 부족하고, 당신이 더 특별해지려면 영어권 나라의 국적 하나 정도는 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과소비나 명품 증후군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어느 날인가는 외국어를 구사할 줄 모른다는 부끄러움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되면서, 공적 장소에서 한국어로 말한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글은 예전에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읽고 있을 무렵 써서 부산일보에 실은 글인 것 같다. 우연히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발견해서 올려둔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세가지로 파악한다. 첫 번째 자본은 재화로서의 돈이며, 두 번째 자본은 문화 혹은 학력이다. 세 번째 자본은 인간관계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말하는 학벌이란 두번째와 세번째를 합쳐놓은 거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돈으로 안되는것까지 모조리 돈으로 다 되도록 만들고 싶은 거 같다. 한국은 돈을 중심으로 두번째 세번째 것을 모조리 합치고 싶어하는 외설적 욕망의 천국이다. 외설이란 누누히 얘기했지만, 생식기와 같이 절대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간단하게 책의 내용을 덧붙인다. 출처는 책인지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기록해놓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믿음의 구조는 의식적인 모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mimesis를 통해 이루어진다. 부르디외가 미메시스의 과정에서 강조하는 두가지는 가정에서 부모를 따라하는 과정이나 음악을 듣는 것 등은 부모가 생각하는 시선, 즉 정통성을 배우는 것이다. 정통성을 배운 아이들은 이번에는 짜여진 교과과정(학교) 속으로 들어간다. 학교는 아이들을 아이들에게 정통성을 교육을 통해서 내면화시킨다. 학교에서도 교과과정 외의 다른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미메시스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믿음의 구조가 형성되고, 믿음의 구조에 기반하여 오인이 발생하고 재생산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체계나 정통성에 대해서 그것을 전혀 구성된 것으로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오인이다. 이러한 믿음의 체계가 지각과 평가의 도식이면서 성향의 체계라고 말해지는 아비투스이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우리의 몸 속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좌측통행을 하는 것은 일련의 제도에 대한 일종의 몸의 집착이다. 이러한 신체적 성향을 엑시스라고 부르디외는 부른다. 엑시스의 원래 의미는 병과 관련된 사람의 체질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개념이다.  


다음블러그 <나인선즈> 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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