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리포트를 쓰며

미송 2009. 4. 4. 20:41

리포트를 쓰며


여덟시, 그러니까 나는 일찍 눈을 떴다. 그러나 열시가 넘어서야 겨우 아침식사를 했다. ‘겨우’ 라는 말의 전제엔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 담겼다. 어젯밤 나는 새벽 두시 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일을 하느라 그랬다면 당신 금방 뭘 상상하게 될지. 나는 종종 오밤중에도 잠 안자고 시쓰기를 한다.

 

니체에 대한 - 계명대 철학과 이진우씨가 쓴 <진리의 허구성과 허구의 진실성>- 논문을 읽다가 니체에 심취해 버렸다. 늦게까지 쥐어짜며 니체에게 시(詩)보내기를 시도했는데 아쉽게도 헛짓 아니 밤일로 끝났다. 아침이 피곤했으나 그러나, 4월 6일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할 중간고사 리포터가 세 과목이라는 사실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인간행동과 사회 환경’이란 과목의 과제에 가장 먼저 끌린 이유는 무리하지 말고 주말을 지내야 겠다는 의지, 플러스 영화 한 편 볼 수 있겠다는 즐거운 기대 때문이다. 영화 감상을 한 후 그에 딸린 이론- 정신분석적, 인지발달적, 행동주의적성격이론- 과 접목하여 분석하는 조건이 까다롭긴 하지만, 글을 쓰며 어찌되었든 이론과 실제가 합치되었으면 좋겠고, 휴식을 즐길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욕심을 부린다.

 

포레스트검프, 말아톤, 오아시스, 아이엠샘, 미저리, 예제로 내 준 영화 제목들이 눈에 익다. 거의 다 본 영화로군! 하면서도 정확하게 떠들려고 드니 기억창고에 지식이 개털. 결국 <미저리>라는 영화에 새롭게 빠져보기로 했다. 1947년 9월 21일 출생. 키193cm. 출신지 미국. 직업 소설가. 학력 메인대학교. 데뷔 1967년 'The Glass Gloor' 경력 1971년 메인 주 햄든공립학교 영어교사. 1995년 브람스토커 최고의 소설상을 수상한 스티븐 킹 (Stephen Edwin King). 영화 미저리는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미저리란 짧게 말하면 ‘비참’ 늘리면 고통, 괴로움, 비탄, 불행이란 뜻이다. 영어 구어체로는 불평가,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70세가 되었을 배우 제임스 칸이 주연 역, 폴로 등장한다. 그에 맞서 연기파 여배우 캐시 베이츠가 앤을 연기한다. 1990년. 내가 이십대에 이 영화가 나왔다.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공포와 함께 살아나는 그림 한 장이 있다. 오늘도 그때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주 뚱뚱한 여자가 - 관능하고는 거리가 먼-  희한한 속옷차림으로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들과 노는 장면. 그런 걸 왜 장롱 밑에 숨겨뒀는지 이해가 안됐지만 야한 그림과 섞여 있었기에 포르노 잡지로 보았다. 캐시 베이츠의 미저리 이미지를 대할 때마다 나는  옛날 그 포르노 속 여자 모습이 연상되곤 하여, 돼지와 허영에 찬 여자가 상관되는 점이 많다는 추측을 한다. 

 

폴이 쓴 미저리 시리즈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이어서 평단의 호의적인 반응은 얻어내지 못한다. 폴은 미저리라는 소설 속 캐릭터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녀를 소설 속에서 죽이는 것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설을 마감한 기념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교통사고를 당한다. 더 재수 없는 건 미저리의 광팬이던 애니 윌크스의 집 앞에서 사고를 당하고, 그녀가 그를 구조해 주는 부분이다. 눈 오는 날의 설상가상雪上-加霜.

 

때로는 천사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때로는 광폭하고 잔인한 얼굴로 그녀 애니는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녀의 전력은 엄청 무시무시하다. 간호사 생활을 할 당시 유아연쇄살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녀 손에 구출되어 지극한 간호를 받던 폴은 뒤늦게야 그 사실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친다.

 

어느 날, 당신의 넘버원 팬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당신을 감금하고 고문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보다 더한 생지옥이 없을 것이다. 괴롭히는 이유가 자신이 원하는 데로 소설 속 주인공을 부활시켜 달라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장면을 계속 써 달라는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소설가라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돌지 않을까. 

 

앤은 타자기에서 떨어져 나간 알파벳 N을 일일이 자기 손으로 메워 주며 미저리의 부활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러브스토리를 강요한다. 급기야 폭행도 불사한다. 뜨거웠던 만큼의 사랑이 같은 질량의 폭력으로 돌변한다. 차라리 사랑을 하질 말지. 팬이 되질 말지. 앤은 괴로움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스스로를 물어뜯는다. 죽기까지 그리고 파괴의 대상을 망각할 때까지.

 

결국 앤은 불에 타 죽는다. ‘미저리’는 영화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폴과 앤이다. 여기서 자기 정체성을 잃은 앤을 폴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역겹다.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의 형이하학形而下學을 느끼노라면 자꾸 꿀꿀이가 연상된다. 덧붙여,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철학자가 되고 싶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사약死藥 앞에서의 무언의 변명’ 이 궁금해진다.

 

어째서 앤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뚱뚱한 것 외에는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따뜻한 표정도 가진 여잔데. 각목으로 폴의 발목을 내리쳐 끝내 침대에 쓰러뜨리는 광경에서 그녀의 광증은 더더욱 충만하다. 발모가지를 분질러서라도 제 뜻에 맞추려는, 끝내 지배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이 잔인하다. 상대방이 내 뜻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디스트의 본능.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란 르네 지라르의 첫 번째 저서에 보면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 나온다. 이 책에 보면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든 타자가 숨어 있다.” 는 논리가 들어있고, 그 바탕에서 소설 인물들의 심리가 분석된다. 돈키호테는 아마디스를 통하여 완전한 기사를 꿈꾸었고¸ 엠마 보바리는 그녀가 탐독하던 삼류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하여 사랑의 대상을 키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욕망은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촉발된다는 게, 르네 지라르의 관점이다. 위대한 소설은 대체로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욕망의 허위성을 깨닫게 하거나 진정한 욕망의 의미를 일깨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탈현대적 허무주의 시대에 절대 진리보다 개인적 진실을 강조했던 니체는 생명과 삶에 유용한 환상을 우리에게 권유한다. 서양철학에서의 이성조차 비판한 니체가 권했던 환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앤의 환상' 은 비참한 해악이다. 인간의 뇌는 너무 복잡하여 신묘불측神妙不測 하다고 표현한다. 쫓고 쫓기는 자의 꼬리는 그래서 늘 애매한가. 영화에서 폴은 앤의 요구에 끝까지 저항한다. 당연. 싸이코패스를 만족시킬 방법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과제에 적절했을지 부적절했을지 모를 서론과 줄거리 요약은 마치고, 과제가 요구하는 영화에 딸린 정신분석적, 인지발달적, 행동주의적성격이론 정립을 해 보기로 하겠다. 앤의 행동과 성격은 정신분석적으로 봤을 때 싸이코패스다. 그러면 싸이코패스란 무엇일까.

 

분석이나 특히 쪼개는 일에 나는 별로 취미가 없다. 단순하게,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아래층 여자 윗층 여자 알고 보면 비슷하지 뭐, 하며 그저 편안하게 살자 주의注意다 보니, 그러려니 하며 살다 보니, 뱃살만 느는 나이에 새삼 무슨 분석인가 휴, 그런다. 그러나 숙제니까.

 

19세기에 프랑스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이 사이코페스(Psychopath)증상에 대해 최초로 저술했다. 그리고 독일의 심리학과 슈나이더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 되었다. 싸이코패스란,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않는 매우 폭력적이고 비열한 인간을 의미한다. 아니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애당초 없었다. 중증에 해당된 질병. 죽음이나 슬픔이란 단어와 나무나 종이라는 단어를 정서적으로 구별하지 못하고 또, 죄의식이나 후회를 느끼지 못하도록 유전적으로 설계되었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싸이코패스는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을 저지를수록 차분해진다고 한다. 일본의 한 심리학자는 그들을 ‘정장차림을 한 뱀’ 이라고 표현했다.

 

자, 그러면 구체적 행태에는 어떤 사례가 있는가?

1) 친구의 아이가 똥을 쌌다는 이유로 아이를 벽에 던져 살해한 남성은 웃으면서 그 과정을 설명했다.
2) 노인의 목을 배어 살해한 한 남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씩씩 대면서 잘 안 죽길래 발로 몇 번 찼더니 그제야 조용해지더군요(웃음)'
3) 10살의 한 아동은 새끼 고양이를 양변기 안에 넣어 물을 내리려고 하다 부모에 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그의 끔찍한 악행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른 아동은 애완동물의 항문을 총을 쏘아 죽이고 이를 즐거워했다. 이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4) 한 여성은 자기의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에게 맡겨 버린 채 다른 남성과 수차례 관계를 가졌으며,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려 당국에 넘겨졌을 때에도 그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살인을 웃으면서 마치 '즐거운 게임' 이나 '자기 자랑' 하듯이 설명한다. 사이코패스 아동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끊임없이 다른 아이를 괴롭히며, 거짓말을 하고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특징이 있다. 특히 순종적인 여성은 이들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며 주요 타겟이다.

 

그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대단히 탁월하다. 일반 사람들은 이를 판단하기 대단히 어렵다. 특히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더더욱 그렇다. 이들 탁월한 거짓말쟁이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들의 방법은 대단히 교묘해서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는 물론 사이코패스 진단법 PCL-R 을 계발하고, 관련 저서를 냈던 사이코패스의 세계적인 권위자 '로버트 헤어' 박사도 속아 넘어갔을 정도다.

 

그들은 어떤 외향을 띄고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다. 따라서 겉모양으로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들 중에는 정치지도자, 의사, 사업가도 있으며 아주 어린 아동, 여성도 있다. 최근에는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화이트칼라 범죄자 들 중에 사이코패스가 많다는 보고가 있다.

 

싸이코패스는 그 수가 얼마나 되나?
전 인구 중 약 4%가 반사회적 성격장애, 약 1% 정도가 사이코패스 라고 한다. 미국, 캐나다에서만 300만 이상이라고 하며 도시에 더 많이 존재한다.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보호관찰관, 교도관들은 적어도 한명 이상의 사이코패스를 경험했다.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중 25% 이상은 사이코패스임에 분명하다. 이런 확률이면 누구나 일생에 최소한 1번은 사이코패스와 마주칠 것이다.

 

훌륭한 부모를 가진 정상적인 가정에서 출현하기도 하는 싸이코패스는 어린 시절부터 치료를 계속해도 대부분 효과가 전혀 없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유전자 구조에는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인자가 부족하다는 점과 열악한 가정, 사회 환경이 그들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로서는 명확한 대책은 없고, 관리만 있을 수 있겠다.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들 중에 이들을 평생 격리하는데 강한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유명한 사이코패스들은 누가 있는가?
PCL-R은 40점 만점이다. 점수가 높을수록(30점 이상) 사이코패스의 가능성이 높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 은 3번의 PCL-R 진단평가에서 모두 34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아 사이코패스로 판정되었다. 히틀러, 스탈린 등의 독재자들도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매우 높다. 230명을 죽인 영국의 한 의사도 사이코패스임이 밝혀졌으며 사이비 교주이자 연쇄살인마 '찰스 맨슨', 33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존 케이시' 도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그리고 영화 '양들의 침묵'의 랙터박사, 영화 미저리, 좋은 친구들 등도 사이코패스를 다룬 작품이다. 잘 알려진 정치가, 사업가, 의사, 교수 중에도 수많은 사이코패스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건 이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웃음, 제스처를 무시하고 그들의 말을 집중해야 한다. 그들의 눈부신 외모, 현란한 단어를 무시하라. 사이코패스는 뇌의 구조가 일반 사람들과 조금 달라 언어장애가 있다. 매우 유창하지만 그들의 단어, 문장 연결에는 문제가 있다. 자세히 들어보면 매우 산만한 말들이 많다. 조금만 캐물어 보면 다른 주제로 바꾸어 버린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기 때문에 손동작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흔히 '눈과 혀 중에 눈을 믿어라' 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의 온화한 미소 속에 담긴 '이상한 느낌'과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눈빛' 을 언급했다. 실제로 유영철은 자신의 살인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눈동자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고 한다.

 

오늘 아침, 집 아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문 열어놓은 채 내려다보지 않고 귀로만 듣고 있자니 바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나간 시간들은 모두 아름다움이라더니, 왁자한 아이들 소리가 철썩이는 파도처럼 느껴졌을 때, 소리는 역시 파란색이구나 생각했다. 번뜩이는 그 남자 니체의 눈빛을 그리워하며 지난 밤 씨름하던 미완성 시를 올리며, 이제 그만 안녕.

 

그가 잠든 몸을 깨웠네

 

내 나이 열여덟에 니체를 만났을 때
내 어머니 평생 신봉하던 교회와 목사들
현혹케하는 교훈에 신물 냈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한 말이 너무 어려워 책장을 덮고 말았다
어리석음이 다 변호 받을 순 없겠지
마흔을 넘긴 뜻밖의 아침
니체를 두 번째 만났을 때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용한 환상보다 의식에 의존했던 내 눈이
흔들렸고, 니체의 턱수염까지 흔들리다
흔들리다 부르르 일어섰다
출처 모르는 진리들 어디로 갔을까
허구가 된 진리들 흩어져 뵈지 않으니
신은 죽어도 니체는 죽지 않는다

2009. 4. 4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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